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탈인상주의 (문단 편집) === [[고갱]] === 고흐처럼 [[외젠 앙리 폴 고갱]] 역시 작가의 생애가 예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작가중 하나다. 단 고흐가 표현주의 경향에서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면, 고갱은 [[원시주의]] 경향에서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어찌보면 그의 예술은 여러 상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상징주의]]와도 연관된다. 주의할 점은 고갱 자신은 자기 예술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19j3224a|종합주의]](Synthetism, 綜合主義)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본디 고갱은 [[주식]] 중개인으로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었고 여유 있는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들이 주말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주말화가"로서 그림을 어느 정도 그리고 있었다. 되려 이 시기에는 [[카미유 피사로]] 등의 후에 인상파 화가들로 불리던 화가들의 그림을 사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 [[파일:external/acd1cd66ce12bd5707553c9d346983eec35e40069ff5563cfd13b9dc633d64ed.jpg|width=50%]]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82&contents_id=3779|폴 고갱, 설교를 들은 뒤에 나타난 환상 :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1888]] 그러나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35세에서 돌연 '''처자식 내팽개치고''' 화가가 되었다. 초기에는 프랑스 서부 부르타뉴 지방 퐁타방에서 농민의 삶의 모습을 연구하고 파리로 가서 미술계의 최신 트랜드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뚜렷한 윤곽선과 단순화한 형태, 음영과 [[그림자]]가 없어서 평평한 느낌을 주는 색면, 실제 대상의 [[색깔]]과는 다른 강렬한 색채가 고갱 그림의 특징이다. 고갱의 목적은 인상파들이 초기에 줬던 충격처럼 '''이 인간들에게 엄청난 쇼크를 주는 작품을 만들면 나는 미술계의 no.1이 되겠지'''라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쇼킹한 작품을 내놓지는 못했다. 오히려 [[조르주 쇠라]]가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점묘법]]으로 미술계에 쇼크를 일으켜서 쇠라에게 이목이 쏠리자 쇠라의 점묘법을 가리켜 '''저주받은 점들'''이라고 칭했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우키요에]]를 접하고, 어린 시절 본 페루의 도자기들을 사 모으면서 그런 경험을 살려서 도자기 만드는 작업도 했다. 이를 통해서 고갱은 '''유럽에서 있어봤자 모두가 놀랄 그림은 안 나오겠다. 유럽에서 떠나자.'''라고 결심하고 매형이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에서 근무한다는 것을 알고 파나마로 떠났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 공사는 개쪽이 나고 있었고 매형은 파산해서 고갱을 챙겨줄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고 파나마를 떠나 [[마르티니크]] 섬에서 몇 달 간 머물렀다. 이때 마르티니크 섬에서 고갱은 자신의 스타일을 찾는 성과를 거둔다. 마르티니크에서 돌아온 후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이 친구였던 것으로 유명하다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흐가 고갱을 동경해서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있는 아를로 와주기를 간청했다. 여기에는 고흐의 이상인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뜻도 있었다. 고갱은 9주일 동안 고흐와 함께 지내며 작업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성격과 예술관의 차이 때문에 불화가 심해졌고, 결국 고흐가 자기 귀를 자르는 자해 사건이 일어나자 고갱은 식겁해 노란 집을 떠났다. 두 사람은 이후에 다시 만나지는 않았다. 이후 부르타뉴로 돌아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같은 걸작을 만든 후 1889년에 열린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동남아시아와 일본, 태평양의 독특한 문화를 접한 고갱은 다시금 유럽을 탈출하면 영감이 솟구치는 이상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있는 돈을 다 긁어모아서 [[타히티]]로 떠났다. 