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시즘 (문단 편집) === 제브 스테른헬의 정의 === 파시즘의 혁명적 성격에 주목하며, 근대성을 넘어선 일종의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으로 보았다. [[조르주 소렐]]의 혁명적 생디칼리슴에서 신화 이론에 주목하였으며, 민족주의 우파와 사회주의 좌파의 결합이 파시즘이라고 보았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신화 이론과 파시즘의 연관성에 대한 스테른헬의 관점은 이후 합의파 학자들에 의하여 이어진다. >스테른헬이 볼 때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는 계몽주의의 휴머니즘, 합리주의, 낙관주의의 거부를 전제로 출현한다. >그러나 스테른헬은 계몽주의의 전통을 거부할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려 했던 파시즘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으로서의 민족사회주의로 정의할 수 있으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모두를 반대하는 제3의 길이라고 보았다. 또한 20세기의 새로운 대안인 파시즘은 혁명적이다. 그것이 혁명적인 것은, 계몽 사상의 거부에 뿌리를 둔 공동체적이며 반개인주의적이고 반합리주의적인 새로운 정치문화와 세계관을 제시하려 했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근대 기술과 산업 그리고 자본주의의 장점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개인과 집단의 관계의 본질"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지적 · 도덕적 · 정신적 · 정치적 틀을 개조하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완벽하게 통합될 수 있는 공동체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 파시즘의 혁명성이 있으며 또 거기서 참신함과 매력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파시즘이 만약 계몽주의의 전통을 넘어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려는 제3의 길이라면 그것은 "최초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한 표현 가운데 하나"다. > >계몽주의의 근대성을 넘어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태어나 프랑스의 정치 문화를 요람으로 삼아 자랐다. 스테른헬의 표현을 빌리면 이 시기에 프랑스는 "파시스트 이데올로기가 유럽의 다른 지역, 특히 이탈리아보다 20년 앞서 출현한 곳"이었으며 그 이데올로기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 플란톤적 의미에서 파시즘의 이데아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상적 형태의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한 축은 드뤼몽, 바레스, 모라스 등이 명확한 형태로 표현한 통합적 민족주의, 또는 "종족적 민족주의"이다. 스테른헬이 혁명적 우파로 명명한 이들 극단적 민족주의 세력은 경제적 근대화와 정치적 민주화로 시작된 대중의 시대를 배경으로 탄생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우파이고 제3공화정으로 구현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당시의 프랑스 우파는 혁명적 우파의 대두와 함꼐 두 개로 재편된다. 그 두 개의 우파는, 스테른헬에 의하면, 전통주의에 기반하고 의회주의를 지지하는 보수적 우파와 공화정 타도를 외치는 새로운 우파 혹은 혁명적 우파였다. > >그러나 이상적 형태의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는 혁명적 우파의 '종족적 민족주의'와 혁명적 [[생디칼리슴]]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다. 후자 역시 전자와 마찬가지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역사적 산물로서 경제결정론적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로부터 태어난다. 대중의 상상력을 장악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혁명적 변화의 가능성을 말살한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때로는 마르크스주의에서 합리주의적 요소를 제거하고 혁명의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를 부인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스테른헬은 이러한 '반합리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수정'이 가장 정형화된 형태를 프랑스의 생디칼리슴 이론가 소렐의 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성보다는 신화의 힘을 중시하고 인간의 직관과 도덕, 행동주의와 영웅주의를 찬양하면서 기존 질서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던 소렐의 사상과 혁명적 우파의 극단적 민족주의를 결합하려는 최초의 시도 역시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이루어졌다. 1911년 악시옹 프랑세즈 계열의 민족주의자들과 소렐주의자들이 함께 만든 '프루동 서클'은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비록 파시즘이 정치적인 성공을 거둔 곳은 이탈리아지만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발상지는 프랑스다. >...