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만 관련 문서)] [목차] == 개요 == >'''우리의 몸은 대만에 있지만 마음은 대륙에 있다.''' >- 1955년, 장제스[* 이후 1990년대까지 [[중국국민당]]의 준공식적 표어가 된다.] [[파일:external/0.share.photo.xuite.net/282873635_m.jpg]]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하면서 [[중국 대륙]]에서 [[타이완 섬]]으로 [[국부천대|쫒겨난]] [[중화민국]]이 1950~1960년대 비밀리에 세운 대륙 수복 작전이다. 국광(國光) 작업이라고도 한다. 국광(國光)이라는 뜻은 국가의 영광을 되찾는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절의 [[북진통일]]론의 대만판. == 배경 == 국부천대 이후 [[장제스]]는 1950년대 내내 "1년째 준비하고 2년째 본토로 반격하며 3년째 [[중국공산당|공산당]]을 소탕하고 5년째 본토 수복을 완수한다"(一年準備,兩年反攻,三年掃蕩,五年成功)이라는 계획으로 타이완 섬 전체를 준전시 상태로 유지했다. 이를 위해 [[6.25 전쟁]] 기간 내내 동남연해에 특공대를 잠입시키고 [[태국]] 북부에 있는 국민당 패잔병에 원조를 지속했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중국 국민당|국민당]]을 쇄신하고 [[대만 계엄령|계엄령]]을 위시로 한 치안 강화에 돌입했다. 1954년에는 [[미국]]과 [[미국-중화민국 상호방위조약|중미공동방어조약]](中美共同防禦條約)을 맺으며 미군협방대만사령부(美軍協防臺灣司令部)가 설치되면서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타이완 섬의 방어는 더욱 강력해지게 된다.[* 현재 미군협방대만사령부가 있던 곳은 타이베이 시립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이후 장제스는 1955년부터 본격적인 대륙 수복 작전을 세우게 된다. == 진행 == [[타오위안]]에 위치한 츠후(慈湖)라는 곳은 장제스가 대륙에 있는 자신의 고향과 경치가 비슷한 곳이라 해서 자주 찾던 곳이었다. 1961년 4월 1일 장제스는 이 곳에 국광작업실(國光作業室)을 설치한다. 그는 이 곳에 육해공 엘리트 207명을 차출하여 대륙 침공 계획을 짜도록 지시한다. 장제스가 죽은 후에 묘도 여기에다 썼고 장징궈의 묘도 여기에서 멀지 않다. == 국광 계획(國光計劃) == 1961년 4월 수립된 이 계획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진먼|진먼 섬]]에서 [[샤먼시|샤먼]]을 향해 포격을 가하여 도발 >2) [[중국 인민해방군|공산군]]이 반격하면 "[[중국 공산당|공산정권]]의 도발"이라고 국제 사회에 선전 >3) 미군과 함께 샤먼에 4개 사단, 1개 해병대를 상륙시켜 전면적인 침공 >대륙을 3일 - 4일 간 포격해 공산당이 포격으로 반격하면 [[중화민국]]은 공산당이 도발했다고 전세계에 선전하여 대륙을 수복하는 전쟁의 구실로 삼도록 하라. >---- >1963년 5월 2일 장제스가 [[대만 국방부|국방부]]에 내린 지시 == 암초 == 국광 작전에 참모부는 현실성이 없다며 반대했다. 참모부가 내세운 반대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대만군|중화민국군]]은 60만 명 남짓인데다 군수품도 부족하고 대륙으로 병력과 물자를 실어나를 상륙함도 부족하다. 1. [[중국 공산당|공산당]]은 [[중국 인민해방군|상비군]]만 400만 명에 민병까지 합하면 1억 명에 달한다. 1. [[베트남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은 장제스를 위해 다른 곳에서 전쟁을 할 생각이 없다. 1963년 5월 30일 국방부는 장제스에게 지시를 실행하기는 힘들다는 의견을 냈고 장제스는 이 의견을 받아들인다. == 두 번의 침투 작전 == 1965년 6월 7일 육군 군관 학교를 방문한 장제스는 국군 고위 군관들에게 대륙 탈환에 대한 의지를 밝혔고 국군 고위 군관들은 유서를 쓰고 상륙 날짜까지 잡아놓았다. 먼저 대륙 수복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기로 하고 첩보 부대를 보내기로 한다. 1965년 8월 6일 장장(章江) 등 2척의 배에 특전사를 싣고 정보를 수집하려 보냈으나 [[하이난 섬]] 인근에서 인민해방군에게 발각당해 어뢰에 맞고 탑승자 200여 명 전원이 사망했다. 1965년 11월 12일 [[펑후]] 열도에서 출발하여 정보 수집을 하던 융쯔(永字) 호가 인민해방군 함대에 걸려 침몰 당했다. 미국은 장제스의 국광 작전에 반대했으며 이 두 번의 작전 실패 후 국광 작전에 대한 예산도 줄기 시작한다. == 실패 == 1971년 중화민국이 [[UN]]에서 축출당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상임이사국]]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1972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마오쩌둥]]과 정상 회담을 하면서 [[핑퐁 외교]]가 시작되고 장제스는 국광 작전의 핵심이었던 [[중국 공산당]]에 대한 비난 여론을 조성하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해 국광 작전을 사실상 포기했다. 거기에 닉슨의 후임 [[지미 카터]]는 상호방위조약도 파기하고 미군을 철수해서[* 사실 이 시점에서 남아 있던 미군들은 이미 대대급 병력도 아니었다.] 대만은 자체 방위에 집중해야 했다.[* 카터는 주한미군도 철수한다고 해서 박정희에게 위기감을 심어줬다.] 후계자인 [[장징궈]]는 명목상 대륙 수복을 포기하지는 않았으나 대륙 수복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해병대|해군 육전대]]를 줄이는 등 실질적으로는 대륙 수복을 포기했고, 대만 국민들의 민심을 얻는 방향으로 돌려 내치에 중점을 두었다. 결국 1992년에 [[리덩후이]] 총통은 공식적으로 무력을 통한 본토 수복을 포기했다. 이후 중화민국은 [[중국 대륙|본토]]와는 분리된 [[대만]]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해지게 된다. [[분류:대만의 역사]][[분류:양안통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