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리핀/역사 (문단 편집) === 식민 지배 초기 ~ 중반기(1565 ~ 1787) === || [[파일:Screenshot_20211119-092844_Chrome.jpg|width=450]] || || 누에바에스파냐(New Spain/Nueva España) 최대강역. [[대만]],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일부지역 까지도 정복에 성공한다. 이때 대부분의 군대는 필리핀군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개신교]] 세력 등에 의해 영토를 상실한다. 필리핀 토착 이슬람계 상업왕국들이 건재했던 남부 [[민다나오]] 지역은 식민통치 말기에 가서야 회유에 성공하고 제국 영토로 편입한다. 마찬가지로 [[술루 제도]] 또한 식민 말기에 일시 함락에 그쳤으나 정복한것으로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 || 이후 필리핀 도독령은 행정구역상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에 편입된다. 형식상 왕이 파견한 부왕이 통치하는 누에바 에스파냐의 간접지배를 받는 형태인 것은 스페인 본국과 필리핀의 거리가 지구 반대편에 위치했기에 지리적인 사정상 신대륙 루트로 서신을 경유해서 보내는것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인]]들이 도독령을 구성했으나 기존의 토착왕가와 귀족계층, 부족장, 거류지 유력상인들을 바탕으로 그들의 지배권을 인정하면서 세금면제와 지역별로 자치권을 부여했다. 세금면제와 고도의 자치권을 주는 것은 [[중남미]] 원주민들과는 다른 대우를 의미했다. 이는 신흥세력을 제국으로 편입시켜 영토를 늘리되 기존 지배층들의 불만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써 스페인의 먼 조상인 [[고대 로마]]인들이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이를 '엔코미엔다 제도'라고 한다. 특히 식민통치 초반에 마닐라, 세부 등 중앙의 도독부는 각 지역의 내정에 간섭을 거의 하지 못했고 오로지 동서양 무역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필리핀 도독령]]은 각 지역 상업왕국들의 주요 인재풀들이 스페인인들과 함께 구성되어 그것을 도왔다. 오늘날 필리핀이 같은 [[식민지]]였던 [[중남미]]와 달리 각 지역별로 많은 [[언어]]가 남아있는 원인도 이러한 긴 자치권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식민지배 또한 스페인 본국에서 인력들을 대규모로 파견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지역은 토착 지배층들을 중심으로 행정이 돌아갔다. 이러한 부분은 스페인 본국은 물론, 광대한 아메리카에 본적을 두고있는 멕시코령이라 하더라도 건드리지 못하였다. 애초에 필리핀 정복과정 자체가 아메리카 인디언들 보다도 훨씬 어려웠던데다 오랜시간을 소비했고 여러번에 걸쳐서 실패하였으며, 결국엔 토착세력과의 교섭 및 회유로 인한 정복이었던 만큼 확실히 스페인 제국에 편입되었지만 후반기를 제외한 식민지배 초기부터 중반 기간 동안은 스페인 본국이 필리핀의 이익을 해치는 형태의 내정간섭이 아닌, 간접적 지배를 받으면서도 토착 세력들이 실익을 확실히 거두는 형태의 독자적인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다.[* 흔히 식민지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착취 일변도의 식민지배는 후기~말기에 이르러 세계의 무기와 기술체계가 바뀌고 열강들의 경쟁이 심화되는 시기이지 본 문단에 해당하는 시기가 아니다. 애초에 후술될 태평양 갈레온 무역로 형성 또한 현지에 무역로를 형성하고 있었고 아시아 무역의 지리에 훤했던 토착 상업왕국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폭넓은 자치권의 흔적들은 스페인 사서는 물론 중국 기록에서도 동시에 확인되는데 스페인 기록은 필리핀 도독령이 설립되고 나서도 군소 토착 세력들 끼리의 영토 분쟁과 전투가 지속되고 있었고 이전에 중국에서 왕으로 지칭되던 필리핀 토착 왕족들은 스페인의 통치가 시작된 이후에는 명나라에서 왕자 등으로 한 단계 격하되어 불렸다. 이는 필리핀 토착 지배층들이 각지역내에서 귀족 지위와 사병 지휘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며, 중국 또한 필리핀 토착세력들이 스페인 제국의 신하가 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필리핀에서의 노예의 소유주는 대체로 토착 지배층들이였고 아메리카로 이주하는 경우에는 스페인 상선들이 필리핀 노예(또는 사병,선원)들을 필리핀 토착 지배층들로 부터 돈을 주고 구입해가는 형태가 대부분이였다. 특히 필리핀인들의 아메리카로의 직접 이민인 경우에는 인디언들과 서열이 결코 비슷하거나 같지 않고 높았으며, 또한 칼을 차고 다니는게 허용이 되었다. 이는 무장이 허용되지 않던 인구집단이 존재했음을 의미하고 무장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과의 계층화가 존재했던것을 의미한다. [[콩키스타도르]]들은 필리핀에서는 중남미와 달리 제각기 각 지역을 점령하여 왕이나 귀족을 칭하며 현지인들을 노예화 시키지 못하였고 현지의 자치권을 존중해야만 했다. 이것은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과 과 필리핀 토착 왕국들간의 '협약'인데다 토착 왕국들이 명나라 조차 '왕'으로 부를 정도로 강성하였고 더군다나 후술될 태평양 갈레온 무역은 토착세력들의 협력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필리핀에서의 고강도 세율의 착취는 콩키스타도르 시대가 아닌 식민통치 후기에서 말기 쯤 일어난다. 이때도 노예제와는 개념 자체가 달라서, 최소한 사유재산은 보장되던 사회였다. 마찬가지로 저소득층 중에서도 부자나 지주, 지식인, 중산 계층이 인종에 상관없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중남미에서 흔하던 '스페인 혈통에 가까울수록 무조건 고위층'[* 아르헨티나의 경우 같은 제국에 속했지만 필리핀이나 멕시코와 다른 양상을 보였는데, 토착 인디언들을 학살하며 몰아냈다.] 