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항공모함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대전 === [youtube(YZrGWMqZT94)]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러서는 항공기와 항공기술이 엄청나게 상승함에 따라 항공모함의 중요도는 급상승하게 되었는데, 기존의 전함의 대형 함포로 먼 사거리에서 강력한 공격을 퍼붓는다는 개념을 포대 대신 플랫폼, 포탄 대신 항공기의 뇌격과 폭격 등으로 대치함에 따라 초장거리 포를 운용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져 버렸다. 게다가 암만 멀리 날아가봤자 4~50km가 한계인 전함의 주포에 비해, 수백 km 이상을 행동반경으로 삼을 수 있고 더욱 자유로운 기동과 정확한 공격이 가능한 항공 폭격과 뇌격은 여러모로 우위를 점한다. 항공모함 이착함이 제한되는 야간이나 악천후 정도나 예외가 된다. 물론 2차대전 초기에는 아직 항공기에 대해 이해도가 부족했기에[* 당시 폭격기 만능주의에서 알 수 있듯이 항모전술은 물론이고 항공전술 자체가 걸음마 단계였음을 생각해야한다.] 항공모함은 전함전대의 결전을 보조하는 보조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항공모함을 함대 앞부분에 배치하고 정찰활동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결전 이전에 한 두 척 정도는 잃어버려도 [[씁 어쩔 수 없지|"씁, 어쩔 수 없지."]] 수준의 존재감만 가지고 있었다. 현대에서는 상상조차 안되는 반응이나 당시 항공모함과 함재기 운용비는 현재처럼 무수한 전자장비를 갖추고있지 않아서 현대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었고 전함보다 운용비가 적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2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뒤집어지게 된다. 지상전에서는 영국이 이탈리아에 가한 [[타란토 공습]]과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해전에서는 [[비스마르크 추격전]]과 [[말레이 해전]], 다수의 전함을 잃고 불리한 환경에서 [[미드웨이 해전]]으로 전황을 뒤집는 일들이 일어나자 전 세계 해군들은 항모의 위력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다.[*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미 해군 역시 전함 위주의 함대전을 중시하는 해군이었다. 진주만 공습에서 진주만에 입항 중이던 전함 중 4척은 침몰하고 나머지 4척도 피해를 입자 어쩔 수 없이 남아있던 항공모함을 주력으로 운용하게 되는데 이게 매우 효과적임을 본 미 해군은 전함보다 항공모함 위주의 기동부대를 중시하게 된다. 이 때문에 개전 이후 진수된 [[아이오와급|신형전함]]들은 활약이 거의 없을 지경.] 특히 진주만 공습과 말레이 해전으로 각국 해군의 전략 체계엔 큰 변화가 일어났으며 항공모함-함재기의 집단운용에 의한 원거리 목표 타격이 새로운 대세가 되었다. 새로운 변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진주만에서 태평양 함대의 주력 전함들을 대거 상실하는 참사를 당해 주력 전력으로 항모만 살아남았던 [[미국]]이었다. 일본의 무통보 선빵으로 전함들은 모조리 침몰되거나 중파당해 쓸 수 없게 되었지만, 항공모함들은 기습 당시 바다에 나가있다보니 일본의 공격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고,미국은 참전 선언 이후 수십척의 항모를 한꺼번에 발주시키는 천조국 특유의 강대한 국력을 항공모함의 건조 및 우수 함재기의 개발에 쏟아붓게 되며 대전이 끝나갈 즈음엔 이들 [[에식스급 항공모함]]이 풀빵 찍어내듯 줄줄이 취역하면서 일본 해군을 상대로 붙었다 하면 탈탈 털어먹어 진주만의 치욕을 몇 곱절로 돌려주게 된다. 완성된 24척 중 17척이 태평양 전쟁 기간 중에 취역했다.