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2> {{{#ece5b6 '''{{{+1 남송의 명장[br]{{{+1 賈涉 | 가섭}}}}}}'''}}} || || '''{{{#fff 이름}}}''' ||<(> 가섭(賈涉) || || '''{{{#fff 자}}}''' ||<(> 제천(濟川) || || '''{{{#fff 생몰}}}''' ||<(> 1178년 ~ 1223년(향년 45세) || || '''{{{#fff 출신}}}''' ||<(> 태주(台州) 천태현(天台縣) || || '''[[국적|{{{#fff 국적}}}]]''' ||<(> 남송(南宋) || || '''[[주군|{{{#fff 주군}}}]]''' ||<(> [[영종(남송)]] || || '''{{{#fff 부친}}}''' ||<(> 가위(賈偉) || || '''{{{#fff 아들}}}''' ||<(> [[가사도]](賈似道) || [clearfix] == 개요 == 중국 [[남송]] 후기 항금명장으로 [[맹공]]의 부친 맹종정, 호재흥과 당대 최고의 [[명장]]중 하나였으며, 남송 말기 재상 [[가사도]]의 아버지이다. 자는 제천(濟川). 산동 지역의 반군들과 연계하며 중원을 수복하고자 하였다. == 생애 == === 초기 일생 === 태주(台州) 천태현(天台縣) 출신으로 가위(賈偉)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고서를 읽는 것을 좋아하였고 강개하였으며 큰 뜻을 품고 있었다. 가섭은 처음에 고우현위(高郵縣尉)를 맡았고 만안현승(萬安縣丞)으로 전임되었다.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명령 아래에 글공부와 독서 무예실력을 특화시켰고 20살인[* 이 시기 가섭의 아버지 가위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가섭은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려고 했고 10년 간의 노력 끝에 결국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는 데 성공했음] 영종황제 4년에 황제가 주관하는 전시를 보고 2등으로 현위로 진출을 하려하였으나 영종 연간에 들어서 [[금나라]]가 계속해서 침공을 하는것을 보고 금나라군을 멸하겠다는 생각에 무과 시험으로 전환을 하여 1등으로 합격하여 국경 마을에 있는 군대 사령관이 되어 금나라군을 막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러차례 금나라군과 전투를 하면서 좋은 동료 명장 2명을 만났는데 한명은 앞서 언급했던 맹공의 부친 맹종정이였고 또다른 한명은 호재흥이였다. 그렇게 이셋은 합동하면서 금나라를 막아냈고 [[개희북벌]] 때도 재상이었던 [[한탁주]]의 병크짓을 막아내고 성과를 내어 순식간에 선무사라는 지위까지 셋이 같이 승진하였다. === 금군 방어 및 산동 반군과의 연계 === 그렇게 지내던 도중 1211년 [[몽골제국]]이 금나라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금나라가 몽골군에게 시달리자 이에 사미원이 정권을 잡고 있던 남송은 금에 보내는 세폐를 중단하고자 하였고 남송은 세폐를 중단했다.[* [[진덕수]]가 이를 영종에게 건의하였다.] 이에 1217년 금나라 선종 완안순이 이에 분노하여 남송에 선전포고한 것이다.[* 이때 사미원은 금나라에 대한 정책을 바꾸어 영종에게 조벌을 청하고 적극적으로 귀북인을 불러들여 '충의군'을 창설하였는데, 1218년 1월 정식으로 귀순한 의군의 영수 이전을 경동로 부총관으로 임명하고, 양우, 계선을 경동로 감할 33으로 하여 송정과 응순의 후한 상과 지지로 남하하는 인파가 끊이지 않았고, 이로써 의군의 항금 활동이 더욱 활발하여 기세가 높아져 송금전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때 금나라도 내우외환의 국면에 놓여 백성들은 먹을 것이 부족했고, 많은 사람들이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산둥 지방에서는 금나라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생겼고[* 대표적으로 이전, 양안아와 유이조], 남송 영종 조확은 이들을 모집하여 군량미 등을 하사하였다. 그럼에도 1218년 사주 전투에서 패배하고 송군은 전멸했는데 이때 남송 영종은 야망을 가지기 무섭게 멸망했으니 신하들은 화해를 의논했다. 하지만 그 충의군들은 화해를 원하는 관리들을 죽였다. 결정적인 순간에 현령인 가섭은 즉시 서신을 올려 화해를 원한다면 충의군의 보복을 받게 될 것이며, 그때가 되면 남송에 적이 하나 더 생길 것이라고 말하였고 그들을 일군으로 만들어 회북에 배치하여 고수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였다. 육신이 주인 없는 남송 영종은 그를 서둘러 지초주로 발탁하여 충의군을 받아들였다. 이후 가섭이 직접 나서서 의군들에게 성지를 전하며 달래자 의군들은 일제히 승복했다. 그러곤 군을 감축해 정예병 5만 명을 남겨 군량과 군비를 아낄 수 있었다.1219년 10만 명의 금군이 들이닥치자 조정은 공포에 떨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가섭은 그 충의군들을 각지로 나누어 송군과 함께 금군에 대항하였다. 