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신라 국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4a2d5b 20%, #4a2d5b 80%, #3A2646)" {{{#FBE673 '''경순왕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접기 ] ---- [include(틀:신라의 왕자/태종 무열왕 ~ 경순왕)] ---- [include(틀:후삼국시대 군주)] ---- [include(틀:고려의 제후왕)] ---- [include(틀:후삼국시대 호족들)] ---- [include(틀:한국신화의 신들)]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고려 제후왕[br]{{{+1 낙랑왕 | 樂浪王}}}'''}}}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0%,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신라 제56대 국왕[br]{{{+1 경순왕 | 敬順王}}}'''}}}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209146_73557_5151.jpg|width=100%]]}}} || ||<-2> {{{#fbe673 {{{-2 고려 초에 제작된 경순왕 어진[* 정확히 말하면 현재 존재하는 어진은 고려 초의 원본을 베낀 것이다. 2007년에 5점의 어진이 존재함을 확인했다.[[http://news.donga.com/Culture/3/07/20100602/28785354/1|기사]]]}}} }}} || ||<|2> '''출생''' ||[[897년]][* 《[[삼국사절요]]》에 따르면 [[김효종(신라)|김효종]]과 김계아의 혼인 시점은 897년이므로, 경순왕은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어났을 것이다. 이 영향인지 족보류에는 897년에 태어났다고 [[http://unyangkim.or.kr/50|기]][[http://www.boeuni.com/news/articleView.html?idxno=28049|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등 더 이른 연대의 사서에는 정확한 탄생 연도가 기재되어 있지 않으며, 897년이라는 시점은 수백 년이 지난 [[조선]] 시대의 《[[삼국사절요]]》 편찬자와 족보 편찬자들이 임의로 [[진성여왕]](제51대)의 말년에 비정한 것이므로 섣불리 신뢰해서는 안 된다.] || ||[[신라/후삼국시대|신라]] [[서라벌|금성]][br](현 [[경상북도]] [[경주시]]) || ||<|2> '''퇴위''' ||[[936년]] [[1월 8일]][* 음력 [[935년]] [[12월 12일]]][* 《[[https://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types=r#detail-kingYear/kr_002r_0050_0060_0020/1/0935/12|고려사]]》 기록.] || ||[[고려]] [[개성시|개경 개주]] [[만월대|정궁]] 천덕전[br](현 [[경기도]] [[개성시]]) || ||<|2> '''사망''' ||[[978년]] [[5월 13일]][* 음력 [[4월 4일]]][* 978년 4월까지는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levelId=kr_002_0600_0010_0010|고려사》 <경종 세가>]]에 기록되어 있으나,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4일이라는 기록은 경순왕이 죽고 약 900년이 지난 조선 [[영조]] 때 경기도 연천 장남면에 세운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70495|신라 경순왕의 릉(新羅敬順王之陵) 묘비]]에만 전해지므로, 신빙성은 높지 않다. 양력으로 계산하면 978년 5월 13일에 사망한 것이 된다.] (향년 81세) || ||[[고려]] [[개성시|개경]] 추정[br](현 [[경기도]] [[개성시]]) || || '''능묘''' ||[[경순왕릉]](敬順王陵) || ||<|4> '''재위기간''' ||'''{{{#fbe673 제56대 국왕}}}''' || ||[[927년]] 음력 [[11월]] ~ [[936년]] [[1월 8일]][* 음력 935년 12월 12일] {{{-2 (8년)}}} || ||'''{{{#670000 고려 제후왕}}}''' || ||[[936년]] 음력 [[1월]] ~ [[978년]] [[5월 13일]][* 음력 4월 4일] {{{-2 (42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경주 김씨]] || || '''휘''' ||부(傅) || || '''부모''' ||부왕 [[김효종(신라)|신흥왕]][br]모후 [[계아태후]] || || '''왕후''' ||[[죽방부인]][*A 《[[고려사]]》에 "羅王'''太后'''竹房夫人"이라고 쓰여있기 때문에 죽방부인은 [[태후]], 즉 경순왕의 모후(母后: 군주의 어머니) 또는 전대 군주의 [[아내]]이지 경순왕의 아내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 《고려사》를 오역함에 따라 비롯된 결과라는 설도 있는데, 조선 제5대 문종 1년에 완성된 《[[고려사]]》는 고려를 기준으로 신라 경순왕을 선대 군주로 보고, 그의 왕후인 죽방부인은 경순왕의 태후(太后)라 기록했다고 해석했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문종은 경순왕의 후손이 아닌 것은 물론 신라와 고려는 아예 다른 나라여서 경순왕의 아내를 태후라고 부를 위치가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왕비로서의 기록이 나타난 것은 조선 말기 세워진 신라경순왕전비부터이고, '죽방'(竹房)이라는 명칭은 인명이 아닌 "대나무 방" 정도의 의미로, 신라시대 관서 중 '방'(房)은 주로 여관이 근무하던 곳을 부르던 명칭이었고, 여성 인명을 사서에 표기하지 않게 된 고려시대의 특징을 고려하면 그녀가 기거하는 공간을 뜻하는 명칭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굳이 현 군주의 생모가 아니어도 전임 군주의 아내가 '태후'라는 명칭을 쓴 흔적도 《삼국사기》에서 발견된다.][br][[낙랑공주(고려)|낙랑공주 왕씨]][* '신라경순왕전비'는 죽방부인을 전비(前妃), 낙랑공주를 후비(後妃)라 적었다.][br]부인 왕씨 || || '''자녀''' ||태자 [[마의태자]][* 부안 김씨(장남 김기로 계열)와 통천 김씨(차남 김교 계열)에서 시조로 모시고 있음.][br]왕자 [[범공]] 김덕지[* 김덕지는 [[1561년]] 고암 양자징이 찬한 후손 하서 [[김인후]]의 <가장>에 경순왕의 왕자로 기록하고 있다. [[울산 김씨]]의 시조.][br]딸 [[헌숙왕후]] || || '''종교''' ||[[불교]] || || '''신장''' ||약 160cm 이상 추정[* [[파일:external/thimg.todayhumor.co.kr/1435390697D5k1KLiJRzqMeYmNrlEx7.jpg|width=150]][br]영특한 기상을 지녔다는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y&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y_002r_0010_0190_0060&position=-1|기록]]과 [[어진]]에 나온 [[시녀]]와 [[신하]]의 키가 신라인 평균 키인 [[http://www.whabaeg.com/news/articleView.html?idxno=3420|160cm]]라고 가정하면, 어진 속 경순왕이 주위의 시녀와 신하보다 크게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실제 체격을 토대로 그린 것일 경우 및 영특한 기상을 지녔다고하니 경순왕의 키는 약 160cm 이상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에 대한 기록을 몰라도 후자의 경우는 고구려 벽화 등의 예로 보아 고대의 그림에서 인물의 키는 실제 신장이 아니라 신분의 고하를 반영하였다고 봄이 더 타당하므로, 경순왕의 신장에 대해 속단할 수 없다.] || ||<|2> '''시호''' ||'''경순대왕(敬順大王)'''[* [[http://www.bbggnews.com/news/2543|#]]] || ||'''효애대왕(孝哀大王)'''[* 《삼국사기》 기록.] || || '''별호''' ||김부대왕(金傅大王)[* 《삼국유사》 기록.] || || '''골품''' ||[[진골]](真骨) || || '''작위''' ||'''낙랑왕(樂浪王)[* 《삼국유사》: 낙랑군왕.]'''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순왕릉 묘비 후면.jpg|width=100%]]}}} || || {{{#FBE673 '''경순왕릉 묘비'''}}} || [목차] [clearfix] == 개요 == >'''王曰: 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 >임금이 말하였다. "고립되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서 더는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또한 약해질 수도 없으니 무고한 백성들의 [[간뇌도지|간과 뇌가 길에 떨어지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 >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김부대왕- 신라 왕실과 조정에서 고려에 귀부를 논의하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1&totalCount=1&itemId=sy&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0&levelId=sy_002_0010_0190_0030|#]] [[신라]]의 제56대 [[군주]]이자 마지막 [[임금]]. 