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석현 (문단 편집) == 생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홍석현 첫돐.jpg|width=100%]]}}} || ||<#ddd> '''{{{#000 1950년, 첫 돌을 맞이한 홍석현}}}''' ||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산업공학 석사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세계은행]](IBRD) 이코노미스트로, 1985년부터 이듬해까지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으로 일했다. 아버지인 [[홍진기]]가 [[이승만 정부]] 마지막 내각에서 법무장관으로 일할 때, [[4.19 혁명]] 과정에서 시위대에 서슴지 않고 발포 명령을 내렸던 죄목으로 [[5.16 쿠데타]] 이후 사형 선고를 받았던 터라, 할머니가 어떤 공부를 해도 좋으니 법과대학은 가지마라고 얘기를 했다고 한다. 이에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제치고[* 50~60년대에는 화학공학과 출신들이 비료나 석유 화학같은 산업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서울대학교에서 가장 입학 성적이 좋았던 전자공학과로 들어가게 되었다[* 오남매 중 이화여대에 진학한 홍라영씨를 제외한 4명이 서울대에 입학했는데,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유리한 조건에서 시작하기는 했다지만 공부머리는 타고난 집안인 듯.] 그러나 적성에 잘 맞지 않았고, 이후에 산업공학이 인기였던 터라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으로 유학을 가서 산업공학 석사를, 경제학으로 박사를 받았다. 1964년에 부친인 [[홍진기]]가 삼성그룹의 계열사였던 [[동양방송]]의 사장으로 영입되고, 1967년에는 누이인 [[홍라희]]가 [[이건희]]와 결혼하게 되면서, 홍씨 가문과 삼성가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된다. 홍석현도 이 덕에 귀국 후인 1986년부터 삼성코닝 상무, 전무, 부사장을 역임하게 되었으며, 1994년에는 중앙일보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듬해 3월에는 사장으로 승진했고, 1999년 [[삼성그룹]]으로부터 계열분리 된 이후 회장직에 올랐다.[* 물론 해당 계열분리는 이건희 회장과 삼성그룹 계열사들의 주식을 차명으로 홍씨 일가에게 이전한, 이른바 '위장 계열분리'라는 주장이 김용철 변호사로부터 나오기도 했다. 자세한 사항은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52734.html|해당 기사]] 참조.] 이때부터 중앙일보 한글제호 변경, 가로쓰기 시행, 섹션신문 발행 등을 주도하였다. 이후 세계신문협회 회장(2002~2005년), 한국신문협회 회장(2003~2005년)을 역임했다. 아시아 지역 출신이 세계신문협회장을 맡은 건 당시 홍 회장이 처음이었다. 2005년 2월부터 주미 대한민국 대사로 재직하다가, [[1997년 대선]] 당시 [[삼성그룹]]의 수백억 대의 불법 비자금을 정치자금 명목으로 [[이회창]] 캠프로 전달하는 과정의 녹취와 관련된 [[삼성 X파일 사건]] 논란이 터진 뒤, 주미대사직을 중도에 사퇴하였다. 주미대사로 가기 전에 노무현 정부로 부터 차기 유엔 사무총장직을 약속받고 미국 워싱턴에 미국 대사로 부임했으나, 중도 낙마 후 결국 2006년 12월 27일에 중앙일보 대표이사 회장으로 복귀하였다.[* 홍석현의 낙마 후, 그의 대타로 참여정부의 지지 하에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 된 사람이 바로 당시 외교부 장관이던 [[반기문]]이었다.] 2011년부터 JTBC 대표이사 회장을 겸임했다. 2014년 JTBC 대표이사에서 물러났고 그 다음해에 중앙일보 대표이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2017년 3월, 중앙일보와 JTBC 회장직을 사임했다. 2014년부터 2018년 까지 한국기원 총재를 맡았었다. 이 밖에도 세계문화오픈(WCO) 조직위원회 위원장, [[삼극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 아시아 태평양 그룹 부회장, 아시아재단 이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이사, 채텀하우스(Chatham House) 고문 등으로 활동을 했다. 홍석현의 정치 성향은 [[보수주의|보수]] [[우파]]라는 평가가 일반적이지만[* 일례로 [[1997년 대선]] 때는 사주인 홍석현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으며, 삼성의 비자금 100억원을 직접 이회창 캠프로 전달하는 역할도 맡았다. 이 때문에 대선 결과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후에는 홍석현이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는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937.html|내용의 보도]]가 나올 정도였다. 나중에 알려진 내용이지만, 심지어 당시 대선 결과 이회창이 낙선하자 "내 월급을 받고 DJ를 지원한 간부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면서 호남 출신 간부들을 해고하라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70556|지시했을]] 정도였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몇 개월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여정부]]에서 [[주미대사]]를 지내기도 하고[* 하지만 같은 보수 우파인 [[반기문]]도 참여정부에서 [[외교부장관]]을 지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런 노무현의 인사가 아예 이해 안 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 민주당 대통령들(김대중-노무현-문재인)은 보수적인 인사를 내각에 기용하는 탕평책을 꽤나 많이 펼쳤다. 반면에 보수정당 대통령들은 거의 [[코드인사]]를 펼친 편이다.], [[JTBC]]가 태블릿 PC 특종을 비롯하여 국정농단 보도에 앞장섰던 것 등을 생각하면, 홍석현의 정치성향을 간단하게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는 어려운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일보]]의 논조는 예나 지금이나 일관된 [[보수주의|보수]] [[우파]]인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러 저러한 이유 때문에 여러모로 미국의 미디어 재벌이자 정치인인 [[마이클 블룸버그]]와 비슷한 캐릭터라는 평도 있다. 둘 다 자국의 대표적인 미디어 재벌이며, 현실 정치에 관심이 많고, 특히 본인의 정치적 욕망이 크며, 본질적으로는 정치적으로 보수 우파에 친기업적 성향이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민주당 등 리버럴 진영에도 한 발을 걸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블룸버그]]의 경우에는 요직인 [[뉴욕]] 시장을 세번이나 지내는 등 미국 주류 정치계에서 입지를 확실히 굳혔고, 자신이 설립한 [[블룸버그]]를 세계적인 미디어 그룹이자, 금융 정보,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성장시켰으며, 창업을 통해 크게 자수성가한 경우이지만, 홍석현은 본인의 여러 적극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정치계에 성공적으로 발을 들이지도 못했고, 무엇보다도 창업이 아니라 [[삼성그룹]]이라는 재벌가에서 성장하며 상속과 계열분리의 형태로 기업체를 물려받은 것일 뿐이라는 점이 다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