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탄생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스테른헬이 우파적 요소보다 좌파적 요소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스테른헬이 볼 때 "파시즘의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차원을 이루는 것은 언제나 [[마르크스주의]]의 수정이다······파시즘의 역사는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하려는 끊임없는 시도 또는 새로운 사회주의를 향한 지속적인 노력의 역사로 서술될 수 있다." 따라서 비록 스테른헬이 프랑스 학파의 파시즘 해석에 정면으로 도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파시즘의 정의와 관련해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파시즘은 우파보다는 좌파적 현상이며 보수적이라기보다는 혁명적이라는 전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파시즘은 좌파적·혁명적 현상인가? 파시즘과 보수주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하는가?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프랑스 파시즘에 관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낸 역사가들은 무엇보다도 파시즘과 보수주의를 날카롭게 구분하는 프랑스 학파의 전제를 거부한다. >... >파시즘에는 급진주의와 보수주의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파시즘을 보수적 측면과 반동적 측면으로 나누고 어느 한쪽이 더 지배적이었다고 주장하는 것" 은 잘못된 것이다. 파시즘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반대되는 것들의 종합"이기 때문이다. >---- >김용우, 프랑스 파시즘에 대한 논쟁, 한국서양사학회, 2001, 서양사론 68호 이러한 제브 스테른헬의 파시즘에 대한 정의는 조르주 발루아의 파시즘에 대한 정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파시즘=민족주의+사회주의.' 마치 수학 공식처럼 제시된 파시즘의 정의는 1926년 1월 말 발루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1926년이라는 시기는 단지 이러한 정식을 공표했다는 의미를 지닐 뿐, 실제로 발루아는 페소가 창설되기 전부터 민족 문제와 사회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왔다. 특히 1911년의 프루동 서클이 이러한 시도를 중심 과제로 삼고 있었다는 데 대해서는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전에 비해 더욱 포괄적인 방식으로 발루아가 자신의 운동을 정의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즉 프루동 서클에 이르는 시기까지 발루아가 자신의 시도를 군주제적 민족주의와 혁명적 생디칼리슴의 종합으로 주장한 데 비해 페소 창설 이후에는 이러한 결합 대상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라는 한층 보편적인 개념으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 >발루아는 파시즘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종합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먼저 두 운동의 공통점에 주목했다. 발루아가 볼 때 두 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은 반자유주의, 좀더 구체적으로는 반개인주의였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같은 기원을 가진 두 운동이다. 이 두 운동 모두 지난 세기의 개인주의가 파괴시킨 근본적인 사회 조직들을 재조직하고 재구성하려 하기 때문이다." 가령 민족주의가 금융가와 상인의 국제주의에 의해 황폐화된 민족을 다시 회복하고 그것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려 했다면, 사회주의는 경제적·사회적 개인주의가 파괴시킨 농민과 노동자를 보호하려 했다. 그리고 민족주의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또 사회주의가 민족 문제에 관심을 표명한 것은,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공동의 기원 때문이다. > >발루아에 의하면 두 운동은 반자유주의라는 같은 기원을 가졌음에도 오랫동안 적대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까닭은 먼저 '독일 사회주의', 즉 국제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들 사이에 국제주의의 명분을 전파함으로써 노동 운동에 반애국주의적·반민족주의적 경향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민족적 전통을 지닌 다양한 사회주의에 국제주의를 전파했고, "민족주의가 모든 유형의 사회주의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처럼 외래의 사조인 마르크스주의가 프랑스 노동자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발루아는 이를 다국적 기업하에서의 임금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다. 노동자들은 임금 하락을 막기 위해 각국의 노동자들과 단결해야만 했으며 마르크스주의의 전파와 민족적 이해에 대한 경시 역시 이러한 "임금의 즉각적인 옹호"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발루아가 볼 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의 더 근본적인 원인은 자유주의에 있었다. 자유주의적 경제·사회 체제, 발루아의 표현을 빌리면'사회·경제적 아나키즘'은 부단히 노동자의 가족을 파괴하고 삶의 근거를 박탈함으로써 이들을 정착할 곳 없는 현대판 '유목민'으로 만들었다. 