휘는 부(傅), [[시호]]는 경순(敬順). == [[경순왕/생애|생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경순왕/생애)] 927년 11월,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수도 [[경주시|금성]]을 기습 침략하여 [[경애왕]] 박위응을 살해하고, 경애왕의 이종사촌 형제인 김부(金傅)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경순왕이다. 재위 기간은 927년부터 935년까지 8년간이다. 935년 12월(양력 936년 1월),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 후 경순왕은 '정승공'(正承公)에 봉해지고, [[지위]]가 고려의 [[태자]]보다 높았으며, [[녹봉]]으로 [[쌀]] 1,000석을 받고 신란궁(神鸞宮)을 하사받았다. 고려는 신라국을 폐지하여 [[경주시|경주]](慶州)라 하고, 경주 지역을 [[식읍]]으로 주면서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했다. 975년 제5대 [[경종(고려)|경종]](景宗)은 정승공 김부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장인이 된 그의 관작을 '[[상부|상보]]'(尙父)로 삼았으며, '''관광순화위국공신(觀光順化衛國功臣)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 [[정승]](政承)'''에 봉하고, 식읍 8,000호를 지급하는 조서를 내렸다. 978년 음력 4월 사망했으며, [[시호]]를 '경순'(敬順) 또는 '효애'(孝哀)라 했다. == [[경순왕/가계|가족 관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경순왕/가계)] == 평가 == [[신라]]의 마지막 임금으로서 무의미한 저항을 펼쳐 백성들을 희생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충분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한 임금이며, 나라에 망조가 든 것은 결코 경순왕 본인의 책임이 아니었다. 여기서 "무의미한 저항"이란 곧 [[고려]]에 대한 저항이었지, [[후백제]]에 대한 저항은 아니었다. 자신들을 어떻게든 집어삼키려 했던 후백제에게는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저항하면서 귀순 전까지 버텨냈다.[* 후백제가 신라를 작정하고 삼키려고 했으면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처럼 분전하거나, 못해도 고려로 일단 망명한 이후 후백제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을 가능성이 높다. 콘스탄티누스 11세의 경우 순순히 항복하고 도시를 넘긴다면 목숨을 보존해 주는 것은 물론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총독으로 삼는 등 후대하겠노라는 오스만 측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고, 제국과 운명을 함께했다.] [[경애왕]] 시대에는 적어도 영남 동부에 대해선 지배력이 미치고 있었고, 진흥왕(제24대)과 문무왕(제30대) 때부터 역사가 내려오는 서라벌 방어 6기정들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러나 서라벌 함락 사건으로 이 부대들은 거진 해체 국면에 들어갔을 개연성이 크며, 영남 일대 잔존 호족들은 후백제군에게 초토화되거나 고려에게 귀부하고 말았다. 그러니 경순왕 입장에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최선을 다하였다. [[고려]]와 연합해서 후백제를 저지했던 것이나, 경애왕 때 병장기 만드는 시설과 숙련된 군인까지 통째로 날려버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병력을 육성하여 고려와 연합해 후백제를 막아낸 걸 보면 확실히 조직력과 운영 능력 그리고 군사적 수완은 보통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즉, 견훤이 계획적으로 해체한 서라벌 방어 부대들을 어떻게든 가능한 선에서 다시 조직해냈다는 뜻이다. 