[* 참고로 소형의 호위 항모와 기존 함정을 개조한 것을 포함하여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중 건조한 항공모함은 '''100척'''이 넘는다.] [[일본 해군]]은 워싱턴 군축조약으로 항모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일부 성공을 거뒀고 진주만 공습에서 집단 함재기 운용 전술을 중일전쟁에 잘 써먹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항모위주의 전투가 아니라 전함전에 더 집착했다는 것이다. [* 사실 '항공모함-함재기를 이용한 원거리 목표 공격'이라는 개념은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 퓨리어스에서부터 이미 선보였고, 영국 해군은 타란토 공습에서 '항공모함-함재기의 집단운용을 통한 원거리 목표 공격'라는 개념을 실제로 실현하려고 했다. 항공모함 한 척이 화재로 작전 참가가 곤란해졌기에 남은 한 척의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만 투입한 것이다.] 실제로 진주만 공습에서 보여준 새로운 개념은 '''항공모함의 집단운용에 강력한 함재기를 더했다'''는 점이다. 일본 해군의 주력함재기인 [[A6M|0식 함상 전투기]]는 일본 육군 항공부대에서 운용하는 항공기와 대등한 성능을 요구받은 첫 사례이기도 하다. 실제로 0식 함상 전투기는 육군 주력 전투기인 [[Ki-43 하야부사]]와 비슷한 수준의 성능을 가졌으며, 덕분에 일본 항모전단은 개전 초기에 대단히 막강한 위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의 절박한 사정 탓인데, 일단 당시 일본은 군축 조약으로 건조 중인 전함을 항모로 변경할 수밖에 없었고 이걸 어떻게든 유용하게 써먹어야 했다. 군축 조약에는 일본 해군이 미국과 영국보다 전함 숫자가 적어야 한다고 강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함으로는 수적으로 열세이니 다른 방법으로 서양 열강의 해군에 대항해야 했고, 당연히 항모를 주력으로 쓰기 위해 집단운용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조약탈퇴 이후에는 다시 전함들을 건조해야 한다느니 하며 일본 해군 내부에서도 항모파와 전함거포주의자들이 알력다툼이 벌어졌다. 후일 연합함대 사령관이 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야마토 전함 한 대에 제로센 1000대는 가뿐히 찍으니 항모를 만들자며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야마토급 전함이 건조되는 참사가 벌어진다. 이런 식이라 일본 해군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입하고도 종래의 [[전함]] 운용전술을 유지하거나 물 위를 떠다니는 항공모함 외에 다양한 타입의 항공모함들을 운용했다. 물론 당연히 결과는 좋지 못했다. [[이세급 전함]]은 [[항공전함]]으로 개장된 후 실전에 투입되었으나, 함재기가 없어서 미끼나 수송선 노릇만 하는 굴욕을 당했다. 일본군의 쌍발폭격기인 [[G4M]]은 [[MXY-7 오카]]라는 [[자폭 병기]] 1대를 탑재했는데, 이 때문에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공중항공모함]]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러나 폭죽으로 유명한 G4M과 오카의 조합은 대실패. 이 외에도 [[잠수 항모]] [[센토쿠급]]을 실전에 투입하려고 했으나, 울리시 환초 공격작전을 시행하기 직전에 일본이 항복했으므로 실전을 치르지는 못했다. 이런 것에서 알 수 있다싶이 일본 해군의 작전개념에서 딱히 항공모함이 전함을 압도할 정도까지는 여겼다고 보기는 힘들다. 항공모함의 집단운용이라는 혁신적인 구상을 만들어냈으면서도 일본 대본영은 항공모함을 그저 전함의 보조전력 정도로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고 실질적으로 항공모함 위주로 재편이 이루어진 것은 1944년 정도에 들어가서야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막상 일본 전함은 태평양 전쟁에서 실적이 없다. 위에서는 '전함의 존재감이 강화되었다'고 서술했으나 그건 후방에서나 그런 거고, 최전선의 일본군 장병들에게는 존재감 제로였다. 최일선에서 미군에 맞서 싸운 전함은 [[함대결전]]에는 실격이라며 주력에서 밀려난 [[공고급 순양전함]] 4척과 이를 보조하는 [[중순양함]]들이었고 이들은 엄청나게 혹사당했다. 