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군선옥론 (문단 편집) == 주장되는 근거 ==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직후부터 일본 육군은 [[2.26 사건]]을 일으켰고, [[만주사변]]은 [[관동군]]의 폭주에 기인 한 것이며, 쇼와 시절 군부독재 정치는 육군군벌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전개되었다. 이 주장은 오랫동안 일본군을 연구하거나 거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그리고 마지막 육군 대신 시모무라 사다무 장군은 1945년 11월 28일 일본 하원에서 군부의 책임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스스로 그러한 군국주의에 빠져 횡포를 일삼은 육군의 잘못을 인정하였다. 물론 식민지에서 범한 악행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빠져 있고 전사자에 대하여만 거론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 질문자였던 [[사이토 타카오]]는 해군대신이었던 [[요나이 미쓰마사]]에게는 답변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 당시 요나이는 묵묵히 시모무라 육군대신의 반성 담화를 듣고 있었다. 또한 극동 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판결받은 해군 인물은 3명이고 , 육군 인물은 총 7명인데 해군은 모두 징역형을 선고받고(그 중 한명은 집행 전에 옥사) 육군은 1명을 제외하고 도조 히데키 등 6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다. 또한 [[삼대오물]]도 전부 육군 출신이다. 재판 결과에서도 보듯 해군으로서 전범으로 처형된 사례는 다이고 타다시게나 사콘조 나오마사[* 1944년 3월 18일, [[토네급 중순양함]] 1번함 토네의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와 토네의 승조원들이 일으킨 [[베허호 사건]]의 책임을 지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자세한 내용은 [[베허호 사건]] 문서로.]가 유명하지만 이들은 각각 네덜란드나 영국군의 즉결재판으로 사형에 처해진 특이한 사례다. 그래서 [[해군반성회]]에서는 전범재판 당시 해군측에서 대대적으로 육군에게 자신들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워서 해군들은 사실상 [[불기소처분]]으로 방면되었다는 언급이 있을 정도다. 물론 공직추방령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더라도 1950년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는 핸디캡이 존재했지만 이런 핸디캡은 육군도 마찬가지였거니와, 해군 전범의 대다수는 처벌도 받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과거에서 자유로웠으므로 결과적으로 해상자위대에 일본군 해군 출신 인사가 대대적으로 유입되는 결과를 초래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