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리투아니아 (문단 편집) === [[동군연합]]과 [[야기에우워 왕조]]의 성립 === 연방이 성립하게 된 시초는 1386년 [[튜튼기사단]]을 막기 위해 폴란드의 여왕 [[야드비가]]와 리투아니아의 대공 [[브와디스와프 2세|요가일라]]가 결혼해 [[야기에우워 왕조]]가 성립되었을 때다. 당시 폴란드 왕국은 피아스트 왕조의 마지막 남계인 [[카지미에시 3세]]의 외조카였던 [[헝가리 왕국]]의 [[러요시 1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슬하에 딸 둘만 있는데다가 [[명군|대왕]]이라 칭송받을 정도로 정력적으로 임했던 헝가리 통치와 달리 폴란드 통치에는 별 관심 없이 딸에게 폴란드를 상속하는 문제에만 골몰했다. 결국 러요시 1세는 귀족들에게 막대한 권한을 허락하는 대신 생전에 장녀 [[마리어(헝가리)|마리어]]에게는 헝가리를, 차녀 야드비가에게는 폴란드를 물려준다는 허락을 받아냈고, 1381년에 러요시 1세가 사망하자 양국은 러요시 1세 생전에 체결된 협약에 따라 서로 갈라졌다. 그러나 9살의 야드비가는 폴란드를 통치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러요시 1세의 왕비 보스니아의 엘리자베타는 역시 나이가 어렸던 야드비가의 언니 마리어의 섭정을 위해 헝가리에 남으면서 섭정을 맡아줄 사람도 없었다. 외부에서는 [[튜튼 기사단]]의 폴란드 진출도 문제였던터라 폴란드 귀족들은 야드비가의 배우자를 찾을 겸 약소국으로 전락한 폴란드와 영구 동맹을 맺을 대상을 찾아야 했다. 당시 귀족들은 야드비가의 약혼자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 빌헬름[*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의 증손자.]을 싫어했고, 결국 폴란드를 침공했던 [[발트 신화|다신교]] 국가였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요가일라와 결혼하기로 했다. 그리고 요가일라 또한 폴란드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튜튼 기사단의 팽창을 경계하는 상태였다. 이에 크레바 성에서 이른바 크레보 조약을 맺게 된다. 이때 폴란드 귀족들은 당시 요가일라가 빼앗은 영토를 돌려줄 것, 요가일라를 포함한 전 리투아니아인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리투아니아의 영토를 폴란드에 합병한다'라는 무리한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요가일라는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고 대신 야드비가와의 공동통치를 보장받게 된다. 1386년 2월 2일 요가일라는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고, 15일에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때 요가일라의 나이 35세였고 야드비가의 나이는 고작 13살 이였다. 귀족들에겐 정략결혼이 기본이던 당시 기준에는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이후 야드비가가 일찍 승하하자 요가일라의 통치는 잠시 위험에 직면하지만[* 아내의 사망으로 폴란드를 잃기도 전에 사촌인 [[비타우타스]]와 리투아니아의 대권을 두고 치열하게 대립하다가 결국 요가일라 측에서 한발짝 양보, 비타우타스를 자신의 부섭정에 임명하였다. 사실상 그를 리투아니아의 실질적 지배자로 인정한 것이라 리투아니아 내의 권력기반이 상당부분 실추된 상태였다.] 1401년 빌뉴스 조약을 체결해 외교적으로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영구적 통합을 결의하였고, [[그룬발트 전투|1410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국력이 그렇게 강대한 편은 아니었다. 그룬발트 전투에 참전한 폴란드-리투아니아 군은 4만 명 내외, 많이 쳐줘봐야 5만여 명 정도였다. 한편 독일 기사단의 병력은 2만 7천여 명이었다.]에게 승리해 기사단장 울리히 폰 융잉엔을 포함한 튜튼 기사단의 고위 간부들을 상당수 전사시켰다. 그 후 여세를 몰아 기사단의 본부인 [[마리엔부르크]](Marienburg)를 공략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퇴각했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비록 [[바르나 전투]]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가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기도 했지만, 요가일라의 둘째 아들 [[카지미에시 4세]]는 1466년 숙적 [[튜튼 기사단]]을 13년 전쟁에서 대파하여 [[독일 기사단국]]을 봉신국으로 만들었으며 장남 [[울라슬로 2세|브와디스와프]]를 [[헝가리 왕국|헝가리]]-[[크로아트 왕국|크로아티아 왕국]]과 [[보헤미아 왕국]]의 왕으로 만들어 야기에우워 왕조의 영지를 더욱 확장해 나갔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별도의 왕국이며, 브와디스와프는 보헤미아의 왕위가 빈 1471년부터 왕위를 주장했으나 경쟁자인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가 후계 없이 사망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또 야기에우워 왕조의 헝가리-보헤미아 왕국은 [[러요시 2세]]가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 전사하면서 2대만에 단절되고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가게 된다. [[보헤미아 왕국]] 참조.] [[지그문트 1세]] 대에는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프로이센)|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의 세속화 조치로 [[프로이센 공국]]이 설립되어 공국의 종주국 역할을 맡게 되었다. '''주의할 것은 1569년 [[루블린 연합]]으로 연방이 성립되기 전에는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엄연히 별개의 국가로 단지 [[동군연합]]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야기에우워 왕조의 몰락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