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시즘 (문단 편집) ===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일상적 파시즘, [[질 들뢰즈#s-3.5|미시 파시즘]]) === 파시즘이 근대주의라는 인간의 합리성에 기반한 과학과 기술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며, 주로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된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포스트 모더니즘이 유행할때 많이 퍼졌다. 근대 시민혁명을 통하여 신분사회가 사라지자, 신분을 대신할 새로운 정체성으로 '민족'이 등장하였고, 의무교육, 징병제 등의 근대적 제도로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즉 [[민족주의]]는 근대 [[모더니즘]]의 창조물이다. 그리고 파시즘은 근대성의 폭주이다. 국내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학자인 [[임지현(역사학자)|임지현]] 교수가 유명하다. 임지현 교수는 1999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를 통해 국내 진보진영에게 민족주의 비판 담론을 소개하였으며, ''''우리 안의 파시즘''''을 통해 '''일상적 파시즘''' 개념을 주장하였고, 파시즘은 위로부터의 강압과 함께, 아래로부터의 민중의 자발적인 동의를 얻어낸 합의 독재인 [[대중독재]] 였으며, 따라서 정치적 체제인 파시즘뿐만이 아니라, 민중의 평범한 일상속에도 내면화된 파시즘적 양상의 문화가 만연하다고 주장하였다. 임지현은 오랫동안 한국사회에 스며든 지도자 숭배와 복종의 문화, 가부장주의와 성차별주의, 가정폭력, 민족주의적 과대망상증과 외국인 혐오, [[386세대]]와 같은 [[운동권]]의 군사주의와 서열주의, 성추행 등을 일상적 파시즘이라고 비판하였으며, 진보진영 내부에도 이러한 파시즘적 모습이 있다며 자성의 목소리를 내었다. [[강준만]] 교수는 임지현 교수가 정치사회적 파시즘 비판은 외면한 채 '일상 속의 파시즘' 과의 전쟁만을 선포하고 있으며, 일상적 파시즘'이 대안이 없는 '진보 허무주의'라고 비판하였다.[[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000501/7530659/1|#]] 임지현 교수는 2022년에 우리 안의 파시즘 2.0을 출간하면서, 일상적 파시즘에 대하여 보충하였다. >파시즘의 집단심성이 한국 사회의 결을 이룬다고 볼 수 있는 징후는 수없이 많다. 그것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긴 목록을 구성한다. > 정작 큰 문제는 대안 세력으로 자처하는 이들의 사고와 운동 방식조차 밑으로부터 파시즘을 떠받치고 있는 한국 사회 고유의 결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선민의식|자신만이 절대적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부 좌파들의 도덕적 폭력은 극우 반공주의의 매카시즘적 폭력과 결을 같이한다.''' 상대방에게 이러저러한 딱지를 붙임으로써 자신의 헤게모니를 확보하려는 권력 지향적 글쓰기가 여전히 지배적이며, 좌파들의 논쟁 또한 권력 지향적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는 공공적 논의를 아예 사유화하려는 조짐까지 엿보인다. “현실 정치 공간으로부터 해방된 공간”이라는 사이버 공간의 의사 소통 역시 쌍방향적 민주적 의사 소통의 방식보다는 언어와 논리의 폭력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현실 정치 공간의 논리를 그대로 재현한다. 파시즘적 현상을 비판하는 논리 자체가 파시즘의 인식 지평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장 자유롭고 재기 넘치며 신선해야 할 학생 운동조차 행동 양식과 의식 구조는 파시즘의 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아낸다. 일상적 파시즘이 우리 사회의 저변에 얼마나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예들이다. >---- >[[임지현(역사학자)|임지현]], 우리 안의 파시즘, 10p >더 중요하게는 그러한 이분법이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운동 자체가 파시즘적인 억압기제를 내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감는다는 점이다. 