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금사)] ||<:><-2>{{{#ece5b6 '''금 부흥군 수장'''[br]{{{+2 '''郭蝦蟆 | 곽하마'''}}}}}} || ||<|2> '''{{{#fff 출생}}}''' ||<(>1192년 || ||[[금나라]] 회주(會州) [br] (現 [[중화인민공화국]] 감숙성 정원현) || ||<|2> '''{{{#fff 사망}}}''' ||<(>1236년 || ||[[금나라]] 봉상 혹은 회주 [br](現 중화인민공화국 감숙성 정원현 추정) || || '''[[시호|{{{#fff 시호}}}]]''' ||<(> 없음 || || '''[[성씨|{{{#fff 성명}}}]]''' ||<(> 곽하마(郭蝦蟆) || ||<|2> '''{{{#fff 재임}}}''' ||<#b82647>'''{{{#ece5b6 금 부흥군 수장}}}''' || ||<(> 1234년 ~ 1236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금나라]] 말기의 장군. 금나라가 멸망하자 잔존 세력의 수장으로서 2년 간 항쟁하였다. == 생애 == 본명은 곽빈(郭斌)으로 [[한족]]이다. 1192년에 태어났다. 활을 잘 쏘아 형 곽록대와 함께 장군이 되어 회주가 함락되자 형과 함께 포로가 된다. '하마'라는 말은 [[개구리]]라는 뜻으로, 아마도 개구리 같은 인상이라 그런 별명이 붙은 듯하다. === 1223년 회주 탈환 시도 === 곽하마가 거느린 기병(약 500명)은 모두 붉은 승려복을 입고 산을 덮으며 내려왔는데, 서하인들은 이걸 산령이라며 두려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곽하마의 활약으로 '''서하에 함락된 지 4년 만에 탈환에 성공한다!''' === 1234년 금나라의 멸망, 부흥운동의 시작 === [[금애종|금 애종]]이 몽골군의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자살했고, [[금말제|금나라의 마지막 황제]]까지 몽골군에게 죽자 금나라는 완전히 멸망한다. 다만 곽하마가 다스리는 지역은 항복을 거부하며 이후 2년간 더 버티면서 항전하였다. 그리고 1236년, 서주에서 고립된 채주성에서 곽하마는 최후의 항전을 하였다. 하지만 몽골군의 공격으로 승산이 없자 마지막 항전으로 성 안의 자원들을 몽골군에게 하나도 넘겨주지 않으려 우마들을 죽여 병사들에게 먹이고, 금, 은, 동, 철을 무기 만드는데 쓰고, 창고와 건물들을 태웠다. === 사망 === 그리고 관청 근처에 공동자결을 할 장소를 만든다. 이때 '차라리 내 손에 내 가족이 죽는게 낫겠지.' 이런 생각으로 가족을 죽이려 했다. 이때 아내는 살려달라고 부탁했으나 그는 끝내 아내를 참살하였다. 성 안에 들어온 몽골군과도 끝까지 싸웠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고, 그래도 끝까지 싸워보려 애를 썼으나 화살이 다 떨어지자 부하들의 아내와 자식들을 창고에 강제로 집어넣어 모두 태워죽이고는 불에 스스로 뛰어들어 자살한다. 사후 이곳 고장사람들이 그를 추모하는 비석을 세웠다. == 평가 == === 긍정적 평가 === 그는 끝까지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금나라의 부흥을 위해 싸운 인물이다. 얼핏보면 최후의 항전이 신라와 백제 간의 [[황산벌 전투]]와 너무 비슷하고, 곽하마 그 자체도 적군에게 죽는 것보단 나을것 같아 자신의 가족을 죽인 것, 자신의 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다만 계백의 경우는 좀 다른데, [[황산벌 전투]] 당시 백제는 살아 있었으나 멸망 직전이였다.] 노력한 것. 이런 점이 매우 비슷하다. 거대한 제국이 망해도 비교적 소외된 지역은 당장 편입되지 않고 시간이 걸리게 마련인데, 곽하마가 다스리던 지역인 회주도 간쑤성의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라 당장 급히 접수해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2년간 버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족이면서도 [[여진족]]의 정복왕조인 금나라에 끝까지 충성하다 죽음을 맞이한 것 때문에, 여진족의 후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 부정적 평가 === 그가 끝까지 싸운 것 자체가 잘못됐다는 비판 여론도 있다. 애꿎은 가족과 금나라 백성들을 끌어모아 되지도 않을 것 같은 전투를 벌여 가족과 백성들까지 죽게 만들었다. 희생정신이 보이지만 금나라 백성들을 죽이면서 오히려 부흥의 가능성을 줄였다. 그리고 살려달라는 아내를 참수하여 잔혹하게 죽인 것도 현대에 와서는 가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명예살인]]이라고 비판받는다. 특히 아내만 죽인게 아니라 부하들의 아내와 자식들까지 창고에 가두어서 태워죽여 학살까지 저질렀기 때문에 좋게 평가받을 수가 없다. 다만 이때는 충이 곧 미덕인 시대였다는 점과, 살아남아서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험한 꼴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는 걸 감안해야 된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저지른 살인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 기타 == * [[완안진화상]]과 같이 금나라 최후의 충신이지만 국내에선 인지도가 상당히 적다. 부흥운동에다가 황제도 아니어서 그런듯. [[분류:1192년 출생]][[분류:금나라의 인물]][[분류:중국의 자살한 인물]][[분류:전쟁 사망자]][[분류:123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