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종(조선) (문단 편집) === 북벌론에 대한 평가 === 북벌론을 내세우며 정예 조총병 양성, 조총 개선 및 홍이포 등 대포 개량 등등 국방력 면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보기도 했고, 전란 이후의 민생을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여러 가지로 의욕이 강했으며, 많은 업적을 남긴 [[명군]]이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효종을 '''문약에 빠진 조선을 무(武)의 기치를 내세워 개혁하려 한 현실적인 개혁 군주'''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작품을 보면 효종 [[미남]]설을 반영한 것인지 외형도 제법 준수하게 묘사되었다.] 효종은 북벌이 개시되어 청나라가 다시 침공해올 때를 대비해 [[한성부|서울]] 근처의 방어 기지인 [[남한산성]]의 약점을 보강했으며, 만일을 대비해 내부 방어 체계를 재정비했다. 다른 국방력 강화도 [[쌍령 전투]] 등으로 드러난 조선군의 약해진 전투력을 재정비하고, 군의 자질을 높이기 위한 훈련 강화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해외의 역사학자들도 조선에서 가장 유능한 왕으로 [[세종(조선)|세종]]과 [[정조(조선)|정조]] 다음으로 효종을 뽑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그도 그럴 게 일단 조선이란 나라는 지정학적 위치에 비해 군사력 증강을 할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왕조인데 이런 [[조선]]에서 [[조선군]]을 잠깐이나마 [[강소국]] 수준의 [[군대]]로 발전시킨 효종을 높게 보는 이들도 일부 있다. [[북벌론]]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국력에서 비교도 안되는 청나라를 때려잡겠다고 말하는 이상주의자로 보일 수 있겠지만, 효종은 [[왕위]]에 올라있던 10년간 단 한 번도 청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부왕 인조처럼 청나라에게 불쾌한 서신을 보내지도 않았고, 강요 끝에 이뤄진 것이긴 하나 [[나선정벌]]에 파병까지 보냈다. 즉, 연이은 [[전쟁]]으로 박살나있던 [[조선]]의 군사력을 회복시키고 아니꼬와도 청나라에게 협조하는 스탠스를 취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행보를 보인 것이다. 즉, '[[북벌]]'이란 험악한 이름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 효종은 아버지와 다르게 현실적이고 [[상식]]적으로 [[나라]]를 운영했다는 것이다. 만약 효종이 정말 "청은 우리의 원쑤! 무조건 쳐야 한다"라고 앞뒤 구분 못하는 이상주의자였다면 청나라를 공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효종은 당시 나라 사정이 말이 아닌 조선의 국력을 정확히 평가하고 있었고[*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는 [[송산 전투]]에서 청나라군으로 참전하여 명나라의 병부상서 [[홍승주]]가 항복하는 장면을 직접 보았다. 즉, 청나라군이 단순히 운좋게 만주를 장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군사를 내는 비현실적인 정책은 하지 않았다. 지금에야 "[[명나라]]를 이은 [[중국]]의 왕조"라고 인식하지만, 청나라가 [[한족]]화되면서 이민족과 한족이 공존하는 중화 [[제국]]의 틀을 마련하고 단순히 여진족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닌 다[[민족]]들로 구성된 중국의 [[왕조]]가 되었던 시기는 효종이 죽고 난 18세기의 일이며, 효종 재위기의 청나라는 [[조선인]]들이 보기에는 '대명을 무너뜨린 [[오랑캐]]의 나라'에 불과했다. 더구나 과거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등 한족들의 나라를 위협하거나 아예 무너뜨린 나라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100년 좀 넘는 시간만 버티다 무너졌고 항상 중원은 한족들의 왕조로 되돌아갔다. 당시로서는 청나라 역시 이런 루트를 탈 것이라고 보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1654년 시점 기준으로 [[청나라]]는 불과 건국 40여 년 밖에 안 된 신생강국이였다.] 북벌은 [[문자]] 그대로 '북의 오랑캐를 토벌한다'는 의미보다는 '군사력을 보강하여 가능할 때 북의 오랑캐를 토벌한다'는 의미에 가깝다고 봐야할 것이다. 효종이 '북벌이라는 현실감없는 목표(허울)에 사로잡힌 맹목적 이상주의자'라고 보는 시선은 [[북벌론]]이 [[조선]]과 강대국인 [[청나라]]의 전면전이며 효종이 전면전을 위해 [[군대]]를 키웠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데, 밖으로 내세운 명분이나 효종의 속마음이 어쨌든간에 효종이 10년간 보인 행보를 보면 애초부터 [[청나라]]가 아직 강할 때 그런 전면전을 할 생각이었거나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볼 근거가 없다. 물론 효종이 더 살았다면 진짜 전면전을 했을지 안했을지는 누구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재위 기간 중에 그가 한 것은 전면전 준비가 아닌 군사력 보강과 왜란-호란으로 인한 전후복구 뿐이었고 그가 실제로 청나라와 조선의 전면전을 준비했다고 볼만한 행보는 없다. 일각에서는 당시 [[삼번의 난]]이 벌어지고 [[대만]]에서 [[정경(동녕 왕국)|정성공(정경)]]이 활약한 점을 들어, 삼번의 반란군이 청을 공격하고 바다에서는 정성공 정경의 협조를 받은 상황에서 강습하면 가능했을 거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번은 스스로도 명분이 없는 막장 집단인 데다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이합집산을 거듭했고, 정경도 세력상 한계는 명백했기에 효종으로서는 [[임진왜란|왜란]] - [[병자호란|호란]] 시기의 피해를 복구하고 경제력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서 북벌이 기득권 세력(서인 [[노론]])의 세력 유지를 위한 변명에 가까웠었다는 의견도 있다. [[병자호란]]에 대한 국정 운영 실패를 무조건적인 청 비판으로 몰고 가 효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송시열은 신권 강화를 위해 써먹었다는 것이다. 종합하면 '효종은 애초에 전면전을 할 생각이 없었다'고 단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10년간 보여준 행보로 평가하면 '북벌'을 논할 때 그의 의도가 '강력한 [[청나라]]를 [[조선]]이 단독으로 정벌하는 것'을 의미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효종이 재위에 있었을 때는 중국을 점령한 청나라의 국력이 융성하던 황금기였던건 물론이고,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 시절 청나라 황제는 백전백승의 황제 [[강희제]]였다. 심지어 당대의 청은 과거 명을 정복하는 데 최후의 걸림돌이었던 천혜의 요새인 [[산해관]]을 새로운 방어선으로 갖고 있었으며 화약무기 지식을 흡수한 상황이었다. 조선군이 아무리 강력해졌다 해도 조총병을 잘 이용해 야전이나 만주 일대에서 청군과 맞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거지, 청나라 자체를 정벌하는 건 인적자원과 자금면에서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효종이 사망하자 북벌 계획이 다음 후계자에게 승계되지 못한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연암 [[박지원(실학자)|박지원]]은 [[허생전]] 등을 통해서 이완을 찌질이로 만드는 등 북벌 계획을 맹렬하게 비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