고려에 투항할 때도 그나마 신라 왕실이 가장 가치가 높을 시점을 골라 투항했고, 이걸 보면 외교적인 안목 또한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왕건은 강릉 쪽으로 진출할 길목에 고려 부대들을 박아두었는데, 이는 경순왕을 경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다방면에서 잠재력을 보여준 경순왕은 후한의 [[헌제]]나 고려의 [[공양왕]]과도 같이 열심히 노력은 해봤으나 결국 한계로 말미암아 망국을 피할 수 없었던 사례라 할 수 있으며, 때를 잘 만났다면 신라를 다시 일으켰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은 근거 없는 상상만은 아니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사]]를 통틀어서 망국의 군주들 중에서는 그나마 무탈한 여생을 보냈다. 신하들에게 [[시해]]당한 [[위만조선]]의 [[우거왕]]이나 전쟁터에서 살해당한 [[부여|동부여]]의 [[대소왕]], 패망한 후 [[당나라]]로 끌려가 [[북망산|그곳에서 최후를 맞은]] 고구려의 [[보장왕]]과 백제의 [[의자왕]] · [[풍왕]], [[요나라]]로 끌려간 뒤 이후 역사적 기록에서 아예 사라져버린 [[발해]]의 [[대인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기록된 [[태봉]]의 [[궁예]]와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 가능성이 매우 유력한 것으로 점쳐지는 후백제의 [[견신검|신검]][* 《삼국사기》에는 신검을 부추겼던 [[능환]] 등은 곧바로 처형되고 신검의 동생인 [[견용검]], [[견양검]]은 강주로 유배갔다가 몇 년 뒤 처형되었지만 신검은 다른 사람들의 강압에 의해 임금이 된 것이라 하여 벌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관직을 하사했다고 나와있다. 이로 인해서 화병이 난 견훤이 사망했다는 기록은 덤. 다만 학계에서는 이후 신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점과 신검을 살려둘 경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숙청]]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실제로도 고려사 말미에 세 형제 모두가 고려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이설이 있다고 기록하면서 은연 중에 숙청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태조 왕건]]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신검이 벌판 어딘가에서 처형당해 죽는 영상과 더불어 나레이션으로 기록되지 않게 적당한 시기에 죽였을 거라고 언급하며, 최종 방영본에서는 잘렸지만 대본에는 신검 삼형제를 모두 제거하라는 왕건의 대사가 있다.], 유배지 [[삼척시|삼척]]에서 사사당한 데다가 [[왕씨 몰살|자신의 일족들까지 학살당한]] 고려의 [[공양왕]], 그리고 [[이왕|비록 본인은 편안한 여생을 보내기는 했어도]] 이민족 일본에게 무기력하게 나라를 빼앗기는 걸 지켜봐야 했던 [[대한제국]]의 [[순종(대한제국)|순종]] 등과 대비해보면 더욱 그렇다. 일족이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어 [[김세종|자]][[김무력|식]]들과 [[김서현(신라)|손자]]도 신라의 중신을 지냈으며 [[김유신|증손자]]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는 영웅이자 신라왕실의 [[외척]]이 된 [[금관가야]]의 [[구형왕]] 및 그래도 목숨과 어느 정도 세력을 부지한 채 달아나 다시 [[마한]]의 [[건마국]]에서 군주를 한 [[단군조선]]의 [[준왕]] 정도가 그나마 그와 비견될 만할 듯하다.[* 다만 [[패서]] 호족들이 전반적으로 신라 왕실에 우호적이었던 건 [[안승]]의 사례와는 무관하다. 