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2b08fab1039d4c743bc6e0e72d39a2d2--faith-bible-spiritual-life.jpg]] [[파일:communitysmiling2.jpg]] [[라틴어]]: Ordo Fratrum Beatissimae Mariae Virginis de Monte Carmelo [[영어]]: Order of the Brothers of the Blessed Virgin Mary of Mount Carmel, Carmelites [목차] == 개요 == {{{+1 Carmelitae }}} {{{+1 O.Carm. }}} > Zelo zelatus sum pro Domino Deo exercituum > 나는 만군의 주 [[야훼|하느님]]을 향한 열정에 불탔노라. 가르멜은 [[지중해]] 연안 [[갈릴래아]] 지방에 있는 해발 546 m짜리 산의 이름으로, '가르멜'이라는 지명은 '비옥한 땅, [[포도]]밭'이라는 뜻이다. 이 산의 이름을 딴 「가르멜 산의 지극히 거룩한 [[성모 마리아|동정 마리아]]의 [[수도회]]」(Ordo Fratrum Beatissimæ Virginis Mariæ de Monte Carmelo, Order of the Brothers of the Blessed Virgin Mary of Mount Carmel)는 엄률관상수도회로서, [[구약성경]]의 대예언자 [[엘리야]]에게 기원을 둔다. 가르멜 수도회는 특정한 창설자가 없다. 가르멜산에 은수자들이 각각 모여들어 살던 것이 가르멜 수도회 조직으로 이어졌다. 이 들은 직접적으로는 아무런 역사적 연관이 없지만, 구약성경에서 가르멜산과 관련되어 언급되는 [[엘리야]]를 상징적인 수도회의 비조로 받들었다. 교회와 사회가 분열로 혼탁했던 12세기 때는 은수생활과 [[성지순례]]로 자신의 죄를 씻으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상당수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소원했고, [[예수 그리스도]]가 생활하고 활동했던 지역을 방문해 자신의 남은 생애를 고독과 청빈, 무욕의 삶을 살려 애썼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당시 성지순례와 탈환을 위해 [[십자군 원정]]에 참가했고, 십자군들은 [[팔레스타인]]까지 이르렀다. 이때 일부 사람들은 가르멜산에 남아 은수자 생활을 시작했다. [[수도회]]의 모습을 갖춘 최초의 공동체는 1150년경 [[엘리야]]와 그의 후예들이 살았던 엘리야 샘 근처에 엘리야의 정신대로 살던 성 벨톨드(Belthold)와 그 주위에 모인 일단의 은수자들이 자신들을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고, 스스로를 「가르멜 산의 지극히 거룩한 동정 마리아의 형제들」이라고 지칭하면서 시작됐다. 1210년 원장 성 부로까르도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성 알베르토에게 규칙을 요청, 작성된 회칙은 1226년 [[교황]] [[호노리오 3세]]와 1245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 인준을 받았다. 그러나 [[사라센]]족의 침입을 피해 가르멜산의 은수자들이 [[유럽]]으로 이주해간 때부터 수도회는 새 국면을 맞았다. 유럽의 생활양식에 순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당시의 총장 성 시몬 스톡은 가르멜 수도회를 다른 탁발수도회에 가깝게 바꾸어놓았다. 이렇게 [[남자]] 가르멜 [[수도자]]들이 하나의 조직된 공동체로 체계가 잡혀갈 무렵, 신심 깊은 [[여자]]들도 함께 모여 공동생활을 해나가다가 1452년 수도회의 부흥에 큰 역할을 한 총장 [[복자]] 요한 소렛이 허가함으로써 여자 가르멜회가 탄생했다. 그러나 [[유럽]]을 휩쓴 [[페스트]] 때문에, 그 당시 거의 모든 [[수도회]]가 겪었던 바와 같이, 가르멜 수도회도 기강이 크게 흔들렸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자유롭게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수도회 주변 지역으로 자유롭게 출입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를 악용해 2인 1조로 민가에 침입해서 주변 여성들을 겁탈하는 수사들도 있었다. [[fuck]] 항목에 수록된 시 Flen Flyys에서 이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때 천주교에서는 매우 유명한 성녀 [[예수의 데레사]][* [[아빌라의 데레사]]라고도 하고, 소화(小花) 데레사([[리지외의 데레사]])와 구분하여 대(大) 데레사라고도 한다.] 