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메이슨 (문단 편집) === 멕시코에서의 프리메이슨 === 프랑스 혁명 이후, 프리메이슨은 가톨릭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군주에게도 특별하게 경계할 대상이 되었다. 프리메이슨은 식민지에서 독립을 부추길 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어 교회뿐 아니라 스페인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었다. 특히 [[누에바에스파냐]](Nueva España)를 포함하여 식민지에 거주하던 프랑스인들이 우선적으로 감시 대상이었다. 이들이 프랑스 혁명 사상을 식미지에 전파시킬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과 스페인 왕의 퇴위 사건 이후 당시 나폴레옹은 프리메이슨은 자신의 권력과 혁명 사상을 확산하는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도 프리메이슨을 군주제와 종교 재판에 맞서는 존재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나폴레옹의 계획은 먹히지 않았다. 프랑스의 침공에 저항하는 스페인 국민들의 투쟁이 예상과 달리 굳세었고 나폴레옹과 프리메이슨에 대한 반감도 오히려 커졌다. 이런 분위기가 대서양을 건너 누에바에스파냐에도 전해졌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1 쪽] 멕시코 최초의 랏지는 1806년 멕시코시티에서 조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스라타스(Las Ratas, 즉 볼리바르)가 5번지의 주택에서 멕시코 최초의 랏지가 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논란이 되는 것은 멕시코 독립의 선구자인 [[미겔 이달고]]의 가입 여부이다. 여러 정황에 따르면 이달고 신부가 독립운동의 기반으로 프리메이슨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분명하다고 한다. 이것은 멕시코만의 현상이 아니라 남미 독립 과정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당시 프리메이슨 랏지는 독립운동의 수단 또는 거점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2쪽] 그리고 역사적 전례에 따르면 "프리메이슨과 비밀 결사는 혁명이나 독립과 같은 정치적 투쟁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근대 프리메이슨인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프리메이슨은 기본적으로 '비정치적(정치나 종교에 대해 어떤 특정한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이다. 하지만 프리메이슨의 개념은 확장됐고 성향도 다양해지며 현실 사회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성향이 커지게 되었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프리메이슨과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비밀 결사 간의 구분이 모호해지기도 했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3쪽] 멕시코의 초기 프리메이슨은 '정치적'이었다. 1800년대 초 멕시코에 온 스페인 출신 군인과 정치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프리메이슨은 스코틀랜드 의례파가 다수였고, 이들은 입헌 군주제와 교회 개혁을 지지하는 온건한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 프리메이슨을 결성했다가 식민지가 본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경우를 대비하여 프리메이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3쪽] 이달고 신부가 프리메이슨에 관심이 있었다는 건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산타 안나]]는 확실히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 그리고 훗날에 멕시코 독립 이후 초대 대통령이었던 [[과달루페 빅토리아]]와 뒤를 이은 [[비센테 게레로]] 대통령 모두 프리메이슨 랏지를 설립하였다. 따라서 독립에 관여한 중요한 인물들이 프리메이슨과 연관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92쪽] 다만 모든 프리메이슨들이 멕시코의 독립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어떤 면에서 프리메이슨은 독립의 지지자였다. 그러나 프리메이슨 중에는 어쩔 수 없이 독립을 지지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식민지가 독립하는 현상이 실제가 되자 자신들의 이해를 보전하려 하였고 그것을 위한 방법으로 독립을 받아들였다. 독립을 자발적을 지지했기보다는 전략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프리메이슨과 마지못해 받아들인 프리메이슨으로 나뉘었고 훗날 프리메이슨이 두 세력으로 갈라지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92~93쪽] 프리메이슨은 분명 멕시코 독립운동과 관련은 있었다. 