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스페인 서부의 행정구역이자 역사적 지역, rd1=갈리시아)] [목차] '''[[우크라이나어]]: Галичина (할리치나)''' '''[[폴란드어]]: Galicja (갈리치아)''' [[독일어]]: Galizien (갈리치엔) [[러시아어]]: Галиция (갈리치야) [[영어]]: Galicia[* 참고로 스페인의 [[갈리시아]]와 스펠링이 같다. 그래서 '갈리시아'라고도 부른다. [[키릴 문자]]로는 'ㅊ' 발음이 나는 문자로 표기하기 때문에 갈리치아라고 부른다.] [[파일:갈리치아 지도.png]] == 개요 == [[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남부를 이르는 역사적 명칭. 중심도시로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르비우]]와 폴란드 [[제2의 도시]] [[크라쿠프]]가 있다. 갈리치아라는 이름은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에 위치한 중세 도시인 할리치(Галич)[* [[폴란드어]]로는 Halicz(할리치)]에서 파생되었다. 지역의 행정 중심지가 르비우로 이전된 후 할리치는 점점 쇠락해 오늘날에는 인구 6,000여명 규모의 마을로 남아 있다. == 갈리치아 동부 (우크라이나령 갈리치아) == [include(틀:우크라이나 관련 문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Ukraine-Halychyna.png]] 전통적 의미의 갈리치아에 가까운 지역으로 오늘날 [[르비우주]], [[테르노필주]],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에 해당되며 [[루테니아#s-2|적 루테니아]]에 포함되는 이 지역은 [[키예프 루스]]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키예프 루스]]가 분열될 때 갈리치아 공국이 들어섰고 주변의 볼히니아 공국과 합쳐져서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이 성립되었다. 이후 잠시 [[루테니아 왕국]]이라는 타이틀도 획득한다.[* 중세 유럽에서 왕위는 [[교황]]만이 수여 가능한 것으로서 루테니아는 [[가톨릭]]이 아닌 [[정교회]]였지만 루테니아 왕국의 다닐로 왕이 가톨릭과 힘을 합쳐 [[몽골 제국]]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자 당시 교황이 힘을 더해주기 위한 차원에서 왕위를 승인해 준 것.] 그러나 왕위가 끊겨 [[볼히니아]]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갈리치아는 [[폴란드 왕국]]이 각기 지배하다가 두 나라가 [[폴란드-리투아니아]]로 합쳐져서 같이 지배를 받았으나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 때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이 되어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넘어갔다.[* 볼히니아는 [[러시아 제국]]으로 넘어갔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브루실로프 공세]]의 무대였으며 이후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다시 [[폴란드 제2공화국|신생 폴란드 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갈리치아 동부 지역의 [[우크라이나인]]은 인구의 12%를 차지하는 당시 폴란드 최대의 소수민족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나치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 침공]]으로 폴란드를 다시 갈라먹으면서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소련 [[우크라이나 SSR]] 치하로 들어가면서 우크라이나로 편입된 갈리치아 동부 대부분 지역의 [[폴란드인]]들은[* 전쟁 전에는 르부프 주 인구의 57%, 타르노폴 주 인구의 50%, 스타니스와부프 주 인구의 23%를 차지했다.] [[오데르 강]] 인근의 [[포메른]]과 [[슐레지엔]] 등 새로 편입된 폴란드 영토로 추방되었다. 다만 지금도 동갈리치아의 최서단지역[* 프셰미실 일대]은 폴란드 영토이기는 하다. [[소련 붕괴]] 후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확정되었다. 이 지역은 [[소련]]의 어떤 다른 지역보다도 러시아계 국가와 낯선 지역이다. 하다못해 [[발트 3국]]도 양차대전 사이 독립국이긴 했어도 이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갈리치아 지역은 이전까지 줄곧 중·동부유럽 가톨릭 세력의 지배만 받아 오다가 소련에 편입되었다. [[1991년 소련 국민투표]]에서도 과반수가 찬성한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방[* [[키이우]] 시(찬성률 44.6%) 제외.]