소련과 동유럽의 집권 공산당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 사회민주당의 관료화된 노조, 1968년의 프랑스 공산당과 노동총연맹, 지도와 연대의 이름으로 노동자 사이의 차별을 지우려고 했던 주류 노동운동의 관행 등에서 진보와 파시즘적 억압관행이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이들 운동이 정치적·경제적 파시즘의 타도에 성공했다고 해도, 새로운 억압기제를 내장한 이상 그것은 새로운 문제를 일으킬 뿐이다. >... >20세기 현실사회주의의 경험에 대한 역사적 성찰 위에서 진보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면, 이들의 변화전략은 상당히 단선적이고, 교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식론적으로 그 전략은 토대를 일방적으로 강조함으로써, 무한히 복잡한 미시권력의 네트워크이자 일상생활의 모든 국면에 침투한 위계적 권력의 메커니즘을 파헤치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공산귀족|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름으로 특권적 이해의 네트워크를 구축한 노멘클라투라의 권력 독점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해버렸다.]]''' 또 인식의 지평 자체가 생산관계와 제도의 영역에 고정됨으로써, 포괄적인 사회적 관계망과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권력의 지배와 착취가 이뤄지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설 자리가 없었다. 특히 토대를 강조하는 경제주의적 편향은 문화를 상부구조에 간단히 편입시킴으로써, '''상징적 문화구성체와 그 안에서 표명되는 하비투스(habitus)가 사회·경제체제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따라서 더 큰 역사적 규정력을 갖는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노멘클라투라의 독점적 특권에 대한 노동자·농민의 반발은 지도부의 과학적 이론과 역사의 발전법칙에 맞는 노선을 거부하는 미성숙한 계급의식의 표현으로 치부되었으며, 노동자와 농민은 그저 당 지도부의 교화 대상일 뿐이었다. >... >현실사회주의의 도덕적 타락과 몰락은 '좋은 헤게모니'를 가진 우리가 '나쁜 헤게모니'를 몰아내고 권력을 쟁취해 구조와 제도를 바꾸면 사회가 변화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면 386세대 운동권의 군사주의와 서열주의, 운동 명망가들의 잇단 성추행과, 가정폭력, 5·18 기념식 전야 운동권 주역들의 광주 룸살롱 음주 스캔들 등이 일간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586세대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우리 안의 파시즘'은 이들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한 이후에 나온 오만과 편견의 결과라기보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이미 뿌리가 깊게 내려진 것이라고 봐야 한다. 스탈린주의와 천황제에 기반을 둔 지도자 숭배, 청소년 시절부터 규율과 복종을 내면화시키는 학교 교육, 군사주의 문화와 엄격한 위계질서, 카드섹션처럼 일사불란한 학생운동, 여성을 내적 식민지로 만든 가부장주의, 공격적 성차별주의와 이성애중심주의, 일본제국주의의 군사 동원체제에 그 뿌리를 둔 박정희 유신독재의 민족주의적 정신교육, 순수혈통에 집착하는 가부장적 혈통주의와 인종차별주의, 민족주의적 과대망상증과 외국인 혐오증 등 파시즘으로 발전할 수 있는 집단 심성이 한국사회의 결을 이루고 있다는 징후는 586세대의 말과 행동에서 자주 발견된다. >... >강남 좌파라서 문제가 아니라, 반대파에게 '토착 왜구'와 같은 원색적이고 극우적·민족주의적 색깔론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진보 도착증'이 문제인 것이다. (...) 반대파에게 툭하면 '친일파' '민족 반역자' 등의 프레임을 씌우는 색깔론이 문제인 것이다. '토착 왜구'나 '빨갱이'는 박멸과 척결의 대상일 뿐 정치적 대화 상대가 될 수 없다.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빨갱이 사냥에 나섰던 군사독재의 '국가'보안법과 민족정기의 이름으로 토착 왜구 사냥에 나선 586세대의 '민족'보안법은 자기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반역의 프레임을 씌운다는 점에서 같은 정치적 문법을 구사한다. '민족'보안법이 '국가'보안법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믿을 이유는 없다. (...) '친일파 신색깔론'이 일베의 수구적 색깔론과 문법적으로 얼마나 다른지도 의문이다. >---- >임지현, 우리 안의 파시즘 2.0 , 15~20p >본 논문은 [[질 들뢰즈|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타리]]의 이론을 통해 파시즘의 특성을 살펴본 글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파시즘, 전체주의, 자본주의 등의 정치 형태가 유적(類的)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파시즘은 거시정치의 측면에서 보다 미시정치의 영역에서만 파악 가능한 것이다.''' 파시즘은 미시적 주체화(감염)에 의해 만들어진 대중적 흐름이 국가에 반하는 형태를 띠면서 작동한다는 점에서 전쟁기계와 유사하다. 