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청사고)] 孔有德 (? ~ 1652) [목차] == 개요 == [[명나라]], [[청나라]]의 장수. == 행적 == === [[모문룡]] 휘하 === 요동 사람으로 [[천명제|누르하치]]가 요동을 함락하자 같은 고향 사람 경중명과 함께 피도로 달아났으며, 명나라의 총병 [[모문룡]]의 부하가 되면서 그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모영시(毛永詩)라 했다. 1629년에 모문룡이 [[원숭환]]에게 제거되자 병사들은 진계성에게 소속되었고 등주순무 손원화의 보병좌영참장이 되었으며, 1631년에 후금에서 명나라를 공격해 대릉하성을 포위하면서 조대수가 구원을 요청하자 손원화가 공유덕에게 800명의 기병을 주어 구원하게 했다. === 명나라에 반기를 들다 === 11월에 오교현에서 큰 비나 눈이 내리고 많은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서 약탈하거나 관원들을 살해했으며, 이구성이 이를 계기로 반란을 일으키자 공유덕은 이구성의 아들 이응원의 선동으로 반란에 동참하고 오교병변을 일으켰다. 산동반도로 가서 능현, 상하, 청성 등 여러 성을 함락하고 등주로 향했으며, 경중명, 진광복, 두승공, 조덕순, 오진흥 등 15명의 내응으로 1632년 1월에 등주를 함락했고 도원수를 자칭했다. 황현, 평도를 함락한 후에는 내주를 포위했고 명나라 조정에서는 서종치, 사련 등을 보내 공유덕을 막게 하면서 회유하려고 시도했다. 1632년 2월에 군을 이끌고 내주를 포위해 서종치, 사련 등을 죽였지만 7월까지 함락하지 못하다가 명에서 지원군을 보내기로 하자 등주성으로 철수했다. === [[후금]]에 귀순하다 === [[숭정제]]가 주대전에게 명령해 공유덕을 공격하도록 하자 명군이 9월에 등주성을 포위해 10월에 공격하자 1633년 2월 13일에 포위를 뚫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여순, 장산, 녹도에 주둔하던 총병 황룡이 공유덕이 패하면 장산, 여순을 거쳐 후금에 귀순할 것으로 여겨 대기해 주문욱과 함께 추격했다. 4월에 공유덕은 1만여 명을 이끌었고 후금에서는 지르갈랑, 아지거, 두두 등에게 병사를 주어 압록강에서 진을 쳐 기다리게 했으며, 후금의 보호를 받아 6월 3일에 심양으로 들어갔고 잔치가 열리고 말 천여 필을 하사받았다. 공유덕은 도원수에 임명되고 요양에 배치되었으며, 그의 부대를 천우병(天佑兵)이라 하고 여순을 공략했다. 1636년에는 공순왕의 작위를 받고 팔기군 정홍기에 배속되었으며, 겨울에 선봉이 되어 [[병자호란|조선을 공격했다.]] 1638년에 명의 금주를 공격하는 것에 참가하고 1639년에는 명의 송산을 공격하는 것에 참가했으며, 1641년에는 금주를 포위하는 것에 참가하고 1642년에는 송산, 금주를 공격하는 것에 참가했으며, 1642년에는 중후소, 전둔위 등을 빼앗는 것에 참가했다. === [[남명]]과의 싸움 === 1644년에 도르곤과 함께 이자성을 추격했고 9월에 귀환했다가 도도를 따라 이자성을 정벌할 것을 지시받았으며, 1645년에 섬서에서 강남으로 이동해 양주에서 이겨 남경을 빼앗고 강음을 공격했다. 1646년 5월에 경사로 돌아갔다가 8월에 평남대장군이 되어 남명을 공격해 호남 지역을 점령했으나 계림에서 구식사에게 패했고 1648년 6월에 무창에 있다가 김성환, 이성동 등이 청나라에 반대해 각지의 청나라의 군사들이 공유덕에게 구원 요청을 했지만 보내지 않았다. 공유덕이 경사로 돌아가는 동안 남방의 정세가 안정되자 청의 조정에서는 삼순왕에게 남쪽을 정벌하도록 하려 해서 처음에는 공유덕을 복건, 상가희를 광서로 배치하려고 했다가 상가희가 거부했으며, 공유덕이 광서에 가기로 하면서 정남왕에 임명되어 광서로 출정했다. 1650년 11월에 군사를 이끌고 계림에서 남명의 군사를 격파하고 장동창, 구식사, 정강왕 주형인을 붙잡았고 정강왕부로 들어가 정남왕부로 바꿨다. 세 사람을 처음에는 상객으로 대했다가 장동창과 구식사가 초련에게 계림에 있는 것을 알리고 습격하려고 편지를 보낸 것을 알아내 두 사람을 처형하고 주형인을 서문 바깥 민가에서 교살했다. === 최후 === 1652년에 서녕왕 이정국이 동로군을 이끌고 호남의 대부분을 수복하고 광서로 남하해 계림으로 오자 6월에 군사를 이끌고 흥안현 엄관으로 가서 요충지를 장악했으며, 이정국이 코끼리 50마리를 동원하자 패했다. 이정국이 계림까지 추격해 성을 포위했고 7월 4일에 남명의 군사가 도착해 운제로 공성을 하면서 공유덕은 이마에 화살을 맞아 궁지에 몰리자 처첩에게 목을 매 죽게 했으며, 정남왕부에 불을 질러 절을 한 후에 자살했다. 순치제는 공유덕이 죽자 무장(武壯)을 시호로 내렸다. [[분류:1652년 사망]][[분류:명나라의 인물]][[분류:청나라의 인물]][[분류:랴오닝성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