들과는 달리 갈리치아 3주는 찬성률이 20%도 안 되었다.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포함), [[폴란드 제2공화국]]의 지배를 받았다 보니 [[동방 가톨릭 교회]]([[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자가 많다. 이 점은 우크라이나 타지역에서 주로 [[정교회]]를 믿는 것과는 대조된다. 비교적 자유주의적이고 관용적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 일대를 다스렸던 시절 폴란드인이나 우크라이나인이나 어느 정도 자치를 누리고, 민족주의 정당 및 단체 설립과 민족주의적 언어, 문화적 교육 같은 것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던 덕분에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폴란드 민족주의자'''들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 양쪽 모두 이 일대를 근거지로 하며 활동했다. 오늘날 이 지역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민족주의]] 열풍이 심한 지역으로[* 주로 반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그러나 반폴란드 감정도 만만찮은데 20세기가 되기 전만 해도 [[귀족]], [[지주]]는 [[폴란드인]]이, [[의사]] 같은 전문직은 [[유대인]]이 다 해먹고 당시에는 주로 루테니아인이라 불렸던 이곳의 우크라이나인은 피지배층이었기 때문. 나치가 갈리치아를 점령하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나치에 협력해 유대인과 폴란드인을 때려잡았다. 물론 우크라이나인들 역시 나치에게 학살당했지만..] [[유로마이단]] 때의 핵심 지지 지역이었다. 참고로 폴란드도 갈리치아 서부 지역에 속하는 동남부 마워폴스카 지역이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다. === 주요 지역 === * [[르비우주]] * [[르비우]](Львів) - 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의 주요 도시이다. 폴란드어로는 르부프(Lwów), 러시아어로는 리보프(Львов), 독일어로는 렘베르크(Lemberg)로 읽는다. * [[테르노필주]] * [[테르노필]](Тернопіль): 폴란드어로는 타르노폴(Tarnopol), 러시아어로는 테르노폴(Тернополь)로 읽는다. *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 * [[이바노프란키우스크]](Івано-Франківськ): 원래 이름은 폴란드어인 스타니스와부프(Stanisławów)로 17세기 폴란드의 헤트만이었던 스타니스와프 포토츠키(Stanisław "Rewera" Potocki, 혹은 그의 손자)의 이름을 따 건설되었다. 독일어로는 스타니슬라우(Stanislau). 1962년부터 우크라이나의 시인 [[이반 프란코]]의 이름을 따 현재 이름으로 바뀌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갈리시아, version=71, paragraph=2)] == 갈리치아 서부 (폴란드령 갈리치아) == 폴란드령 갈리치아 대부분[* 전통적 갈리치아의 최서단 지역이 폴란드령으로 편입되었다.]은 엄밀히 말하면 전통적 의미의 갈리치아가 아니었지만 오스트리아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영역으로 편입시켜서 갈리치아에 포함된 지역이다. 이 지역은 소폴란드([[마워폴스카]]) 지역이라고도 하며[* 대폴란드([[비엘코폴스카]]) 지역은 초기 폴란드의 중심지였던 [[포즈난]], [[그니에즈노]] 일대. 이 지역에서 피아스트 왕조 초대 군주 [[미에슈코 1세]]에 의해 역사에 처음으로 [[폴란드 영지|폴란드 국가]]가 들어섰다.] 폴란드에게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크라쿠프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왕위 계승 분쟁으로 원래 수도였던 포즈난이 파괴되자 카지미에시 1세가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폴란드 왕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596년에 [[지그문트 3세]]가 폴란드의 수도를 [[바르샤바]]로 [[천도]]하기 전까지 수도권으로서 황금기를 누렸다. 근동과 동유럽, 중부유럽, 서유럽의 무역로 중심에 위치하였던 마워폴스카는 크라쿠프를 중심으로 예술, 과학 분야의 신문물을 접할 수 있던 발전된 지역이었다. [[중세]] 시절에는 소금이 귀해서, 이 지역의 비엘리츠카 소금 광산은 이 지역의 황금기에 이바지하였다. 