그러나 파시즘은 ‘분자적’ 흐름이라기보다 ‘분자적 몰성’을 지닌 ‘미시 편집증’의 흐름이다. 파시즘은 긍정성과 생성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자신과 주변 모두의 파괴로 귀결된다. 이들에 따르면 나치의 경우처럼 ‘파시즘-국가’가 형성된 것은 우발적인 상황이며, 이는 파시즘이 국가장치에 포획된 결과일 뿐이다. >파시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실의 주체화에 대한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자신의 역능에 대한 무한 긍정과 동시에 이질적인 힘들을 조합하여 끊임없는 생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461862|파시즘에서 벗어나기 - 들뢰즈와 가타리의 논의를 통해 살펴본 파시즘]] >능동적 힘에 대한 니체의 주장이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도 사실이며, 정치철학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좌파에 의해 파시즘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동적 힘이나 공격성에 대한 니체의 언명들이 통째로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으며, 아직도 중요한 정치철학적 논의를 제공한다. >들뢰즈는 초기에 니체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었다. 특히 능동적 힘의 긍정은 그 수용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그런데 니체에 대한 이 태도가 점차 수정을 겪는다. 들뢰즈(가타리와의 공동작업을 포함하여)의 미시 파시즘 분석은 이 변화와 수정의 한 가운데에 있다. 들뢰즈는 파시즘의 성격을 미시적으로 분석하고 규정하려 했고, 그를 통해 미시 파시즘의 위험을 경계했다. 미시 파시즘은 도처에 편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미시 파시즘의 존재에 대한 그(들)의 분석과 주장은 근본주의적 함정에 빠지는 듯하다. '''미시 파시즘론은 모든 미시적인 권력과 폭력까지 미시 파시즘의 이름으로 비판하고 비난하는 듯하다.''' 결국 들뢰즈는 초기에 자기가 가졌던 힘에 대한 긍정을 스스로 포기하는 듯한데, 이 변화는 일정하게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결과였을 것이다. >본 논문은 모든 권력과 폭력을 미시 파시즘으로 해석하는 미시 파시즘론의 문제를 분석하고, 더 나아가 파시즘이 단순히 미시 파시즘과 등치될 수없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통속적인 해석은 파시즘의 핵심이 마치 미시 파시즘적 성격에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 둘은 서로 분리되면서도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 >... >과거에는 국가 권력을 비판하고 평등을 주장하는 좌파는 파시즘과 아예 거리가 멀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그런 좌파라고해서 미시 파시즘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좌익 조직들이라고 해서 자신들의 미시 파시즘을 퍼뜨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유지시키고 배양하며 극진히 여기는 자기 자신인 파시스트,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분자들을 갖고 있는 그러한 파시스트를 보지 않으면서, 그램분자적인 층위에서 반-파시스트가 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다. >>---- >>G. Deleuze/F. Guattrari, 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enie, Minuit, 1980, 천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 2 (김재인역, 새물결, 2001), p. 410. >우익만 파시즘에 빠지고 이념적으로 정의와 진보를 내세우는 좌익은 미시 파시즘에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좌익도 자주 미시 파시즘에 빠질 것이다. '''[[꿘|이념적으로는 좌파를 지향하면서도, 생활 속에서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이며 파시스트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 >그래서 모든 미시적인 폭력과 권력까지 파시즘이라고 부른다면, ‘파시즘’ 이라는 말은 너무 무차별적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닌가? >... >들뢰즈는 도처에 존재할 뿐 아니라 도처에 생성하는 미시 파시즘을 해부하고 비판하고자 한다. 조금이라도 폭력과 권력에 몸담고 있으면 파시즘적이라고 비판하게 된다. >... >모든 폭력이나 권력이 미시적 차원에서 언제든지 파시즘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은 맞다. 