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장세자 (문단 편집) === 정조의 양부가 되다 === 이복동생인 사도세자가 [[임오화변|뒤주에 갇혀 죽으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영조는 그 아들인 왕세손([[정조(조선)|정조]])을 후계자로 삼을 생각[* 영조의 친손자들은 다 사도세자의 아들들이었다. 당시 영조의 나이상 아들이든 딸이든 아이가 더 태어날 가능성은 낮았으니, 손자에게 물려주지 않을 거면 먼 친척 중에서 후계자를 찾아야 했다.]이었지만, 명색이 죄인인 [[사도세자]][*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자마자 복권시키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도 내렸지만, 폐서인은 거두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여전히 죄인이었다.]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래 전에 죽은 효장세자를 끌고 와서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만든 뒤에야 후계자로 삼았다. 정조는 졸지에 당시 자기 나이보다도 일찍 죽은 이복 [[백부]]의 아들이 되어버렸다.[* 다만 정조와 효장세자의 나이 차이는 생각보다 작은 33세다. 사도세자와 효장세자의 나이 차이는 16세고, 사도세자가 겨우 17살에 정조를 낳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 물론 사춘기가 오면 바로 결혼하던 당시(보통 10대 중반에 혼인)로서는 부자지간에 나이 차이가 그 정도인 건 흔한 일이었다. --음? 그럼 할아버지 뻘 아니냐?--] 이는 세손이 역적의 아들이라 하여 [[노론]]의 공격을 당할 것을 우려한 영조가 취한 조치이기도 하다.[* 다만 실제 상황을 본다면 노론이 사도세자&정조 부자와 거리가 멀었다기보다는 왕위를 계승하는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경향이 더 강한 편이었다. 노론 강경파인 [[벽파]]도 사도세자의 추숭을 인정하면 반대파인 [[소론]]이나 [[남인]]에게 꼬투리를 잡혀 몰락하게 되니까 반대하는 것이었지, 정치적 견해로 따지자면 사도세자와 적대 관계는 아니었고 전신이 되는 노론 대신 대다수도 사도세자의 비행을 덮거나 옹호했다. 노론 음모론과 달리 영조가 사도세자를 제거했던 진짜 이유는 사도세자가 제왕학에 관심이 없는 것을 넘어서, 아예 사람을 죽이는 정신병자가 되어 도저히 신하와 백성들을 통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물론 이 정신병은 사도세자를 노골적으로 박대한 영조 탓도 컸다.) 반대로 손자인 세손은 학문을 좋아하고 문무까지 겸비하여 훌륭한 후계자로서 영조를 크게 만족시켰다. 결국 영조는 정신병자인 아들보다 자신의 기준에 딱 맞는 훌륭한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계획을 세운 것. 실제로 영조는 세손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여, 철저히 보호해 무사히 왕위를 계승하게 해주었다. 애초에 노론 벽파가 사도세자에게 개기기 힘든 것이 영조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손자를 낳아준 아들은 사도세자뿐이라 개겨서 어떻게든 사도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해도 그 아들이 왕위를 잇게 될 것이고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 개긴 불충한' 노론 벽파들을 가만히 냅둘 리가 없기 때문이다. 더 최악은 이때까지도 살아남은 사도세자가 아들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직접 박살내는 것. 그렇다고 먼 친척중에 모셔오는 짓을 하기엔 명분이 없고 이미 [[삼수의 옥|수십년 전에 그런 음모를 꾸몄다는 명분으로 아작난 적도 있어서]] 쉽게 시도할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정조는 죽을 때까지 친아버지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지 못했지만, 양부인 효장세자는 즉위하자마자 바로 국왕으로 추존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