다만 독립군에 우호적인 활동을 전개한 조직들은 대개, 프리메이슨의 형식을 가졌으나 영국이나 미국의 프리메이슨과는 연관이 없고 대신 정치적 애국주의 단체란 성격이 더 강한 준프리메이슨 단체이거나 프리메이슨 의식도 없고 프리메이슨과 같은 조직 내 위계 구조도 없는 정치적 비밀 결사 조직들이었다. 다시 말해 멕시코 독립 과정에서 활약하였던 조직은 프리메이슨과 프리메이슨에 준하는 단체, 프리메이슨과 유사한 독립운동 단체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프리메이슨'이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4~86쪽, 93쪽] 독립 혁명 참여에 대한 멕시코 프리메이슨의 참여는 과장된 점이 있는데 이것은 반혁명 세력의 전력과도 관계가 있다. 멕시코에서 프리메이슨은 "왕실(본국 왕실)과 제단(가톨릭)에 대항하는 이단"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였고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니 본국과 식민지 당국은 식민지 체제를 유지하고 독립운동의 확산을 저지하며 독립 세력을 공격하는 빌미로 삼기 위해 프리메이슨의 독립 혁명 참여를 실제보다 과장한 점이 있다고 한다. 실제 멕시코 독립에서 역동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프리메이슨 단독이 아닌 프리메이슨과 준프리메이슨까지를 포함한 독립운동 결사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프리메이슨이 멕시코의 독립을 주도하였다"는 설명은 당시 '넓은 의미의 프리메이슨'의 다양하고 중첩적인 성격을 놓치게 만들 수 있는 설명이다. [*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6쪽, 93쪽] 이후 시간이 지나며 식민지에선 실제로 독립이 되려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상황이 전개됐고 군인들과 정치인들은 독립에 대비하기 위해 랏지(프리메이슨 지부)를 조직하였다. 명백하게 멕시코이 독립을 지지하는 랏지(프리메이슨 지부)도 증가하였다. 1823년 과달루페 빅토리아는 할라파에서 쿠바 출신 시몬데 차베스와 함께 '검은 독수리 군단'을 조직했다. 이 조직은 독립 운동을 지지하고 스페인인들을 추방하는 데 동의해야만 가입할 수 있었다. 1825년 비센테 게레로도 '멕시코의 장미' 랏지를 세웠다. 독립 직후에 멕시코 정치는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이때 멕시코 프리메이슨은 국가 정치를 새롭게 세워나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주체가 되었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7쪽] 독립을 하며 주도권을 잡은 건 [[아구스틴 1세|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였다. 이투르비데는 1821년 2월에 이괄라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군주제로의 독립, 가톨릭의 인정, 모든 사회 계급의 통합에 대한 내용이었고 그 계획 발표에 따라 멕시코 독립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1822년 5월이 되자 이투르비데는 스스로를 아구스틴 1세로 선언하고 즉위하였다. 그 후 그는 자신을 반대하는 제헌 의회를 해산하였다. 산타 안나는 이투르비데 왕정에 반대하였고 12월 2일에 베라크루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투르비데는 반란 진압을 위해 안토니오 에차바리 장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안토니오 에차바리 장군은 산타 안나와 동맹을 체결하였고 1823년 2월 1일에 카사 마타 계획을 발표하였다: 카사 마타 계획은 새로운 의회의 구성과 지방 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당시에 이투르비데는 중앙 집권주의로 기울었고 지방에 강제로 재정을 강요하였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방 세력들도 산타 안나를 지지하였다. 1823년 3월이 되자 아구스틴 1세는 왕좌에서 물러나고 해외로 망명하였다. 의회는 다시 소집되고 11월에 공화정을 선포하고 새 헌법을 제정하였다. 제정된 1824년 헌법에 따르면 [[가톨릭]]은 국교였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7~88쪽] 이투르비데가 축출되기 전부터 의회에는 다수의 프리메이슨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투르비데와 군주제를 반대하였다. 그리고 카사 마타 계획에서 주동 세력이 되었다. 미겔 라모스 아리스페(Miguel Ramos Arizpe)와 세르반도 테레사 데미에르(Servando Teresa de Mier) 등이 그런 프리메이슨들 중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멕시코 독립의 영웅들이기도 하였고 자유주의를 선호하였고 북부 출신이었다. 로렌소 데 사발라(Lorenzo de Zavala)도 자유주의자였으며 1825년 요크 의례파 프리메이슨의 창설 멤버였다. 반면 루카스 알라만(Lucas Alamán)은 기업가이자 정치가였으며 보수파의 리더였다. 이투르비데 축출의 일면은 프리메이스 투쟁의 승리라는 성격이 있었다. 이투르비데는 패배했고 군주제를 상대로 공화주의가 승리하였다. 