발루아에 의하면 노동자들에게 조국과 민족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가족의 총합이며 상호 부조와 협동의 원천이다. 마치 "아픈 어머니 대신에 아이를 돌봐주는 사람이 이모와 사촌"이듯이 확대된 가족으로서의 조국은 가난한 노동자들의 생존 근거다. 이에 비해 부르주아 계급에게 조국은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을 소유하고 있고 이 자본을 이용하여 어떤 나라에서건 정착할 수 있으며 또 자신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계급에게 조국은 곧 자본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조국을 지갑 속에 넣고 다닐 수 없다." 자유주의는 이처럼 노동자의 존재 근거인 조국의 가치를 파괴함으로써 노동자를 국제주의에 물들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 >발루아에 의하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는 모두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출발했지만 어느 하나만으로는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먼저 민족주의는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국제주의에 철저히 반대함으로써 고립적이며 퇴행적인 경향을 낳았다. 특히 민족주의는 현대 경제의 국제적 측면을 무시함으로써 경제를 후퇴, 약화시킨다. 반면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국제주의에 입각하여 민족 문제를 간과했으며, 특히 노동자의 이해 관계를 옹호할 수 있는 '민족적 국가'의 수림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처럼 노동 문제의 견지에서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동시에 민족 문제에 입각하여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순환론적인 분석에 의존하여 발루아는 19세기의 거대한 두 운동이 각각 일면적 진실만을 강조함으로써 자유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진정한 대안이 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문제는 이 두 운동을 결합시키는 것이며, 발루아는 둘의 결합이 곧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 >발루아의 표현을 빌리면 "파시즘은 민족적이며 사회적인 하나의 운동을 형성하고 민족적이며 사회적인 삶의 견지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합한다". 파시즘의 독창성 역시 바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하려 한 데 있다. "파시즘의 위대한 독창성은······19세기에 반개인주의를 처음으로 실행에 옮긴 두 거대한 경향, 즉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통합을 실현하는 데 있다." 발루아에게 파시즘은 한마디로 "사회적 민족주의"이자 "민족적 사회주의"였던 것이다. >... >발루아가 볼 때 민족혁명이 전체적 혁명인 것은 그것이 "19세기의 정치·경제·사회 철학의 완전한 부정"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발루아의 주장에 의하면 민족혁명은 공화정에서 군주제로 정치 체제를 바꾸는 정치혁명과는 다르다. 즉 민족혁명이 전체적인 것은 그것이 "단순한 개혁의 총합"이 아니라 "부르주아적·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의회주의적인 국가가 기반해 있던 가치관"의 완전한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체적 혁명으로서의 민족혁명은 모든 사적 이해를 민족적 이해에 종속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정신적이며 도덕적이고 지적인 가치관에 복속시킨다." 이 점에서 민족혁명의 가치관은 물질적 자산을 최고의 자산으로 간주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가치관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발루아가 보기에 민족혁명은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자산", 즉 정신적 자산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 >발루아에게 이러한 보이지 않는 자산은 승리의 정신이며 영웅의 정신이었다. 이 점에서 역시 민족혁명은 "무능함"에 기반해 있는 부르주아 가치관의 거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승리의 정신, 영웅의 정신은 전사의 정신이다. 1차 세계대전 동안 참호 속에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투쟁한 참전 용사들은 개인적 이해 관계를 초월했으며, 또한 계급적 이해를 넘어서 민족적 이해로 뭉쳐 있었다. 이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조국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희생 정신을 발휘함으로써 새로운 도덕을 제시했다. 발루아는 이러한 정신 상태를 "전사의 철학"이라 불렀으며 이를 부르주아의 철학이라 할 "금융가의 철학"과 날카롭게 대비시켰다. >... >발루아에게 파시즘은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에게 '생산자'로서의 원래의 역할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새로운 체제였다. 파시즘이 이러한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것은 자유주의적이지도 않고 공산주의적이지도 않은 새로운 경제 체제를 조직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경제 조직은, 발루아의 표현을 빌리면, "생디카적이고 조합적인 제도"로서 이 제도를 통해 모든 '생산자들', 즉 노동자와 자본가는 모두 보호받을 수 있다. 