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종(조선) (문단 편집) === 북벌 준비와 군비 확장 === [[북벌]]의 실행을 위해 [[송시열]]을 필두로 하는 산당과 손을 잡고 '''[[북벌]](北伐)'''을 추진했다는 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지만, 송시열은 실제로는 북벌(北伐)에 심히 소극적이었으며, 효종이 북벌의 당위성을 설파할 때도 수신(修身)만을 권할 따름이었다. 송시열이 북벌파였다는 이미지는 사관마저 물러가게 하고 효종과 송시열 둘만이 독대한 기해독대[* 효종이 사망하는 효종 10년([[1659년|1659]]) [[3월 11일]].]의 내용을 '''송시열이 후일에 진술한 바에 근거한 것'''이다.[* 이 독대의 내용을 공개한 시점은 [[숙종(조선)|숙종]] 1년으로, [[예송]]을 잘못 이끈 죄로 유배된 데다 [[남인]]에게 효종의 [[조선/왕사|정통성]]을 부정했다는 죄목으로 공격받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송시열은 효종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야 할 절박한 상황이었기에 당시의 독대 내용을 공개했지만 내용을 보면 반대로 [[유교]]적인 수신책만을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에 이르러서는 북벌이 조선군의 군사력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명분이었다는 의견에 힘이 실린다. 학자들은 효종이 송시열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사림파|사림]] 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이들 세력들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데 북벌을 이용했다고 본다. 반면에 송시열은 북벌은 염두에도 없지만, 효종의 지지를 앞세워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열성을 다했다는 것이다. 즉, 효종은 서인세력의 영수 송시열을 전면에 내세워 불안한 정국과 민심을 추스르려 했고, 재야의 영수인 송시열은 자신의 기반인 산당들을 등용하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효종이 [[산당(붕당)|산당]]을 중심으로 한 서인 송시열 일파를 아우르면서도 왕권 강화를 시도한 모습은 자주 보인다. 하지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걸리적거리는 산당(山堂)을 제어할 경우, 자신을 인정하여 정통성을 보장해줄 재야 세력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릴 것은 정말 뻔한 상황이었다. 당시는 [[삼전도의 굴욕]](정축하성)의 영향으로 업신여기던 오랑캐 만주족에게 엎드린 인조 조정에서 일하는 것을 오랑캐에 굴복하는 것과 같다고 여기는 풍조가 강했고, 고질적인 벼슬 기피 풍조가 퍼졌다. 그러니 재야 세력과 조정에서 일하는 사대부들의 세력 차이는 엄청났고, 조정의 일부 한당과 친청파의 지지 수준으로는 정통성 확보는 물론이거니와 조정의 국정 운영도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따라서 효종은 오히려 자신의 친위 세력이 될법한 [[김자점]]과 친청파는 실각하듯 배제해버리고 [[김집]], [[송시열]], [[송준길]] 같은 [[산당(붕당)|산당]](山堂)을 극진히 예우했다. 하지만 이는 왕권 약화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었다. 효종은 이를 방지하고자 유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 명분, 즉 '''[[북벌]](北伐)'''을 들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산당의 수장 송시열도 왕에게 거의 전권을 이양받다시피 하는 권위를 부여받고도 효종에게 엎드렸던 것이다. 이런 왕권 강화는 효종 본인의 빈약한 정통성을 만회하기 위한 의도 또한 있었다. 효종은 형 [[소현세자]]의 자식들(효종의 조카들)에게 돌아갔어야 할 [[조선/왕사|왕위]]를 가로챈 '찬탈자'로 해석될 수도 있는 위치에 있었고, 특히 형수 [[민회빈 강씨|세자빈 강씨]]의 옥사에 대한 의문점은 사대부 전체에 걸쳐 만연해 있었다. 따라서 효종은 [[조선/왕사|정통성]]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여, [[강빈]]을 신원할 것을 요구한 신하들을 여러 이유 들어 전부 죽여대고 강빈을 '역강'('''逆姜''')[* '반역자 강씨'라는 뜻의 비칭.]