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문화 (문단 편집) === [[가톨릭]] === 전통적으로는 [[가톨릭]] 신자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역사적으로 가톨릭의 전통이 깊어, 지금도 약 48% 인구가 가톨릭 신자이다. 프랑스가 가톨릭 국가가 된 기원은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비스 1세]]가 496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성직자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지지를 받아 [[프랑크 왕국]]을 탄생시킨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게르만족에는 [[아리우스파]] 이단이 퍼져 있었기에 프랑크는 게르만의 가톨릭화에서 선봉장을 맡게 되었다. 프랑스의 역대 왕조에게 [[가톨릭]]은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종교뿐 아니라 국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이뤄왔다. 특히 교육과 행정은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성왕 [[루이 9세]], 성녀 [[잔 다르크]]로도 유명하다. [[부르봉 왕조]] 시절까지 프랑스 왕국은 가톨릭 신앙을 전제했고, [[프랑크 왕국]]이 가톨릭에 기반해 국가가 건설된만큼 그 후계를 자처하는 프랑스 왕국은 언제나 [[샤를마뉴]]의 왕국일 것을 요구받았다. 다만 프랑스의 통치자들은 대체로 자국 가톨릭교회를 [[교황]]에게 충성하는 조직이 아니라 프랑스에게 충성하는 조직으로 만들고 싶어했고, 이런 현상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국민 의회 위원들에게까지 이어졌기에, 교회가 세속 국가의 이해 관계에 많은 영향을 받곤 했다. [[서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가톨릭 교회가 교황보다는 자신에게 복종하길 원했지만, 일찍부터 강력한 국가를 갖춘 프랑스는 이러한 점이 더욱 두드러졌다. [[아비뇽 유수]]로 가톨릭 세계를 장악하기도 했고, [[30년 전쟁]] 때는 [[합스부르크]]를 억제하기 위해서 [[개신교]] 편에서 싸우기도 했다.[* 다만 [[30년 전쟁]]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 전쟁이면서도, [[합스부르크]]와 반대편의 전쟁이기도 하기 때문에 프랑스 가톨릭은 개신교가 아니었다. 교황 [[우르바노 8세]]도 프랑스의 참전 때 중립을 지켰을 정도다.] [[부르봉 왕조]]를 열었던 [[앙리 4세]]도 지배를 위해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이라 교회와의 관계가 애매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도 [[앙시앵 레짐]]의 주요 세력인 성직자들이 [[교황]] 말고 정부에게 충성하라는 강요를 받으며 밀려난 적이 있다. 이 과정에서도 혼란이 많았는데, 혁명 직전에는 오히려 가톨릭 [[신부(종교)|신부]]들이 향촌의 지식인으로서 농민들에게 저항 의식을 퍼트리고 있었다. 종교의 특성상 계몽주의적 이신론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봉건제 해체의 동맹군에 해당하던 게 가톨릭 신부들이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직후 성립된 국민의회는 성직자 민사 기본법을 밀어붙이며 선서 거부 [[사제]]들을 박해하고, 최고 존재(Etre suprême) 숭배를 밀어붙이며 가톨릭 [[성직자]]들을 적으로 돌려버렸다. 여기에 지방의 특임 인민 대표들을 중앙이 통제하는데 실패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이 들어서고 프랑스에 공화정이 확립된 이후로는 [[왕당파]], 반공화파의 주요 세력인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는데, 오늘날 프랑스의 라이시테도 이때 확립된 것이다. 프랑스는 계몽주의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곳이기에, 프랑스 가톨릭교회는 계몽주의와 싸우는 최전선을 맡게 되어서[* 당연하지만 계몽주의가 지향하는 모든 것을 가톨릭교회에서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신론, 반기독교 등을 거부하는 것이다.] 신학이 상당히 발달했다. [[이탈리아]] 출신이긴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가 [[파리 대학교]]의 교수였고, 17세기에는 '프랑스 학파'라는 영성 교리 학파가 발달했다. 프랑스 오라토리오회의 창시자 [[추기경]] 베륄(Pierre de Berulle), 콩드랑(Charles de Condren), 올리에(Jean Jacques Olier) 등이 이 학파의 대가며 이 밖에 성 에우데스(St. John Eudes), 몽포르(De Montfort) 등이 이 학파의 신학을 가톨릭 영성생활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에도 신스콜라 학파의 자크 마리탱( Maritain Jacques),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앙즈(Antoin-Gilbert Sertillanges) 등을 배출했으며, 20세기의 가장 저명한 신학자 중 하나인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 [[추기경]]도 프랑스 출신이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가톨릭교회와 인연이 깊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파리 외방전교회의 한국 선교가 한국 가톨릭을 형성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교황청]] 포교성성(인류복음화성) 선교 지침에 따라 아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교구]] 사제들로 결성된 프랑스 최초의 외방전교회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주석성경>에서 입문과 각주는 프랑스의 공동 번역 성경(La Traduction Oecuménique de la Bible = TOB)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한국 가톨릭]]교회와 [[파리 외방전교회]]의 인연은, [[미사]]와 [[7성사|성사]]를 집전할 [[사제]]가 필요했던 조선의 신자들이 1811년과 1827년 2차례에 걸쳐 [[교황청]]에 편지를 보낸 것으로 시작된다. 