그 후 멕시코 정치는 중앙주의와 연방주의가 대립하며 혼란이 계속됐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8쪽] 이트루비데의 군주제가 무너지자 초대 대통령으로 과달루페 빅토리아가 당선되었고 [[니콜라스 브라보]]가 부통령이 되었다. 과달루페 대통령이 재임한 4년(1824-1828)은 두 프리메이슨 분파 간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였다:그것은 스코틀랜드 의례파(스코틀랜드파)와 요크 의례파(요크파) 라는 두 프리메이슨 분파 간의 대립이었다. 당시 정치인의 다수는 프리메이슨에 속해있었으므로 당시 프리메이슨은 정치 클럽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당시엔 아직 정당이란 것이 없었고 대신 프리메이슨이 정당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8쪽] 스코틀랜드파 프리메이슨은 스페인에서 백인 상류층 사이에 퍼졌던 분파였다. 다수의 크리오요(식민지 태생 백인)는 이투르비데 세력과 부르봉 왕가를 지지하였는데 이들은 스코틀랜드파를 중심으로 중앙 집권주의적 정치 세력으로 형성하였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8~89] 요크파 프리메이슨은 미국 대사 포인셋(Joel Roberts Poinsett)의 지지를 받으며 메스티조와 중산층을 규합하여 연방주의적 정당의 기초를 만들고자 했다. 빅토리아 대통령은 연방제와 반스페인주의를 주장하는 요크파 프리메이슨을 지지했다. 미겔 라모스 아리스페, 로렌소 데 사발라와 그 외에도 호세 마리아 알푸체, 비센테 게레로 등의 자유파 인사들이 그런 요크파 프리메이슨의 활동에 참여하였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9쪽] 멕시코에서 요크파 프리메이슨이 성립하는 데는 미국 대사 포인셋의 활동도 중요했다. 이것은 미국 외교 전략에 의해 생겨난 현상이기도 했다. 포인셋이 대사로 부임해 왔을 때만 해도 멕시코의 외교는 유럽 계몽주의에 정통한 보수주의자 루카스 알라만이 주도하고 있었다. 루카스 알라만은 미국보다는 영국과 중남미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에 더 집중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멕시키 북부의 국경 지역으로 노리던 미국을 크게 경계하였다. 그리고 알라만은 미국의 요청을 뿌리치고 영국과 먼저 우호, 통상, 항행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자 포인셋은 알라민이 버티고 있는 행정부보다는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들이 많이 포진해 있는 의회를 상대로 관계를 강화하는 데 주력하기로 하였다. 포인셋은 대통령과 의회의 협력을 얻어내며 멕시코 보수파를 견제했으면서 멕시코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9쪽] 포인셋의 개입에 따라 요크파 랏지는 뉴욕 총랏지(그랜드 랏지, 총지부)에게 인정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조직되었다. 요크파 프리메이슨들은 급진주의자, 연방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스코틀랜드파를 상대했다. 보수적인 프리메이슨들은 '오래되고 인정된 스코틀랜드 의례파' 랏지로 결집하였다. 마누엘 코도르니우(Manuel Codorniu) 는 이 중 중요한 인물이었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9쪽] (마누엘 코도르니우는 1821년 당시 마지막 부왕 후안 오도노후가 부임했을 때 그의 주치의였고 '엘 솔'이란 랏지를 조직하고 같은 이름의 신문을 발간했는데 목적은 이괄라 계획을 지지하고 가톨릭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7쪽]) 이에 따라 요크파에는 미국식 자유주의를 선호하는 프리메이슨이 모였고 반대편에는 스페인 자유주의를 계승하는 보수적 정치인들이 스코틀랜드파 랏지로 결집하였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89쪽.] 두 세력 다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나중에 제3의 대안을 세웠다. 그들은 1825년에 민족주의적 랏지인 멕시코 의례파(RNM) 프리메이슨을 세웠다. RNM은 자유주의 원칙을 주장하였고 외세가 아닌 멕시코 고유의 정치 시스템을 추구하였다. 멕시코 의례파는 1826년에 요크파나 스코틀랜드파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아나우악의 자오선', '평등', '폭군의 공포', '인디오의 무심', '멕시코의 비'와 같은 랏지들이 결성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나중에 RNM은 요크파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90쪽.] 과달루페 정부에게 당시에 중요했던 과제 중 하나는 국가 개정으로 구하는 것이었다. 당시 국가 재정은 부도 직전이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특권과 재산을 사용하는 문제가 새롭게 나타났다. 요크파는 그것을 지지하였고 스코틀랜드파는 반대하였다. 그리고 스페인인들의 신변과 관련된 문제도 논란거리였다. 이런 시기에 호아킨 아레나스 신부 사건이 벌어졌다: 아레나스 신부는 멕시코의 혼란이 자유주의 때문이라 주장하며 1827년 1월에 스페인의 페르난도 7세의 왕정 복귀를 주장하며 이에 동조하는 사제들과 반란을 계획했다. 