으로 부르며 "역강에 대해 한 마디라도 꺼냈다간 똑같은 역당으로 간주하겠다!"라는 강경한 발언을 해가며 입을 옥죄듯 강하게 틀어막았다. 그런데 사실 효종은 봉림대군 시절에는 [[소현세자]] & [[강빈]] 부부와 볼모 생활을 하면서 관계가 매우 좋았다. 게다가 이후 [[이석견]](경선군)을 비롯한 [[소현세자]]들의 자손들은 귀양지를 계속 옮겨주다가 결국 귀양을 풀고 [[한양]]에서 살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했다. 즉, 바꿔 말하면 효종으로선 내심으론 소현세자와 그 가족에게 애정을 가졌을 가능성은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이런 생각을 드러냈다간 당장 본인의 [[조선/왕사|왕위 정통성]]이 무너질 수 있어서, 평생 형수 [[민회빈 강씨]]에 대해서만큼은 필히 반드시 강경하게 대응해야 했다는 것. 효종을 [[북벌론|북벌]](北伐)에만 매달렸던 '맹목적 이상주의자'로 보는 시각이 꽤 많은데, 그도 [[명나라]]의 [[베이징시|수도 북경]] 정복과 [[청나라]]의 천도 과정을 [[소현세자]]와 함께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사람이라는 걸 기억하자. [[청나라]]에 대해 복수심은 있어도, 전면적으로 나서서 복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군비 확장도 [[임진왜란]] - [[이괄의 난]] - [[정묘호란]] - [[병자호란]]에 걸쳐 누더기가 된 군사 편제를 재정비해야 했으므로 필요한 일이었다. 또한 [[대동법]]의 확대 실시 등 민생을 안정시키면서 진행한 덕에 효종 치세에서 [[임진왜란|왜]][[정유재란|란]]과 [[정묘호란|호]][[병자호란|란]]으로 크게 초토화 된 조선은 그나마 안정세를 되찾을 수 있었다. 장군인 [[이완(1602)|이완]][* 李浣, [[1602년|1602]]~[[1674년|1674]]. [[이순신]]의 조카 [[이완(1579)|이완]]과는 다른 인물이다.]을 등용할 때의 야사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효종은 한밤중에 [[무신]]들을 긴급 소집하고, 미리 소집한 군졸들에게 '''촉이 없는 화살을 해를 입히지 않을 정도로 쏘게 하였다.'''[* 활을 제대로 쏘면 아무리 촉이 없더라도 자상(뾰족한 물건 등에 찔리는 상처)을 입을 수 있다. 다만 사람이 죽을 정도의 치명상은 피할 수 있다.] 자다가 무슨 변고가 일어났나 하고 궁으로 들어오던 [[무신]]들이 난데없이 날아오는 화살에 다들 허둥지둥대는데, 오직 이완만이 어명을 받들기 위해서 등에 화살이 여러개 꽂힌 채로 그대로 효종의 앞에 나타났다. 또한 당시 그는 [[효종(조선)|임금]]이 급하게 부르니 어떤 큰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공복(관복) 안에 두꺼운 갑옷을 입고 와서 화살을 개의치 않고 떳떳하게 효종의 앞으로 걸어올 수 있었다. 효종은 이 모습을 보고 충성심과 준비성에 크게 감탄하여 이완을 상과 함께 치하하며 [[북벌론|북벌]]의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계속하여서 북벌을 위한 군비의 확충을 기하여 군제의 개편, 군사 훈련의 강화 등에 힘썼다. 청의 국세가 더욱 일어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1654년]] [[러시아]]와 청나라 간의 충돌 사건이 일어나자 오히려 청의 강요로 [[나선정벌]][* [[일본]]에게 당했던 [[조총]]으로 조총 부대를 편성해 물리치는데 효과적인 승전보를 울릴 수 있었다.]을 2회 출정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얻은 성과도 소수 있기는 했지만... [[1659년]] [[5월 4일]] 효종이 종기의 악화로 인해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북벌 계획도 흐지부지 일단락으로 끝났다. (음모론적) 야사에 따르면 [[5월 5일]] 군대를 출동시키려고 했는데 그 전날 갑작스레 죽었다고. [[나선정벌]] 당시, 조선군을 지휘했던 [[신유]] 장군은 전리품으로 얻은 [[플린트락]] [[머스킷]] 300정 ~ 400정 중 단 1정만 힘들게 빼돌려서 조정에 진상하였고, 시험적으로 양산하였다. 하지만 구조가 복잡해서 생산이 힘들고, 단가는 조총보다 훨씬 비싸면서 성능은 조총보다 약간 앞서는 정도였기에, 효종은 '차라리 같은 값으로 조총 3정 만드는 게 낫겠다.' 하여 수백 정만 소수 생산한 후 백지화했다. 한편 신유 장군이 가져온 것 말고도 [[헨드릭 하멜]]이 [[머스킷]]을 진상했지만, 마찬가지로 양산은 되지 못했고, [[헨드릭 하멜]]은 이후 [[조선]]에 정착하여 조용히 살다가 나중에 몰래 탈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