심지어 타히티에 갈 때 고갱은 '''공식적인 초상화 화가'''로 자신이 파견되었다고 구라까지 쳤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도 고갱의 구라를 몰랐던 게 타히티가 프랑스의 식민지이긴 했어도 머나먼 변방이었기 때문에 그런데서 사기를 쳐봤자 아무도 따질 생각을 안했던 탓이 컸다.(...) 고갱은 때묻지 않은 타이티의 원주민들과 교류하는 밝고 희망찬 미래를 상상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타이티는 문명화가 진행된 곳이었고 타이티의 원주민 소녀들은 뚱한 표정으로 고갱을 소닭보듯 할 뿐이었다.(...) 고갱 그림 속의 원주민 여성들의 표정이 그냥 뚱한 것은 이런 이유도 있다고.~~뭐야 이거~~ 부인과 다섯 명의 아이까지 뒀음에도 [[여자]] 관계도 꽤나 복잡한 편이었다. 타히티에 간 뒤로 몇 차례 현지 [[여성]]과 [[결혼]]과 동거를 거듭했고, 개중에는 '''15세''' 정도의 [[미성년자]] [[소녀]]도 있었다. --[[로리콘은 병입니다]] 고갱님...-- 첫번째로 타히티 생활을 하고 돌아온 뒤에 프랑스에서 머물던 시절에도 미성년자들과의 관계가 심각했다. 안나 자바네즈라는 동남아계 미성년자 소녀와 애인으로 동거하기도 했다. 다만 안나 자바네즈는 20대였음에도 고갱이 13살이라고 구라를 쳤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 [[파일:external/c2db73181cd61cef0705286205da62f2f3baffc49368d73c935b3d2d68375344.jpg|width=50%]] ||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1898년 타히티에서 2년 동안 머무르면서 자신만의 그림을 체득한 고갱은 이후 프랑스로 돌아왔다. 의기양양하게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이 미술계에 쇼킹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으면서. 하지만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사람들은 '''이게 그래서 뭐 어쨌다고?'''라는 반응 정도였다. 게다가 고갱이 그림제목으로 붙인 타히티어들을 유치찬란하다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보면 원초적인 그림과는 다르게 금테두리로 장식을 하였는데 자신의 그림이 대작이라고 확신한 고갱이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의 고전들처럼 화려한 장식을 한 것이다. 이것도 당대에는 뭔 허세를 부리냐며 조소하는 이들도 있었다고.~~무슨 생각이냐, 돈을 시궁창에 갖다 버릴 셈인가~~ 하지만 지금은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고민을 잘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목 자체가 사실 우리가 고민해봐야 할 문제 그 자체기도 하다. 결국 다시 타히티로 돌아간 고갱의 삶은 궁핍했다. 그림을 그려서 프랑스로 보내서 친구들에게 팔아서 돈을 부치라고 했고 친구들은 어렵게 그림을 팔아서 돈을 부쳐줬다. 하지만 고갱의 경제관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쳐진 돈은 며칠 안 돼서 날리기가 일수였다. 이후 타히티보다 좀더 문명의 손길이 덜 탄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로 옮겼지만 이곳에서는 앞서 정착해있던 가톨릭 주교와 다툼을 일으켰고 현지인들을 위한답시고 총독을 비난하는 등(...) 좌충우돌 했다. 결국 알콜중독과 악화된 매독의 증세로 1903년 5월 8일 고갱은 히바오아에서 숨을 거두었다. 고갱은 자연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자신의 그림 속으로 녹여내서 그려냈다.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내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후대의 [[표현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문명을 혐오하고 원시와 자연을 예찬하는 [[원시주의]](primitivism) 특성도 찍었다는 특징도 있다. 어찌보면 이는 과거 [[낭만주의]] 사조의 [[오리엔탈리즘]]과 유사하다. 이국 문화를 동경하고 이상향인양 미화하는 것이니까. 다만 차이가 있다면, 고갱은 오세아니아 지역의 섬문화를 동경했고, 이전의 낭만주의와는 다르게 적어도 예술 형식 면에서는 서구 우월주의를 버렸다. 그랬기에 이국적인 표현을 그림에 반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예술 형식 면에서고, 내용이나 정신을 보면 ~~[[로리콘은 병입니다]] 고갱님~~ 남성우월주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할머니가 [[페미니스트]]여서 도리어 반항한걸지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