이렇게 확장해 나간 폴란드 왕국은 위의 갈리치아 동부까지 영향력을 확장하였고 [[리투아니아 대공국]]과도 연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라는 이름으로 동유럽의 패자가 되었지만 후에 찾아온 [[대홍수(역사)|대홍수]]와 [[폴란드 분할]]로 [[합스부르크 제국]]이 차지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로서 갈리치아는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으로 편입되었으며, 크라쿠프는 예외적으로 [[크라쿠프 자유시]]라는 부분적으로 독립된 보호시[* 크라쿠프 자유시도 실패한 봉기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인 [[크라쿠프 대공국]]으로서 편입되었다]로 남았다. 오스트리아 치하의 갈리치아도 다른 유럽 열강들과 같이 [[1848년 혁명]] 이전까지는 심각하게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탄압받았으나 1848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이 재편되면서 [[보헤미아 왕국]]과 갈리치아도 함께 부분적인 자치를 인정받아서 폴란드를 분할한 다른 열강인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 치하의 폴란드에 비해 자유로웠고 문화적인 탄압도 적었기에 19세기 후반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이 지역을 근거지로 활동했다. 정부와 의회, 학교 등에서 [[폴란드어]]의 사용이 허가되었고 갈리치아 지역은 나라없는 폴란드 민족의 문화 및 예술적 중심지로서 기능하였다.[* 대신 경제적으로는 굉장히 어려웠기에 갈리치아의 농민들은 돈을 벌기 위해 [[포젠]]이나 [[프리비슬린스키|러시아령 폴란드]]로 떠나는 일이 많았다. 반대로 포젠이나 러시아령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갈리치아로 이주하는 일이 많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폴란드의 독립에 이바지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도 합스부르크 왕조의 묵인 하에 크라쿠프에 군사학교를 두고 세력을 불렸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가 이 지역으로 침공하기도 하였으나 갈리치아 동부 지역과는 달리 이 지역에서 러시아군은 손쉽게 밀려났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망하자 갈리치아는 [[폴란드 제2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전간기 당시 크라쿠프는 바르샤바, 포즈난, 르부프, [[빌뉴스|빌노]] 등과 더불어 폴란드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서 기능하였고 신생 폴란드의 문화 예술적 중심지로서 대우받았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자 [[폴란드 총독부]]의 치하에 들어갔으며 폴란드 다른 지역들과 같이 [[홀로코스트]]와 폴란드인의 강제노동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 악명높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도 이 지역에 위치했다. 전후 [[폴란드 인민 공화국]] 치하에서 폴란드에서 가장 큰 제철소가 크라쿠프 외곽에 들어섰고 이와 함께 공업화가 진행되었다. 이와 함께 공업지대와 함께 노바 후타(Nowa Huta)라는 소련식 계획도시도 세워졌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의 경제력 향상과 인구 증가를 겪기도 하였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크라쿠프, version=183)] == 신갈리치아 (서갈리치아) == [[폴란드 분할]]과 [[빈 회의]] 사이 위의 갈리치아를 제외한 오스트리아령 폴란드를 일컫는다. 다만 폴란드 분할 이후 얼마 안가 이 지역은 [[나폴레옹]]의 [[바르샤바 공국]]으로 넘어가고 이후 [[빈 회의]]에서 [[러시아령 폴란드]]로 넘어갔으며 그 뒤로 이 지명이 쓰이지 않게 되었기에 큰 비중은 없다. 프로이센이 폴란드를 분할하며 원래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땅이었던 곳에 남프로이센, 신동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서갈리치아와 같은 이유로 얼마 안가 쓰이지 않게 된 것과 같다. [[분류:유럽의 지명]][[분류:우크라이나의 지리]][[분류:폴란드의 지리]][[분류:마워폴스키에]][[분류:폴란드-우크라이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