안승의 [[보덕국]]은 신라에 포함되었다곤 하나 반란을 일으킨 탓에 진압되어 [[서라벌]], [[익산]] 이남 옛 백제 고지 분산 배치 탓에 정체성을 잃어버렸고 이후에 이들이 패서계 호족과 연락을 취한 사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보덕국 흡수를 신라 왕실이 고구려 흡수의 명분으로 나름 내세웠을 개연성은 있는 것과 이 사항은 별도다.] == [[경순왕릉]]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경순왕릉)] == 대중매체에서 == 경순왕의 정확한 출생일은 불명이지만 신라 왕 재위 시점에는 20대~30대 정도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왕위]] 계승권 1순위인 [[김(성씨)|김씨]]라는 설정 때문인지 대중매체에서 중노년의 나이로 묘사되는 [[창작물의 반영 오류|재현 오류]]가 자주 일어난다. [[파일:경순찡.png]] *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배우 [[신귀식]][*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유정현]] 역,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는 [[김윤환(1932)|김윤환]] 역.]이 연기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버티려고 해도 하도 심각한 상황이라 결국 나라를 [[고려]]에 바친 군주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견훤(태조 왕건)|견훤]]의 [[경주시|서라벌]] 침공 때 견훤을 도와준 신라의 [[유염#s-2]]과 김응겸이 "김씨 왕가의 가장 큰 어른이다"라며 그를 새 왕으로 권하였고 마지못해 따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견훤은 대체 김씨는 뭐를 하길래 박씨가 왕이 되어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도록 놔뒀냐고 갈궜는데 견훤과 내통했던 유염과 김응겸이 욕심없고 유순한 분이라 그렇다며 변호하자 견훤도 더는 갈구지 않고 넘어간다.] 견훤이 서라벌을 떠난 뒤 [[공산 전투]] 이후 바로 "우리 [[동맹]]국은 고려지 백제는 아니오. 내가 비록 중신들의 권유로 이 자리에 올랐지만 이 황좌를 탐낸 적은 한 번도 없소이다"라며 그를 왕으로 만들어준 견훤에게 협조했던 유염과 김응겸을 [[역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처형하는 모습이 그나마 진정한 왕 같은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준 장면.[* 사실 드라마에서처럼 즉위하자마자 견훤에게 협조한 세력들을 처단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경순왕 초기 고려는 그 공산 전투에서 왕건이 한달 가량이나 실종됐다가 혼자 겨우 살아서 도망쳐나오고 휘하의 장수 여덞과 본대 병력을 모조리 잃으며 고창 전투 이전까지 후백제에 주도권을 완전히 내준 상태였기 때문. 따라서 극중에서처럼 즉위하자마자 친 후백제 신하들을 숙청하면 당연히 한창 기세등등하던 견훤이 그대로 놔두지 않고 다시 서라벌로 와서 책임을 크게 물었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참에 신라를 후백제에 합병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극의 전개를 위해 시기를 앞당긴 것이며, 후백제와 모의하여 경애왕을 끌어내리고 그에 따라 공산 전투가 벌어지게 하는 유염과 김응겸의 작중 역할이 끝났으므로 퇴장시킨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 외에는 대부분 [[고려]]에게 나라를 바치는 것을 논의하는 장면으로 나온다. 그 과정에서 고려에게 나라를 바치려는 아버지의 행동에 반대하는 아들 [[마의태자]]와 갈등을 빚는 장면도 덤. 고려에 항복을 결정하는 마지막 대전 회의에서 "차라리 전 백성과 신하에게 자결을 요구하라"라며 반대를 하는 마의태자에게 "신라를 망친 것은 백성과 신료들의 죄가 아니라 [[황실]]의 죄이니 이제 와서 백성이나 신료들에게 목숨을 바치라고 할 수는 없다"며 [[고려]]에 항복하는 장면은 [[명장면]]. 견훤이 [[왕건(태조 왕건)|왕건]]에게 투항한 이후로는 경순왕까지 3명이 한 자리에 3자 대면을 하는 장면도 있다.[* 견훤의 뜻에 찬성하여 왕건에게 후백제 정벌을 촉구하기도 한다. 이 장면이 경순왕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 2002년 [[KBS]]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는 [[성우]] 겸 배우 [[이도련]][*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능달]] 역,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는 [[일해재단]] 이사장 [[최순달]] 역.]이 연기하였다. 다만 작품이 다르고 담당하는 배우가 달라져서 그런지 캐릭터 묘사도 조금 더 괄괄하고 강단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사실 이건 유천궁이나 유긍달 등 지방 세력가들도 비슷하다. 