미시적 차원에서 권력을 사랑하고 폭력을 사랑한다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두 그 자체로 미시 파시즘인 것일까? 그것들을 모두 미시 파시즘으로 불러야 할까? >... >'''미시 파시즘론은 미시적 권력과 폭력을 모두 미시 파시즘이라고 명명할 뿐 아니라, 미시 파시즘을 그 자체로 파시즘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생기는 혼동과 모호함은 엄청나다.''' >먼저 ‘파시즘’ 개념의 경우 ‘권력’이나 ‘폭력’의 개념과는 다른 상황에 있다는 데 주의하자. 무엇보다도 ‘권력’ 개념이 서술적이고도 분석적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반면에, ‘파시즘’은 그렇지 못하다. 그 개념을 역사적으로 혹은 정치학적으로 사용하자면 그것은 20 세기에 등장했던 정치경제적 권력, 특히 부정적으로 폭력적인 양상을 띤 정치권력을 지칭해야 할 터이다. 곧 1930년대에서 시작해 1945년에 종말을 맞이한 독일의 히틀러 정부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부. 이 두 정부만이 국가차원에서 파시즘적 권력과 폭력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20세기에 존재했던 다른 독재정권이나 전체주의와 달리, 그 권력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군중의 참여와 동의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독재정권과 전체주의에서는 국가 차원의 군사적이고 억압적 기제가 전면에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얼핏 보면 히틀러 정부와 무솔리니 정부만을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규정이 협소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파시즘’ 개념은 독재나 전체주의와 구분해서 엄격하게 사용되어야 할 것이고, 그 규정은 상식의 차원에서 접근하기 쉽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갖는다.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019760|미시 파시즘론의 함정-니체의 능동적인 힘을 너무 꺾어버린 들뢰즈]] >탈현대사상은 어떤 사상보다 니체의 텍스트에 빚을 많이 졌다. 거꾸로 니체 역시 탈현대 사상의 덕을 크게 봤다. 그만큼 이 둘의 관계는 긴밀하고 호혜적이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니체 텍스트에 대한 탈현대적 해석은 여러 가지 점에서 보충되거나 내부적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 데리다나 들뢰즈 등이 니체에게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 모색은 되돌아보면 탈코드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 텍스트에는 그 못지않게 가치의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보수적 혹은 존재론적 측면도 있으며, 존재론적 힘과 정치적 권력 사이에서도 여러 차원에서 균열과 괴리가 벌어지고 있다. 니체가 강조한 ‘강자’가 새로운 정치를 열어준다고 쉽게 믿기도 힘들다. 그러나 이들 균열과 괴리를 드러내는 것이 무익하거나 해로운 일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니체 텍스트를 오늘의 사회의 관점에서 새롭게 읽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적극 참조해야 할 터이다.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157586|니체에 대한 탈현대적 해석을 넘어가기]] [youtube(mDY3tS7K4tQ)]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에서는 파시즘을 거시적인 정치적 현상보다는 일상속의 미시적인 생활양식으로 접근하는 편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은 1990년대 전체주의론에 어느정도의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무언가 폭력적이거나, 권위적이거나, 집단주의적 요소가 있으면, 개나 소나 죄다 파시즘이나 전체주의로 몰고 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파시즘 연구자들이 다루지는 않는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은, 파시즘을 '이성에 대항한 반란'으로 보며 낭만주의와 관념론적 성격에 주목하는 관점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인종주의적으로 반유대주의를 주장한 것은 아니라면서, 니체와 파시즘과의 연관성을 세탁해서 변호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