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총사령부 토교대(충칭), 일본 패전 후 === 일본이 패전하고 나서야 상하이에서 군복을 맞춰 입었다. >천더썽 소교(제 3전구 조사실)는 우리를 끌고 양복점에 가서 군복을 맞추어주면서 계엄지구 내에서 군인이 군복을 착용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조사실 공작원 뿐인데, 광복군으로서 대민사업을 하려면 군복을 착용해야 한다고 군복을 맞추어주고 군복 값도 지불해주었다.[* 김용, 나의 길을 찾아, 도서출판 이화, 2012, p.203] >----- >1945년 8월 28일, 김용 지사의 회고 또한, 여건이 될 경우 짚신이 아닌 가죽장화를 지급받는 경우도 있었다. >한 번 총사령부 갔는데, 뭣 때문에 갔냐면 거기 파견된 사람들은 가죽장화를 해줬는데 우리는 그걸 안 해줘서 데모하러 갔어요. 그때 거기 있던 사람들 다 갔죠. 아, 거기 앞에 가서 쭉 대열에 서서 우리는 왜 안주고 저기만 주느냐 우리도 달라, 해준다면 가고 안 해준다면 여기서 끝까지 데모하겠다, 그래서 나중에 해줬어요.[* 우리는 광복군, 조국의 영원한 용사(독립운동가 구술자료집), 국가보훈처, 2016, p.231] >-----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토교대 근무)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801|유재창]] 지사의 구술 인면전구공작대는 영국군복을 입었었고 제 2지대 제 3지대 OSS 국내진공반은 미군복을 입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