프랑스 남서부의 가톨릭 성지 [[루르드의 성모|루르드의 무염시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라는 뜻] 성당에는 [[선교사]]들이 [[서해]]의 거친 풍랑을 헤치고 무사히 조선 땅에 도착한 것을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하는 감사비가 새겨져 있다. 이 감사비는 1876년 무염시태 성당 축성식 때 성당 벽돌판에 새긴 것으로, [[성모 마리아]]는 [[한국 가톨릭]]의 [[주보성인]]([[수호성인]])이기도 하다. [[파일:external/info.catholic.or.kr/%ED%95%9C%EA%B5%AD%EC%9D%98%ED%8C%8C%EB%A6%AC%EC%99%B8%EB%B0%A9%EC%A0%84%EA%B5%90%ED%9A%8C%EC%88%9C%EA%B5%90%EC%9E%90.jpg|width=400]] 왼쪽 위부터 [[피에르 모방|성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성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 성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푸르티에 신 요한 신부, 프티니콜라 박 미카엘 신부, 성 오매트르 오 베드로 신부, 성 도리 김 헨리코 신부, 성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4대 교구장], 성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5대 교구장], 성 위앵 민 루카 신부, 성 볼리외 서 루도비코 신부, 성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 신부다. [[파일:etrange.jpg]] ||<선교사들의 출발(Le depart des Missionnaires)>. 왼쪽부터 위앵 신부, 도리 신부, 볼리외 신부, 브르트니에르 신부. 그림 속 뒤돌아보는 아이는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으로, 이 그림을 그린 샤를 쿠베르탱의 아들이다.||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새남터 순교성지|새남터]]에서 [[순교]]했고, 나머지 주교들과 신부들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울 새남터와 [[충청남도]] [[보령시]] [[http://galmaemot.or.kr/|갈매못]]에서 [[순교]]했다. 그 외에 [[경기도]] [[용인시]] 손골성지, [[의왕시]] [[하우현성당]] 등에서도 이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분리하여 조선대목구([[천주교 서울대교구]])를 설정한 이래,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 천주교회의 사목을 맡았다.[* 이전까지는 북경교구의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 천주교회의 사목을 맡았다. 주 신부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고, 유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을 맡게 됨에 따라 [[중국]]으로 돌아갔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지금까지 한국에 173명의 [[선교사]]를 파견했고, 그 중 14명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170여 명의 [[순교자]]를 배출했는데 이들 중 12명이 한국에서 [[순교]]했고, 그 가운데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10명의 순교자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 시성되었다. ([[한국 103위 순교성인]]) [[파리 외방전교회]]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초대 조선대목구장부터 1942년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가 제10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기까지 약 110년간 9대에 걸쳐 조선대목구장직을 승계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 제2대 교구장 무세 주교, 제9대 조선대목구장이자 [[천주교 대전교구]] 초대 교구장 [[아드리앙 조셉 라리보]] 주교,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 [[두봉]] 주교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이다.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된 [[프랑스인]] 신부들은 한국에서 [[수녀회]]도 창설했다. 루이 델랑드 신부(한국명 남대영)가 [[http://www.handmaids.or.kr|예수성심시녀회]]를, 피에르 생제르 신부(한국명 성재덕)는 [[http://www.holyfamily.or.kr|성가소비녀회]]를 창설했고, 두 수녀회는 현재 [[한국 가톨릭]]에서 여러 활동들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한국인 [[가톨릭]] 사제 양성에도 힘썼다. 성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피에르 모방|성 모방 나 베드로 신부]] 등은 3명의 조선 소년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이 세 소년이 바로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2번째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 최방제[* [[마카오]] 유학 도중 병으로 사망했다. 