전작에서는 주인공인 왕건의 조력자들이었던 반면 이번에는 광종의 조력자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 다만 큰 어르신이라는 상징성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극중의 비중은 "지방 세력가 A" 를 벗어나지 않는다. == 기타 == * 조선 왕조 말기에 들어와 후처 [[낙랑공주(고려)|낙랑공주 왕씨]] 소생들인 [[경주 김씨]] 일문들에 의해 세워진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 정비 [[죽방부인]]을 전비(前妃) 박씨로, [[낙랑공주(고려)|낙랑공주]]를 후비(後妃) 왕씨라 기록하고, 공주 왕씨(公主 王氏)는 누락하고 있는데, 사실 [[낙랑공주(고려)|낙랑공주]]는 신라가 멸망한 뒤에 시집왔으니 신라의 왕후는 아니다. 다만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이후 그 지위가 '''정승공'''(正丞公) '''낙랑왕'''(樂浪王)이라는 군왕(郡王)급 제후왕의 [[작위]]에 봉작되었기 때문에 [[낙랑공주(고려)|낙랑공주]]는 신라 국왕의 왕후가 아닌 고려의 제후왕인 낙랑군왕의 왕비가 된다. * 한국사 역대 임금 중에서는 조선 후기의 [[영조]]와 더불어 대단히 장수했다. 비록 신라 국왕으로서의 재위기는 8년에 불과하나 고려 제후로서는 42년 동안 봉임되었으며, 고려 제5대 대왕인 [[경종(고려)|경종]]의 치세기간인 978년에 사망해 천수를 모두 누렸다. * 1934년 간행된 《신라삼성연원보》는 그의 첫째 부인으로 송희부인(松稀夫人) 석씨(昔氏)를 등장시켜 슬하에 14남 3녀를 두었다고 하는데, 역사학계와 신라계 김씨들은 위보로 간주하고 있다.[[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4&nNewsNumb=20150116540&nidx=16541|출처]] * 먼 옛날 [[진평왕]](제26대)이 [[옥황상제]]에게서 받았다는 [[천사옥대]][* 《[[고려사]]》에서는 '''성제대'''(聖帝帶)라고 썼다.]를 고려에 항복한 직후인 937년에 창고에서 꺼내 태조 왕건에게 바쳤다. 중국의 [[전국옥새]]처럼 신라에서 일종의 천명을 상징하는 물건이란 의미가 있었던 듯 하다. * 의외로 무속에서 '신'으로 모셔지는 왕이다. 그 이유는 그가 [[고려]]의 태조에게 항복한 것이 괜히 저항했다가 백성들에게 [[간디(문명 시리즈)|유혈사태]]가 일어나게 하는 것보다 백성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자비심에서 우러나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까지도 각지에 경순왕을 모시는 사당이 많이 남아 있었으며, 경상도와 충북 일대, 경기도 일부 지역에 경순왕 사당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시골을 돌아다니다 보면 경순왕 사당과 이를 모시는 무당들이 가끔 보인다. 무속에서는 《삼국유사》와 마찬가지로 '김부대왕'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으며, 그 아들인 [[마의태자]]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 [[형산강]]에는 경순왕이 용으로 변신했다는 설화가 전해내려온다. 경주와 포항의 경계 지역에는 형산과 제산이 있는데, 과거에는 그 두 산이 하나로 합쳐져 있었고 남천, 기계천 등에서 나오는 물로 지금의 [[안강읍]] 지역에 큰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물난리가 잦아 치수가 어려웠는데, 이를 위해서는 용으로 승천하여 그 산을 갈라야 했다. 그 때문에 왕이 기도를 드려 승천을 했는데, 이 때 용이 되기 위한 조건이 바로 누군가가 승천한 왕을 용으로 불러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 승천한 왕이 뱀처럼 보여 사람들이 모두 다 큰 뱀이라고 불렀으나, 유금이라는 이름의 어린 아이 한 명만이 뱀이 아니라 용으로 불러주었고, 그제서야 용으로 승천할 수 있었다. 그 덕택에 산이 갈라지고 물이 빠져 나가게 되었으며, 물이 빠져 나간 뒤에 생긴 들판을 그 어린 아이의 이름을 빌어 '유금'이라고 불렀다. 현재 지명으로 [[강동면(경주)|강동면]] 유금리가 존재하는데, 유금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파일:W0OIQn1.jpg|width=100%]] * [[어진]]의 [[눈썹]] 모양이 상당히 특이한데, [[당나라]] 시대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혹은 [[불화]]에 가깝게 여러 차례 이모되면서 불화의 전형적인 표현 양식을 띠었을 수도 있다. * [[어진]]이 남아있지만 경순왕을 상보로 삼은 제서는 경순왕의 외모에 대해 영특한 기상은 하늘을 업신여길 만한 외모였다고 한다.