또한 "생산의 질과 양을 향상시킬 수 있는 노동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두 계급이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생산물의 양이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민족적 번영을 확보하는 길로 간주된다. >발루아에 의하면 이처럼 자유주의의 진정한 대안으로서의 파시즘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변형된 형태도 아니며 공산주의도 아니다. 파시즘은 노동자들의 지배 체제도 부르주아의 지배 체제도 아닌, 이들 모두를 포괄하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사회·정치 조직의 수립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 >요컨대 좌파도 우파도 아니며, 민족 문제와 사회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를 포괄하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시에 극복한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질서로서 파시즘은 적어도 발루아에게는, 타락하고 있는 프랑스 민족을 구원하고 새로운 문명 창조의 길을 열어줄 제3의 대안이었던 것이다. >... >소렐의 사상이 사회주의로 정의될 수 있을지는 차치하더라도 그의 영향은 부분적이었으며 선별적이었다. 따라서 발루아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수용할 경우 특히 사회주의와 관련하여 혼란을 초래하고 페소 이데올로기의 본질이 왜곡될 위험이 있다. 스테른헬이 발루아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여 파시즘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의 산물로 제시하고 또 그 기원을 사회주의에 두자 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논란이 일어난 것과 프랑스의 극우 세력이 스테른헬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던 것은 그와 같은 파시즘 정의가 초래한 혼란의 구체적 예가 될 것이다. >... >페소가 코티를 비롯한 대자본가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았단즌 사실, 그러면서도 페소가 공산주의자나 생디칼리스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캔페인을 벌인 사실은 그와 같은 발루아의 주장을 입증해주는 구체적인 예다. 비록 이러한 캠페인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에도 발루아는 일부 생디칼리스트나 공산주의자들, 예컨대 페리괴 시장을 지낸 공산주의자 들라그랑주Marcel Delagrange, 또 다른 공산주의자 로리당Henri Lauridan, 바르디Jean Bardy, 롤랭Jean Gombault Raulin 그리고 소렐의 '신학파'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라가르델Huber Lagardelle등을 페소에 가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점에서 발루아의 파시즘을 프랑스의 보수적 우파와 근본적인 면에서 동일한 현상으로 파악한 수시의 견해는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 >아울러 발루아가 파시즘을 좌파와 우파를 초월한 운동으로 규정하고 양측 모두로부터 지지를 확보하려 한 시도가 페소의 약점인 동시에 강점으로 작용했다는 점 또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코티가 페소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철회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 가운데 하나가 페소의 공산주의자와 노동 세력에 대한 캠페인이었다. 그러나 제3공화정이 확고한 기반을 구축한 시점에서 짧은 시간 내에 2만 5천 명의 지지자를 확보했다는 사실, 그리고 비록 그 비율에서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페소 가담자들의 사회 성분이 다양했다는 사실은 제3의 대안으로서의 파시즘이 갖는 호소력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예컨대 대자본가들이 발루아의 파시즘에서 노동 계급의 저항과 이러한 저항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공화정을 대신할 새로운 체제를 발견했다면, 일부 노동자들은 발루아의 파시즘을 풍요로운 삶과 자본가의 착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특히 페소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한 중간 계급의 경우, 자유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계급 간의 조화와 민족적 통합을 통한 경제 발전의 전망을 제시한 페소 이데올로기에서 가장 큰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 >물론 발루아의 파시즘은 현실에 적용되기도 전에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집권에 성공한 이탈리아와 독일의 경우를 통해 우리는 혁명적 변화를 기치로 내건 파시즘이 권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지배 세력과 타협하고 극렬한 인종주의에 호소했으며 점차 혁명성을 상실하고 보수화되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김용우, 민족혁명과 민족사회주의 : 조르쥬 발루아의 '페소'와 그 이데올로기, 한국서양사학회, 1994, 서양사론 44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