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적 (문단 편집) ==== 지중해 기독교도 해적 ==== >이들(무슬림 노예 노잡이)은 휴식조차 제대로 취할 수 없었다. 1.2m×3m짜리 방 하나에 7명씩 넣어졌기 때문이다. >몰타의 기독교도 해적 갤리선에 대한 어느 프랑스 장교의 증언. >이놈들은 겉으로만 십자가 행진을 하는 [[코르세어]]들이다. >1588년 베니치아 관리들의 몰타해적들에 대한 촌평. 13세기에 이르자 레반트에서 쫓겨난 [[구호기사단]]은 중앙집권체제여서 수도가 털린 후 정신을 못 차리는 동로마의 영토인 로도스 섬을 점령하여 로도스 기사단으로 개명하고는 이슬람 해적들이 하던 짓을 똑같이 하였다. 이슬람 선박을 공격해 물건을 다 털어버리고 선원은 노예 노잡이로 부리는 식. 여전히 기사단이 돈과 선박, 병력을 댔으나 후기로 가면서 장삿속이 끼어들었다. 당연히 12세기 이후 동지중해를 석권한 [[베네치아]]와 연관이 깊을 수 밖에 없었으나 베네치아는 어디까지나 장사꾼 근성(원래 이집트로 가게 되어있던 4차 십자군을 콘스탄티노플로 돌려버린 것도 이집트와의 통상조약에 불침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이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대의를 중시하는 구호기사단과는 마찰이 잦았다. 1522년, 오스만 제국이 로도스 섬을 점령하자 구호기사단은 서쪽으로 쫓겨나 1530년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에게서 몰타를 하사받았고 그 댓가로 몰타의 매를 조공품으로 받았다. 카를5세는 이들이 오스만을 견제할 의도로 섬을 줬지만, 배은망덕하게도 이들은 베네치아 상선까지 털어댔다. 이유는 간단한데 베네치아가 유일하게 오스만과 협약을 맺어 바르바리한테 공격당하지 않았고, 그래서 약탈할 전리품이 많았기 때문. 여러차례 교황으로부터 베네치아 선박을 그만 좀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기사단장과 평의회는 어마어마한 전리품 덕에 이를 깔끔히 무시했다. 위의 인용문에서 베네치아 관리들이 경멸적인 평을 내린 건 이유가 있고, '기사단'이라는 명예로운 호칭 대신 해적이라 불리는건 그만한 행적 때문이다. 오스만이 몰타에 몇 번이나 포위공격을 가한 건 이들의 해적질이 상당한 이유를 차지한다. 1561년 3월 15일에는 '성 스테파노 기사단 (Order of Saint Stephen) 이 창설되었는데, 이들은 구호 기사단보다 한발 더 나아가 이슬람 상선 약탈뿐만 아니라 레반트 지역에 상륙해 지상 약탈까지 벌였다. 토스카나 공국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고. 이들의 해적질이 극에 달했던 16세기 말엽과 17세기 초반에는 심지어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 근교에까지 나타나서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카로 배를 타고 가는 순례자들을 몽땅 납치하여 [[서유럽]]으로 끌고 와 노예로 팔아버리는 짓을 자주 벌였고, 그래서 [[오스만 제국]] 정부에서는 스테파노 기사단의 해적질로 인한 치안 불안이 매우 심해지는 바람에 한 때는 메카로의 성지 순례 자체를 금지시키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밑의 바르바리 해적처럼 이들의 전성기도 영원히 가지 못했다. 오스만의 1565년 유명한 몰타 대포위를 견뎌낸 뒤, 1650년대 이후 신항로 개척 등으로 점차 쇠퇴하게 된다. 나폴레옹이 점령하는 1798년까지 구호기사단이 몰타를 장악했으나 예전의 해적소굴 역할은 더 이상 못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16세기 초에서 17초 무렵, 현재 동유럽 [[크로아티아]]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 군대에게 쫓겨난 크로아티아인들이 복수를 하기 위해 우스코크(Uskok)라는 해적이 되어 오스만 제국 해안 지역을 상대로 무자비한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던 일도 있었다.[[https://en.wikipedia.org/wiki/Uskoks|#]]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