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요사)] 高模翰 (? ~ 959년) [목차] == 개요 == [[요사]]에 등장하는 [[발해]]의 인물. 동경요양부, 즉 옛 [[요동성]] 일대가 고향이라 한다. 다른 이름은 송(松)이라 한다. 힘이 세고 활을 잘쏘고 병법 논하기를 좋아했다. 본래 발해 사람이었으나 [[고려]]를 거처 [[요나라]]로 가서 장군으로 활약한다. == 생애 == 발해인이었으나 발해가 멸망한 뒤 고려로 망명했다. [[태조(고려)|고려 태조]]의 딸[* 왕건의 사위 즉 딸의 배우자에 대한 기록이 없는 딸들은 [[순안왕대비]]와 징효대사비문에 기록된 딸인 청단◯주 뿐이다. 그 중에서 고모한의 아내인지는 알 수 없다.]을 아내로 맞았으나 죄를 지은 탓에 고려에서도 쫓겨났고, 모국을 멸망시킨 요나라에 갔다. 요나라에서도 술을 마시고 사람을 죽여 투옥됐는데, 그 재능을 알아본 [[태조(요)|요태조 야율아보기]]가 그 죄를 용서했다. 936년 7월 [[후당]]의 [[장경달]], [[양광원]]이 50만 대군을 이끌고 태원을 공격하자 [[석경당]]이 요에 지원을 요청했다. [[태종(요)|요태종]]의 명을 받은 고모한은 9월 장경달을 격퇴하고 태원의 포위를 풀었다. 석경당은 밤에 무사히 성에서 빠져나와 태종을 알현할 수 있었다. 이튿날 다시 후당군과 싸워 이겼다. 장경달은 진안채(晉安寨)에 숨었고, 고모한은 개선해 돌아갔다. 석경당은 독립해 [[후진]] 황제를 자칭했으며 얼마 뒤 장경달은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태종은 "짐이 병사를 일으킨 이래 경의 공적이 제일이니, 비록 옛 명장이라도 미치지 못한다."[* 朕自起兵, 百餘戰, 卿功第一, 雖古名將無以加.]라고 고모한을 칭찬했고, 상장군에 제수했다. 회동 원년(938) 책봉례를 거행하고 백관과 각국 사절들을 이의관(二儀殿)에 초대해 연회를 벌였다. 태종은 연회에 모인 이들에게 고모한을 소개하며, "우리 나라의 용맹한 장수요, 짐이 천하를 통일한 것은 이 사람의 힘 덕분이오."[* 此國之勇將, 朕統一天下, 斯人之力也.]라고 칭찬했고, 백관이 만세를 외쳤다. 후진이 맹약을 어기자 통군부사가 되어 [[승알]]과 함께 적성,덕, 패 등을 함락시켰다. 겨울이 되자 좌우에 철요자(鐵鷂子, 중장기병)를 거느리고 관남의 성읍 수백을 항복시켰다. 3월, 호관(虎官) 양담(楊覃)이 칙서를 받고 하북 건녕군(乾寧軍, 영주寧州)에 갔고, 창주절도사 전무(田武)가 포위하자 고모한과 조연수(趙延壽)가 모여서 구하러 갈 것을 의논했다. 이때 잠시 고모한의 눈 가운데서 빛이 나와 깃발과 병장기를 둘러싸며 유성과 같이 오래도록 빛나는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고모한은 "이는 하늘이 돕는다는 조짐이오!"[* 此天贊之祥!]라며 병사를 출진시켰고, 죽이고 사로잡은 수가 아주 많았다. 이 공으로 시중에 올랐다. 이어 후진 염산(鹽山)을 점령했고 요안(饒安)을 격파해 태부로 승진했다. 후진은 위부절도사 두중위(杜重威)에게 병사 3만을 보내 고모한을 저지하려고 했다. 고모한은 주변 장수들과 병사들에게, >병법은 편제에 있지 수에 있지 않다. 많음으로 적음을 업신여기는 것은 옳지 않으니, 반드시 질 것이다. 이것을 후진에 알려주자![* 軍法在正不在多. 以多陵少, 不義必敗. 其晉之謂乎!] 라고 말하며 새벽에 공격을 감행했다. 대장기 아래 3백 명이 기습해 전투를 벌이니, 후진의 선봉장 양한장(梁漢璋)을 죽이고 나머지 병사들을 패주시켰다. 태종은 고모한의 공적이 전한의 장수 [[이릉]]과 비교할 만하다고 칭찬하는 조서를 직접 써서 하사했다. 두사충이 뒤이어 호타하(滹沱河)에 이르니, 태종이 고모한에게 계책을 물었다. 고모한은 직접 중도교(中渡橋)에서 후진군을 막았고 승리를 거뒀다. 두사충은 결국 요나라에 항복했다. 황제의 수레가 변(汴, [[카이펑시|개봉]]) 땅에 이르자 특진검교태사에 임명되고 철군(悊郡) 개국공에 봉해졌으며 옥새가 새겨진 문서(璽書)와 함께 검기(劍器)를 받았다. 변주순검사가 돼 사수(汜水) 여러 산의 토적들을 평정했고 관직을 옮겨 중경을 지켰다. [[세종(요)|세종]] 때인 천록 2년(948) 개부의동삼사가 더해졌고 봉의(對衣)와 마구, 명마를 받았다. [[목종(요)|목종]]이 즉위한 응력 연간 초에는 중대성 우승에 올랐다. 고향 동경 요양부에 이르자 부로(父老)들이 고모한을 환영하며 "공은 기용되어 전장을 다니며 부귀에 이르렀으니, 향리에서 영(榮), 상여(相如, 사마상여), 매신(買臣, 주매신)의 무리와 비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公起戎行, 致身富貴, 為鄉里榮, 相如、買臣輩不足過也.]라고 했다. 응력 9년(959) 1월 좌상으로 관직을 옮겼다가 죽었다. == 가족관계 == 훗날 [[금나라]]에서 활동한 동경도 요양의 발해인 고정(高楨)과 동시대를 살았던 서경도 삭주의 고영견(高永肩)은 고모한의 후손이다. [각주] [[분류:959년 사망]][[분류:발해의 유민]][[분류:고려의 인물]][[분류:요나라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