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콩/정치 (문단 편집) == 역사 == 오늘날의 인상과는 달리 홍콩 반환 이전 [[영국령 홍콩]]은 반환 직전까지 식민지로서 제도적 민주화가 미진한 지역이었다. 현재 홍콩 행정장관은 간선으로라도 선출되지만 행정권과 홍콩 주둔 영국군의 군령권까지 쥐었던 홍콩 총독은 반환 이전까지 한 차례도 선거 없이 본국에서 임명되었다. 주민들에 의해 선출되는 시정평의회[* 반환을 앞두고 해산됐다.]는 입법권이 없었으며, 홍콩 입법국은 1843년 개원해 140년동안 임명제 자문회의였다가 1981년 입법권이 부여되었고 1985년 [[중영공동선언]]으로 [[홍콩 반환]]이 확정되고 난 뒤에야 직선제 개혁을 했고 그동안 입법권 없이 시정평의회에 직능선거구 단 한석이 배분되었다. 당초 계획에 의하면 60석 중 20석만 직선제로 선출하고, 나머지는 선거위원회와 직능선거구 의석이었고, 1995년 선출된 입법국 의원이 반환 이후까지 이어지는 일명 '직통열차' 방안이었는데, [[데이비드 클라이브 윌슨|데이비드 윌슨]] 총독이 대중 저자세로 일한다는 비판이 커지자 영국 정부가 홍콩 총독을 [[크리스토퍼 프랜시스 패튼]]으로 교체한 1992년에서야 선거연령을 낮추고 영국식 단일지역선구제를 도입하고 직능대표위원 선거권자 범위 확대, 임명직 구의원 폐지 등의 개혁을 했다. 이게 다 1984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하는게 확정된 이후에 후다닥 이루어진 개혁이다. 다른 영국의 해외 영토도 이런 식이지만 제국주의의 해체를 겪으면서 대부분의 경우 해외 영토 주민의 직접 선거로 구성된 의회에서 선출된 [[총리]]가 내정에 대한 실권을 맡고 총독은 실권이 없게 되었는데, 그런 점에서 영국 본국에서 내려보낸 총독이 반환 직전까지도 실권을 가졌던 홍콩은 특이했다.[* 또한 그때까지도 총독을 영국인 중에서 임명했는데 이 역시 특이한 사례이다. [[캐나다]]에서는 1952년 제1대 튜니스의 알렉산더 백작 해럴드 알렉산더, [[호주]]에서는 1965년 제1대 De L'sle 자작 윌리엄 시드니, [[뉴질랜드]]에선 1967년 Ballantrae 남작(일대귀족) 버나드 퍼거슨을 끝으로 호주인 중에서 총독을 임명했다.(영국 국왕이 호주 총리의 추천을 받아 임명하는건 똑같았다.)] 영국도 다른 영국령 식민지들처럼 이미 1950년대부터 영국령 홍콩의 민주주의 도입에 대해서 여러가지 논의를 해오기는 했다. 마크 애이치슨 영 총독은 3분의 2를 주민 직선으로 선출하는 시의회를 설치하며 공무원에 중국계의 비중을 늘리는 개혁을 구상했으나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한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영국에 지속적으로 홍콩 민주화를 추진하지 못하도록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압력을 가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후, [[국공내전|공산화된 중국은]] 홍콩에 서구적 민주주의가 도입되면 홍콩 병탄이 매우 어려워질 것임을 직감하고, 본토인 [[영국]]한테 계속해서 민주화를 하지 못하게 방해를 가했다. 특히 [[1950년]] [[영국]]이 [[중화민국]]의 승인을 취소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 이는 영국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홍콩을 빼앗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중화민국]]이 [[UN]]에서 쫓겨난 건 [[1971년]]으로 한참 후의 일이다.], [[1952년]]에는 영국-중국 수교 조약을 맺은 이후, 영국에 대해서 입김이 세진 중화인민공화국은 홍콩에 민주적 체제를 도입하지 말 것을 영국에게 지속적으로 요구하며, 민주화를 할 경우 군사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경고를 영국 측에게 지속적으로 전달해 왔다. 영국 입장에서는 [[중국 인민해방군|중공군]]을 막으려고 4만 명에 달하는 [[영국군]]을 [[홍콩]] [[신계(홍콩)|신계]]지구에 파병해서 지켜야 하는 형편이었는데[* [[홍콩]] 신계 개발이 매우 늦었던 원인이다. 신계에는 영국군 기지가 50여 곳이나 있었다. 그나마 가장 개발이 빨랐던 곳이 지금 [[홍콩 국제공항]]이 있는 란타우 섬이었다.] 문제는 홍콩에 영국군 4만명 파병해봤자 [[마오쩌둥]]같은 [[또라이]](...)가 홍콩에 수백만 중공군을 이끌고 침공하면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적 압력으로 인하여 결국 영국 정부는 그들의 요구대로 영국령 홍콩의 정치 시스템을 예전과 같은 비민주적인 시스템으로 유지해야 했고, 결국 홍콩의 민주화는 미뤄졌으며 [[중영공동선언]]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영국령 홍콩에 대해 직접적인 군사 행동을 취할수 없게 된 이후에나 영국이 [[홍콩]]에 민주화를 도입한 것이다. 제도적으로 보면 영국령 홍콩 시절의 정치 체제보다 현재의 정치 체제가 더 민주적인 면도 있다.(행정장관 간선 등) 하지만 중국의 최근 행보는 중국이 홍콩의 자치와 민주주의를 존중하고 추진할 생각이 없음을 홍콩인들에게 인식시켜 주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