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니스 (문단 편집) === 중세 === ||[[파일:튀니스 자이투나 모스크.jpg|width=660]]||[[파일:튀니스 자이투나 사원.jpg|width=330]]|| |||| 앗 자이투나 사원(일명 올리브 모스크). [[카이로우안]] 대사원에 이어 튀니지에서 두번째로 세워진 모스크로, [[말리키]] 학파를 따른다. |||| 670년 [[카이로완]] 건설과 함께 시작된 [[우마이야 왕조]]의 이프리키야 정복은 698년 하산 이븐 앗 누만 알 가사니 휘하의 4만 대군이 재차 카르타고를 점령하며 확고해졌다. 동로마 해군의 반격을 염려한 하산은 카르타고 항구와 성벽을 파괴하고 그를 대체할 중심지로 배후의 투니스를 선택하였다. 따라서 699년 3월 기존 마을과 튀니스 석호 사이에 현재의 메디나 (구도심)인 신도시를 건설하였다. 본래 기독교 성녀 산타 올리비아에게 봉헌되었던 성당은 중심 모스크로 개조되었는데, 올리비아의 이름을 아랍어로 직역한 '자이투나' 사원으로 명명되었다. 기존 카이로완 대사원과 유사한 형태인 자이투나 사원은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들 중 하나이다. 그후 하산은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의 명으로 이집트의 [[콥트교]]도 노동자 1천을 고용, 투니스에 전선 건조를 위한 병기창을 세웠고 튀니스 석호와 바다 사이의 1km 간격의 회랑에 수로를 뚫어 함대가 발진할 수 있게 하였다. ||[[파일:튀니스 마드라사.jpg|width=800]]|| || 737년 세워진 앗 자이투나 마드라사. [[페스]]의 알 카라위인과 함께 세계 최고(最古)의 대학 지위를 다툰다. || 투니스를 거점으로 동로마군의 해상 공세에 대항하려는 우마이야 왕조의 노력은 703년 하산이 해임된 후로도 지속되어 큰 결실을 거두었다. 투니스에서 발진한 우마이야 해군은 [[발레아레스 제도]]를 점령하고 [[사르데냐]]를 습격하는 등 서부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동시에 투니스는 카이라완과 함께 8세기 튀니지 지방의 양대 도시로 성장하였고, 731년 이프리키야 총독 우바이둘라 이븐 하바브는 자이투나 대사원을 확장하였다. 9세기의 아랍 지리가 알 야쿠비에 의하면 당시 도시는 육지 부분은 점토 벽돌, 호숫가는 돌로 구성된 성벽을 두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 무렵부터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성장기도 잠시, 741년 [[베르베르 대항거]]와 함께 마그레브는 20여년간 혼란에 돌입하게 된다. 745년 카이라완의 건설자 우크바의 증손 압둘 라흐만이 피흐리 왕조를 세우고 전투 끝에 [[카와리지]] 베르베르 인들을 제압했지만, 755년 동생 일리아스가 그를 암살하며 내분이 발발하였다. 소득 없는 전쟁 후 일리아스는 동생 아므란과 조카 하빕에게 각각 [[가프사]], 투니스를 내어주고 자신은 [[트리폴리]]로 물러났다. 하지만 일리아스가 협정을 어기려 하자 하빕이 재차 봉기해 그를 죽였다. 그리고 하빕은 다시 재차 반란을 일으킨 카와리지 베르베르인들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고, 761년 [[압바스 왕조]]가 베르베르인들을 토벌한 후에야 안정이 회복되었다. 768년 카와리지 베르베르인들은 재차 봉기하였다. 무함마브 가문의 이프리키야 총독 우마르 이븐 하프스는 반군의 투브나 포위를 격퇴하였다. 그후 반군이 카이로완 총독부를 포위하자 우마르는 구원에 나섰는데, 중도에 습격을 받아 투니스로 철수하였다. 곧 재정비하여 보급품과 함께 카이라완에 당도한 그는 771년 공성전 도중 전사하였고, 도시는 점령되었다. 다만 투니스는 트리폴리와 함께 압바스 왕조의 거점으로 남았고, 이들을 기반으로 후임 총독 야지드는 773년 카와리지-베르베르 반란을 최종 진압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