바로 가섭의 계략 아래 이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고, 금군은 놀라서 도망쳤고, 가섭은 회동제치사의 공적인 일에 발탁되어 중신이 되었다. 이후 가섭은 작은 은혜에 의지하여 더 많은 봉기군을 남송의 대열에 합류시켰고, 이 기간 동안 태항산 동쪽 지역은 남송의 강토에 편입되었다. 의군의 북벌전을 독려하며 전과를 올리면 작위를 받을 수 있다고도 했다.[* 예를 들어 이전의 군대는 하북 지역에 침입하여 대명과 중산 등지를 수복했다.] 이러한 유혹에 이끌려 의군은 자주 출동하여 많은 영토를 탈환하는 등 전적이 눈부셨다.1221년 금나라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회서로 진입하자 가섭은 많은 장수를 보내 지원했으나 두목이 도망치는 바람에 행군 속도가 느려져 회서가 위태로워졌다.가섭이 도망친 장수를 죽여 의군의 감동이 컸고, 너도나도 적을 죽이고 승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과정에서 산동 지역의 충의군들과 연계하여, 중원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가섭은 그 과정에서 북벌과 구원을 책동하는 한편 몽골과의 연계도 추진했다.[* 산동 지방이 송과 금, 몽골 삼국의 주전이 되자 삼국 분쟁에 휘말린 의군은 복잡해지는 경향을 보였고, 특히 몽골은 하삭, 산동 등지에서 살육을 멈추고 적극적으로 근거지를 지키려는 호걸과 금나라 조정을 무력으로 개조하여 산동 무장세력을 쟁취한 이후, 이전이 이끄는 부대는 송과 금, 몽골 양국에 투항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는 산동 반군 수령 중 하나인 [[이전(몽골)|이전]][* 이전은 나중에 남송을 침범하다가 남송의 조범과 조규 형제에게 격퇴당하였다.] 문제로 쓰러졌다. 당시 재상이었던 사미원은 이전에게 큰 상을 내리는 방식을 취했지만[* 정세를 안정시키고 조정과 충의군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명목으로 이전을 후하게 포상했다.], 가섭은 이전이 모반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경계하여 사미원에게 그 중요성을 설명했지만 무시당하였고, 이전이 반란을 일으키면 오랫동안 이끌던 의군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는 생각에 그는 중병을 앓았다. 금군이 쳐들어오자 병을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출전해 귀순한 금나라 장수를 기용함으로써 승전하였다. 1223년 과로로 사망하여 용도각(龍圖閣) 학사·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증되었다. === 기타 === 1212년 그는 전당현의 호씨 부녀자들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였고 이후 계속해서 프로포즈와 고백을 하였는데도 가섭이 못생겼다는 이유로 호씨 부녀자가 고백을 거절하자 가섭은 부하를 시켜 납치를 하였고 강제를 첩을 맺고 자신의 집에서 몇십차례 강제로 성관계를 하였다. 그렇게 낳은 아이가 바로 [[가사도]]이다. [* 훗날 희대의 병크짓을 터트릴 인물이자 권신이었다.][* 가사도의 일생 중 하나인 악주 화약에 관해서는 중국 사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다고 한다.] == 송사의 논찬 == >가섭(賈涉)은 자신의 방면에서 역시 자신의 재능을 일컬었지만, 가섭의 [[가사도|서얼]]에 이르러 결국 망국에 이르렀으니, 한탄스럽도다. >---- >『[[송사]](宋史)』, 권403의 논찬 후대 [[원나라]]에서 편찬한 사서인 [[송사]]에서는 가섭에 대해 가섭의 재능을 긍정하면서도 가사도의 행적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있다. 가섭 본인은 [[금나라]]에 대항한 명장이지만 그 아들 [[가사도]][* 《송사》에는 간신이라고 욕먹고 있으나 맹공이 죽기 1년 전 [[맹공]]에게 자신의 후임 [[경호제치사]][* 형호 방어를 주관하는 사령관 직책]로 추천받고 [[악주 전투]]에서는 쿠빌라이에게도 극찬을 받았고[* 가사도가 악주를 수비하면서 하루아침에 목책을 만들었다.] 염희헌이 악주 전투 당시 쿠빌라이가 가사도를 칭찬했다고 말한 기록이 있었다. 또 가사도 때문에 투항했다고 하는 남송의 항장들에게 쿠빌라이가 가사도를 치켜세운 건 아이러니하다.][* 아무래도 《송사》가 원대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가사도를 간신으로 깎아내리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그 공적이 묻히고 말았다. [[분류:1178년 출생]][[분류:1223년 사망]][[분류:송나라/인물]][[분류:타이저우시(저장성)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