이라는 공식 같은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비사야인 지배층 중에 스페인 혼혈이 많이 존재한건 사실이나 이외의 다른 지역에선 스페인 혼혈이 아닌 지배층들도 많았기 때문이고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저소득층 스페인 혈통들이 필리핀으로 이민을 오더라도 저소득층을 형성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이는 중남미와 달리 필리핀이 오랜시간 자치권을 지켜온 역사에서 비롯된다. [* 필리핀은 고대부터 상업이 발달하여 보다 실용주의, 실력주의가 발달되었고 식민시대에도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긴 시간 지켜내어 인종서열, 계급의 고착화는 다른 중남미 또는 대부분의 아시아 사회보다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 문단에 해당하는 당시의 필리핀과 스페인 본국 사이의 정치구조적인 상하관계의 형태는 [[로마 가톨릭]] 문화로 개종된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더군다나 필리핀은 다른 가톨릭 수도회들 보다도 개혁 성향을 보이고 스페인 본국에서도 독자적이라고 욕을 많이 먹었던 수도회인 [[예수회]] 활동의 거점인 곳이었다.] 애초에 필리핀은 지역별로 지배층들의 주류 [[종교]], [[언어]], [[문화]], [[민족]] 등 배경이 제각기 다른데다, 서로 분리된 시간이 길었던 관계로 상호 내정간섭을 배제하고 이러한 자치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통합적인 시스템을 구축한 것은 효율적으로 작용되었다. 이 시기의 자치도는 매우 높아서 마닐라 지역의 무슬림들은 [[필리핀 도독령]]에 협력하였고 스페인은 그들을 강제로 개종시키지도 못하였다. 오히려 보안에 문제가 없는 이상 이들의 신앙을 유지하게 하였고 그로인해 동남아 지역의 [[수니파]] 상인들과의 무역을 위한 접촉을 용이하게 했다. 또한 필리핀 도독령이 설립된 후에도 스페인군과 식민지인들은 기록상 [[마닐라 전투(1574년)]]를 포함해 [[남중국해]]에서 온 여러 해적들,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토착 이슬람 왕국들, 개신교계 유럽 함대들과 군사적으로 맞딱뜨리는데, 여러차례의 전투에서 [[화승총]]을 포함해 무기와 방어구 무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바, 이는 식민지인으로서 무장해제를 당하지 않고 기존 지배층들이 각자의 사병을 그대로 보유했음을 뜻한다.[* 또한 마닐라 전투에서 중국해적들을 격퇴시킨 식민지 민병대는 임금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각 엔코미엔다 자치지역은 폴로(Polo)제도라는, 1년에 40일의 노동의무가 부과 되었는데 기존 국가들의 귀족계층, 관리들은 여기서 자동면제되었다. 여러 주들은 돌아가며 노동자들을 중앙에 파견한다. 이외의 부유층과 중산계층의 상인들은 7페소 은화(1페소=8레알)를 지불해 면제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세간의 통념과 달리 필리핀 식민지인들은 가혹하게 부려진 아메리카 흑인 노예들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고 [[사유재산]] 또한 보장된 사회였다. 식민지배 후기에 이르러 열강들의 경쟁이 심화되고 스페인 본국의 국력이 약화되어 그것을 메꾸기 위해 세율이 올라가는 등의 일이 있지만 식민통치 중반까지는 유화적인 동화정책들을 취했다. 주기적으로 멕시코 태생의 스페인인([[크리오요]])와 혼혈 [[메스티소]]들을 이주시켜 장기적으로 스페인 혈통이 많아지게 했다. 이 정책은 [[세부]] 섬을 중심으로 중부 비사야 제도에서 실시되었다.[* 이는 스페인 혈통을 중심으로 장기적인 중앙집권화를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필리핀인들은 고대로부터 유라시아의 다양한 상업집단들이 다녀간 만큼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다르게 전염병에 면역이어서 심각한 인구감소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1571년 마닐라에 인트라무로스, 세부에 산 페드로 등 스페인식 요새 및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1589년부터 필리핀에 아시아 최초의 유럽식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현재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서구식 대학은 산토토마스 대학교이다.] 20세기초 까지도 [[아우구스티노]], [[도미니코]], [[예수회]] 등 여러 가톨릭 수도회에 의해 학교,수도회,병원,대학들은 계속해서 설립되었을뿐 아니라 [[교황청]],왕실 주도로 설립된 대학들도 존재했다. 서양식 [[법전]], [[인쇄술]], [[그레고리력]]이 도입되었고 유럽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모든 기관에서 제공하는 교육과정에서는 단순한 종교적 강의가 아니라 법학,의학,약학,신학,철학,인문학,물리학,수학,자연사,화학 등 고등교육도 포함시켰다. 고등교육기관 바깥에서의 서민층에 대한 선교사의 교육들 또한 지대하였고 이후 2세기쯤 지나면 필리핀은 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근대식으로 교육된 중산층인 일루스트라도스 계층을 형성한다. 토착 지배층들은 제각기 소유하고 있던 인도네시아 및 여러 아시아 출신 [[노예]]들을 스페인에 판매하였고 이들은 신대륙으로 강제이주되어 인디언들과 함께 아메리카에서 노역하였고 인디언들과 혼혈되었다. 스페인은 애초엔 동남아시아에서 흔한 유럽의 사치품인 [[향신료]]를 기대했으나 필리핀에선 일부 향신료 밖에는 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