친형인 최형 베드로는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 프란치스코다. 또한 [[한국 가톨릭]] 최초의 [[수도회]]도, [[프랑스]]에서 진출해온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이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조선 땅에서도 가톨릭을 자유롭게 믿을 수 있게 되고, 2년 후인 1888년에 프랑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 4명(프랑스인 수녀 2명, 중국인 수련수녀 2명)이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많은 일을 해오고 있고, 오늘날도 한국에서 제일 큰 수녀회로 성장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프랑스의 많은 [[교구]]와 [[수도회]]에서 성소자[* [[사제]]나 [[수도자]]를 지망하는 사람. 성소란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뜻이다. 넓은 의미에서 성소는 사제, 수도자, 결혼 생활, 독신 생활, 삶의 양식과 직업 모두를 가리킨다.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성소란, 사제나 수도자로서의 부르심을 의미한다.]가 급격히 감소했다. 프랑스의 [[수도자]] 수는 40% 이상 줄었다. 같은 기간 프랑스의 [[사제]]와 신학생도 30%가 줄었다. 짧은 기간에 엄청난 수가 감소한 것이다. 그래서 일부 [[수도회]]는 다른 대륙,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로 방향을 돌려 [[필리핀]], [[대한민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 [[콩고]] 등지에서 성소자를 대거 양성했다. 현재 45세 미만의 [[수도자]] 가운데 절반이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나왔다. 2012년을 기준으로 양성 중인 여성 수도자(수녀) 490명 중 310명이, 남성 수도자(수사) 392명 중 140명이 외국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신학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전통 가톨릭]] 운동의 발원지 중 한 곳이 프랑스다. [[전통 가톨릭]] 운동은 프랑스, 스위스,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프랑스, 스위스의 전통 가톨릭 운동은 성 비오 10세회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전통 가톨릭]] 신자 수가 [[성공회]] 신자 수보다 많다고 한다.[* [[성공회]]는 [[영국]]과 [[아일랜드]]를 제외하고 [[서유럽]]에서 교세가 거의 없다시피 한 편이다.] 현재는 합법적인 [[전통 가톨릭]] 단체부터 시작해서 비합법이지만 가톨릭의 일부로는 인정받고 있는 [[성 비오 10세회]]와 교황 공석주의자 단체까지 여러 전통 가톨릭 단체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전통 가톨릭 단체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다른 [[교구]]와 [[수도회]]와는 달리 성소자가 감소하지 않고 꾸준히 증가하거나 적어도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미사]] 참례율도 [[교구]]에 비해 월등히 높다. 프랑스는 전통 가톨릭 운동의 발원지이자 가장 활발한 국가답게, [[미국]]과 함께 전통 가톨릭 단체에서 운영하는 [[성당]]과 [[공소(가톨릭)|공소]]가 가장 많은 국가다. [[전통 가톨릭]] 운동을 직접 볼 수도 있다. 샤르트르 도보 순례나 [[노트르담 대성당]] 순례 등 가톨릭의 주요 야외 신심 행사는 크게 둘로 나뉘어서 진행된다. 하나는 [[교구]] 주관으로 열리고 다른 하나는 [[성 비오 10세회]] 등 전통 가톨릭 단체들의 주관으로 열린다. 양쪽 다 가톨릭의 이름으로 진행되며 참여 인원이 수천명 이상이다. 가톨릭 [[사립학교]]들도 양분되어 있다. 일부 가톨릭 사립학교는 [[교구]]나 [[수도회]]에서 운영하며, 다른 일부 가톨릭 사립학교는 [[전통 가톨릭]] 단체나 그 지도를 받는 [[수도회]]에서 운영한다. 학교 규율은 [[전통 가톨릭]] 쪽 가톨릭 사립학교가 더 엄격하다. 성 비오 10세회는 파리에 사립 대학교를 하나 세워 운영하고 있다. [[전통 가톨릭]] 단체에서 운영하는 [[성당]] 중 유명한 성당으로 파리의 생 니콜라 뒤 샤르도네 성당(Église Saint-Nicolas du Chardonnet)이 있다. 18세기 중반에 세워진 이 성당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프랑스 정부의 정교분리 정책 강화로 소유권은 프랑스 정부에 넘어갔지만 운영은 [[교구]]에서 하고 있었다. 하지만 1977년 성 비오 10세회를 지지하는 원로 사제[* [[몬시뇰]], François Ducaud-Bourget]와 신자들이 성당을 점거[* 그 당시 교구에서 임명한 주임신부는 진보적이고 사회 참여적인 Pierre Bellego 신부였다. 점거와 함께 쫓겨났다.]한 후 지금까지 [[성 비오 10세회]]에서 운영하고 있다. 점거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성당을 방문하여 성당을 점거한 원로 사제와 신자들을 격려하였고, 본인도 이 곳에서 여러 번 [[미사]]를 봉헌했다. 성 비오 10세회에서는 이 성당을 보수하고 주임신부를 임명하는 등 관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그렇다! 프랑스 가톨릭 성직자들이 1950년대부터 소수자와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저지른 성폭력 피해자 수가 1만 명에 달할 수 있다고 독립조사위원회가 밝혔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3&oid=421&aid=000519929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