전함이 없으니 항공모함 호위부터 야간전까지 중순양함들이 다해야 했기 때문이다. 막상 일본의 주력 전함들은 [[함대결전]]을 대비해야 한다며 후방에서 놀았으므로 전쟁에 기여한 바가 없으며, 전장에 나가자마자 [[레이테 만 해전]]에서 야마토급 전함 2번함 [[무사시(전함)|무사시]]가 자기 주포로 대공포 사수들을 날려버리는 삽질을 하며 미 항공모함 기동부대에게 박살났고, 야마토와 나가토는 미군 구축함에게 쫓겨서 줄행랑쳤다. 이후 야마토는 일본 해군의 체면을 세운다는 이유로 오키나와로 자살돌격을 감행했고, 미 항공모함 기동부대에게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끝에 침몰하면서 "항공모함이 전함보다 세다"는 증거자료가 되고 말았다. 영국 해군은 상대적으로 항공모함의 활약상이 덜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놀고 있었던 건 아니다.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의 키를 박살내서 발을 묶은 것이 항공모함 아크로열의 뇌격기인 소드피시였으며, [[몰타 항공전]]에서도 다수의 함재기를 싣고 몰타 섬을 구원하기 위해 수많은 항공모함들이 동원되었고, [[호위항공모함]]들은 [[대서양 전투]]에서 U보트를 상대로 승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심지어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 [[퓨리어스(항공모함)|퓨리어스]]까지도 몰타 항공전과 [[티르피츠]] 레이드에 참가하여 활약할 정도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RM_25_Bild-27%2C_Flugzeugtr%C3%A4ger_%22Graf_Zeppelin%22%2C_Stapellauf.jpg]] [[나치 독일]]의 [[크릭스마리네]]도 항공모함 보유 계획을 세웠으나 독자적으로는 항모를 만들 기술이 부족했던 독일은 [[일본 제국]]과의 기술 거래[* 독일은 전차 엔진 및 제트엔진 기술을 매물로 삼았다.]으로부터 전폭적인 기술 지원을 받아 [[그라프 체펠린급 항공모함]]의 건조를 시도한다. 150mm 함포 등의 중무장과 35노트의 빠른 속도를 갖추어 단독으로도 통상 파괴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력을 가졌으나 나치 내부의 적인 공군 총사령관인 [[헤르만 괴링]]이 항공기는 다 자기 관할이라는 미친듯한 태클 때문에 건조 및 운용계획에 심각한 차질을 빚었고, 건조이후엔 함재기 선정 과정에서 난항을 겪으며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실전은커녕 자침으로 생을 끝냈으며, 전후에는 소련군에게 입수돼 '''미 해군 항공모함 격침을 위한 교보재'''로 쓰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 해군]] 또한 민간 여객선을 개장해서 [[아퀼라(항공모함)|아퀼라]]라는 항공모함을 만들려 했지만, 개장 도중 계획이 취소되어 미완성된 채로 항구에 정박해 있다가 전쟁 이후 고철로 처리되었다. 이는 괴링을 능가하는 이탈리아의 트롤러 [[이탈로 발보]]의 반대 때문에 몇차례나 되는 항모 건조 계획이 모두 엎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타판 곶 해전에서 영국군 장갑항모 포미더블에게 큰 피해를 입고 나서야 부랴부랴 아퀼라 개장 계획이 잡혔으나 차라리 구축함을 만들자는 논리에 밀려 취소당했다. 프랑스는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박살난데다, 항공모함 자체의 성능이 뒤떨어졌으므로 활약상이 없다. 프랑스의 유일한 항공모함인 [[베아른급 항공모함]]은 너무 느려터져 항공기 수송선으로만 사용되었으며, [[조프리급 항공모함]]은 건조 도중에 프랑스가 박살나면서 건조가 중단되었고, 이후 독일군이 해체했다. 소련은 항공모함이 없었지만, [[즈베노 프로젝트]]라는 [[공중항공모함]]을 실전에 투입해서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성능이 뒤떨어졌으므로 전쟁 중에 퇴역했다. 이게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군의 유일한 항공모함 운용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