[[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y&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y_002r_0010_0190_0060&position=-1|출처]] * 신라의 마지막 국왕이라서 나라가 망한 책임을 물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신라는 [[견훤]]이 [[경애왕]]을 살해하고 아직 신라에게 충성을 바치던 경남북 일대 호족 세력들을 초토화한 시기에 돌이킬 수 없이 끝장나 있었다. 경북 서북부 일대가 그나마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저항했지만 그 지역 호족들이 '''믿고 바라던 주군은 이미 [[왕건]]이었지 경순왕은 아니었다'''. 따라서 경순왕이 할 수 있는 정치적 선택은 항복을 왕건에게 하느냐 견훤에게 하느냐. 또 언제 항복할 것이냐 뿐이었다. 경순왕은 그 상황에서도 견훤이 왕건을 한참 정신 못 차리게 밀어붙이던 시기에는 최대한 견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노력했는데 이는 정말 대단한 판단력과 자제력이 아닐 수 없다. 최대한 상황에 따라 적절히 판단하여 서라벌의 백성과 신료들을 보전한 훌륭한 임금으로서, 평화롭거나 나름 신라가 여력이 있었을 때 즉위했더라면 [[명군]]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 《[[삼국사기]]》 기록 == [include(틀: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29&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삼국사기》 <경순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경순왕이 즉위하다. 이름은 부(傅)이고, [[문성왕|문성대왕]]의 후손이며, [[이찬]] [[김효종|효종]]의 아들이다 一年冬十一月 [[경애왕|전왕]]의 시호를 경애라 하고 장사지내다 一年冬十一月 아버지 이찬 효종을 추존하고, 어머니를 왕태후로 삼다 一年冬十二月 [[견훤]]이 들에 쌓아놓은 곡식을 태우다 二年春一月 [[김상(고려)|김상]]이 [[흥종]]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하다 二年夏五月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하다 二年夏六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年秋八月 견훤이 [[왕충(원보)|왕충]]에게 쫓겨나다 二年秋八月 견훤이 대목군의 벼를 베어가다 二年冬十月 견훤이 무곡성을 함락시키다 三年夏六月 [[천축국]] 삼장 [[마후라]]가 고려에 오다 三年秋七月 견훤에 맞서 출정한 [[홍술]]이 전사하다 三年秋七月 순주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다 三年冬十月 견훤이 가은현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다 四年春一月 [[최선필|선필]]이 고려에 항복하다 四年春一月 [[태조(고려)|태조]]가 [[고창 전투|고창군에서 견훤을 크게 이기다]] 四年春二月 태조가 승리 보고를 하자, 왕이 만나기를 청하다 四年秋九月 동쪽 바닷가의 주군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五年春二月 태조가 왕을 찾아가다 五年秋八月 태조가 왕과 신료들에게 물품을 보내주다 六年春一月 지진이 일어나다 六年夏四月 [[김불]]과 [[이유]]를 [[후당|당]]에 보내 조공하다 七年 [[이사원|당 명종]]이 고려에 책명을 주다 八年秋九月 노인성이 보이다 八年秋九月 [[운주성 전투|운주 내의 30여 군현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十八年冬十月 항복을 반대하던 [[마의태자|왕자]]가 개골산에 들어가다 十八年冬十一月 태조가 거처를 마련해 주고, 장녀 낙랑 공주를 왕에게 시집보내다 → 신라의 멸망 十八年冬十二月 왕을 정승공으로 봉하고, 신라를 경주로 고쳐 식읍으로 삼다 十八年 태조가 왕과 혼인 관계를 맺다 高麗 景宗 四年 경순왕이 죽다. 시호를 경순(敬順)(또는 효애(孝哀)라고도 한다.)이라 하였다 이하, 경순왕과 상관없지만 삼국사기 경순왕 항목에 추가로 적혀 있는 기록이다. 신라사의 시대 구분 高麗 仁宗 二十三年 논하여 말하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경순왕)] [include(틀:신라 왕실)] [각주] [[분류:경순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