계획은 사전이 발각됐고 신부는 처형됐다. 당시 멕시코 사람들은 스페인의 재정복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 사건은 반스페인 정서에 불을 댕겼다. 가읕 해 5월에 스페인인은 공직과 사제직 취임을 금지하는 영이 내려졌고 12월에는 스페인인 추방령이 내려졌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91쪽.] 브라보 부통령을 중심으로 스코틀랜드파는 즉각 반발하였다. 이들은 1827년 12월 몬타뇨 계획(멕시코주의 오툼바에서 발표되었기 때문에 오툼바 계획이라고도 한다.)을 발표하고 반란을 일으키며 요구했다: 요크파 프리메이슨을 포함하여 비밀 결사를 금지하고, 요크파 정치인을 축출하기 위해 내각을 재구성하고, 요크파의 최대 후원자인 포인셋 대사를 추방하고, 카톨릭을 국교로 정한 1824년 연방 헌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베라크루스주와 산루이스포토시주 등 일부 지역이 몬타뇨 계획에 가담했고 양측의 충돌은 격화되었다. 결국 과달루페 빅토리아 대통령의 정부군이 승리하였다. 요크파 프리메이슨은 다시 세력을 인정받았고 스코틀랜드파의 위세는 축소되었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90쪽.] 다음 대통령 선거가 시작됐고 요크파와 RNM은 게레로를, 스코틀랜드파는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를 차기 대통령으로 지지하였다. 선거에서는 마누엘 고메스가 승리했다. 그러나 요크파와 게레로가 불복했다. 결국 마누엘 고메스는 사임하고 게레로가 대통령이 되었고 다시 요크파가 권력을 장악했다. 당시에 멕시코는 국가 재정이 계속 부족하였고, 농업, 광업, 제조업의 생산도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도로 등의 사회 기반도 엉망이었고 교회와의 마찰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재침공 가능성에 대한 대비는 거의 전무했다. 결국 스페인은 1829년 멕시코를 재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 탐피코를 점령하였다. 게레로 대통령은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부통령을 탐피코로 파견했다. 그러나 오히려 부스타만테는 반란을 일으켜 1830년에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부스타만테를 상대로 게레로가 다시 봉기하였다 부스타만테의 계략에 당해 1831년에 암살당하였다. 부스타만테에 반대하여 산타 안나 장군이 봉기하여 부스타만테를 몰아냈다. 이후 고메스 페르라사가 대통령 자리를 맡게 됐고 그는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를 실시하였다. 산타 안나 후보는 요크파의 지지를 받으며 RNM 총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정치 개혁 계획을 발표하였다: 여론과 언론의 자유 보장, 군대와 교회의 특권 폐지, 수도원의 철폐 등이 정치 개혁의 주요 내용이었다. 그리고 선거에서 승리하여 1833년에 멕시코의 대통령이 되었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91쪽.] 자유주의 세력과 보수주의 세력은 모두 멕시코의 평화와 발전을 기원했지만 종합적인 계획을 서로 달랐다. 자유주의 세력은 연방 공화국을 희망하였고 보수파는 군주제를 지지하려다가 여의치 않자 중앙 집권주의적 모델을 지지하였다. 자유주의는 요크파 프리메이슨으로 모이다가 나중에는 RNM 프리메이슨으로 모였고, 보수주의는 스코틀랜드파 프리메이슨으로 결집하고 정치 세력은 양분되고 19세기 멕시코 정치 체제의 가장 핵심적인 성격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91쪽] 멕시코 독립을 완전히 해냈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멕시코 정치조직들이 새로 생겨난다는 것은 뜻했다. 당시에 정당의 탄생은 필연적이고 당위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정당이 생기기 전이었고 대신 프리메이슨이 정당에 준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런 역할에 따른 활동이 훗날 멕시코 정당 정치에서 기초가 되었다.[* 임상래. "멕시코 프리메이슨에 대한 소고: 멕시코 독립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라틴아메리카연구 28.1 (2015), 93쪽.] 위에 인용된 임상래 교수의 2015년 논문은 [[스페인]]의 카디스 체제에 의한 [[페닌술라레스]]와 [[크리오요]] 문제에 대한 최신 연구를 반영하지 않았다. 임상래 교수는 2020년에 [[스페인]]의 카디스 체제에 의한 [[페닌술라레스]]와 [[크리오요]] 문제를 논문에 반영해 학회에 게재했다. 해당 논문도 참고하시오.[[http://eds.a.ebscohost.com/eds/pdfviewer/pdfviewer?vid=0&sid=5652ee41-8692-4783-ab6f-434e177524ac%40sdc-v-sessmgr02|임상래. "멕시코 독립의 고유성에 대한 소고: 스페인과의 관계에서 본 성격과 의미를 중심으로." Asian Journal of Latin American Studies 33.2 (202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