성녀가 완전한 [[기도(종교)|기도]]와 고행의 개혁수도회를 창설, 교회쇄신의 전기를 마련하는 한편, 끊임없는 묵상기도를 통해 신비신학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데레사 수녀는 당시 가르멜 수도회가 극기생활이 등한시할 적에, 주변에서 심하게 반대받음에도 불구하고 가르멜 수녀원을 완전한 가난이라는 본래의 엄격함으로 개혁하였다. 데레사 수녀는 끊임없는 묵상기도를 통해 탈혼과 환시를 경험하면서 1562년 초기 가르멜회의 엄격성을 부활시킨 개혁가르멜회인 「맨발의 가르멜수녀회」를 창했다. 1568년에는 [[십자가의 요한]]과 만나 「맨발의 가르멜 남자수도회」를 창설하는 등 20년 동안 [[스페인]] 전역을 여행하면서 남녀 수도원 17곳을 설립했다. 이로써 현재 전세계에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개혁을 따르는 「맨발 가르멜 수도회」와 개혁 이전의 규칙을 따르는 「완화 가르멜 수도회」가 함께 있는데, [[한국]]에 있는 모든 남녀 수도회는 「맨발 가르멜 수도회」에 속한다. 가르멜 수도회는 현재 전세계 126개국에 850여 개 남녀 가르멜 수도원이 있는 국제 수도회로 수녀 1만 1,657명과 수사 4,051명이 있다. 가르멜 정신으로 살고자 하는 여러 활동수도회와 가르멜 영성을 세상 한가운데서 실천하면서 살고 있는 많은 3회원들이 가르멜의 영적 가족으로 유대를 이룬다. == 국내 == * [[http://ocdcarmel.cafe24.com/|가르멜 수도회 성 요셉 한국관구]] * [[http://www.carmis.org|전교 가르멜 수녀회]] 가르멜의 관상과 침묵, 기도의 전통은 1939년 [[프랑스]]에서 온 가르멜 [[수녀]] 3명이 [[서울특별시|서울]] [[혜화동]]에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한국]]으로 전해졌다. 수녀들에 의해 처음으로 한국으로 진출한 가르멜회원들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기도와 출판활동을 하면서 성장해왔다. 또한 [[미사]]에 쓰이는 제병도 가르멜회 수녀들이 만들고 있다. [youtube(Gxn_Jyqk-o4)] ||가르멜회 수녀들이 제병을 만드는 과정|| 당시 서울 가르멜 수녀원은 1955년 [[부산광역시|부산]] 가르멜을, 1975년 [[대전광역시|대전]] 가르멜을 분가시켰으며, 1980년에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 대성당|천진암]] 가르멜 수녀원을 창립분가시켰다. [[대구광역시|대구]] 가르멜 수녀원은 1962년 [[오스트리아]]에서 진출한 가르멜 수녀들에 의해 창립됐으며, 부산 가르멜 수녀원은 1984년 [[경상남도 고성군]] 가르멜 수녀원을, 대전 가르멜 수녀원은 1987년 [[충청북도]] [[충주시]] 가르멜 수녀원을 각각 창립 분가시켰다. 1997년 대구 가르멜 수녀원이 [[경상북도]] [[상주시]] 가르멜 수녀원을 창립 분가하면서 현재 국내에는 모두 8개의 가르멜 수녀원이 있다. 이와 함께 수사들의 한국 진출은 1974년 [[프랑스]] [[아비뇽]] 아끼텐 관구에서 교육을 받은 [[한국인]] 가르멜회원 3명과 [[이탈리아]] [[베네치아]] 관구 요아킴 귀조 신부가 입국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가르멜 수도회는 같은 해 9월 8일 창립[[미사]]를 거행했고, 현재 서울을 비롯해 [[마산]], [[광주광역시|광주]], [[인천]] 등지에서 47명의 회원들이 수도생활을 하고 있다. 또 1948년 [[프랑스인]] [[앙투안 공베르]] 신부에 의해 한국 가르멜[[재속회]]가 발족됐으나 [[한국전쟁]]으로 잠시 중단됐고, 1968년에서야 가르멜회 총장으로부터 인준을 받아 정식 가르멜3회를 발족했다. 이후 전국 곳곳에서 가르멜재속회가 창립됐고, 1991년에는 한국 가르멜 재속연합회가 창립됐다. 현재 국내에는 3천여명 이상의 재속회원들이 있으며, [[미국]] [[LA]], [[뉴욕]], [[워싱턴 DC]]에서도 재속회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다. [[2021년]] [[10월]] 가르멜회의 [[정순택]] 베드로 주교가 대주교 승품과 동시에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되어 동년 12월 8일 주교좌에 착좌하였다. 한국 가르멜회 수도자로서는 최초의 주교이자 천주교 서울대교구 최초의 수도회 출신 교구장이 된다. [[분류:가르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