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제국의 후궁(태조 ~ 고종))]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03F95 20%, #403F95 80%, #373679)" {{{#ffd400 '''귀인 이씨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의 후궁(중종 ~ 고종))]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73679, #403F95 20%, #403F95 80%, #373679); color: #FFD400" '''대한제국 고종의 후궁[br]{{{+1 귀인 이씨 | 貴人 李氏}}}'''}}}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E1D55, #89236A 20%, #89236A 80%, #6E1D55); color: #FFD400" '''조선 고종의 후궁[br]{{{+1 귀인 이씨 | 貴人 李氏}}}'''}}}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서삼릉후궁묘역.jpg|width=100%]]}}} || ||<-2> {{{#ffd400 {{{-2 서삼릉 빈·귀인 묘역 전경}}} }}} || || '''출생''' ||[[1843년]] [[2월 14일]] || ||<|2> '''사망''' ||[[1928년]] [[12월 17일]][*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나오며, 음력 기준으로는 11월 6일이다. ] (향년 85세) || ||[[일제강점기|조선]] [[경기도]] [[경성부]][br](現 [[서울특별시]]) || || '''능묘''' ||[[서삼릉#s-4.1|귀인이씨지묘]](貴人李氏之墓) || ||<|10> '''재위기간''' ||'''{{{#ffd400 조선 궁인}}}''' || ||[[1868년]] 이전 ~ [[1880년]] [[1월 29일]] || ||'''{{{#ffd400 조선 숙원}}}''' || ||[[1880년]] [[1월 29일]] ~ [[1895년]] [[1월 12일]] || ||'''{{{#ffd400 대조선국 숙원}}}''' || ||[[1895년]] [[1월 12일]] ~ [[1897년]] [[10월 12일]] || ||'''{{{#ffd400 대한제국 숙원}}}''' || ||[[1897년]] [[10월 12일]] ~ [[1906년]] [[5월 27일]] || ||'''{{{#ffd400 대한제국 귀인}}}''' || ||[[1906년]] [[5월 27일]] ~ [[1928년]] [[12월 17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이(성씨)|이]](李) || || '''배우자''' ||[[고종(대한제국)|고종 태황제]] || || '''자녀''' ||'''슬하 1남''' 장남 - [[완친왕]](完親王, {{{-3 1868 ~ 1880}}}) || || '''봉작''' ||궁인(宮人) → 숙원(淑媛) → '''귀인(貴人)''' || || '''당호''' ||'''영보당(永保堂)'''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고종(대한제국)|고종]]의 [[후궁]]. 고종의 서장자이자 훗날 [[완친왕]]으로 추증되는 완화군 이선의 어머니다. 제2의 [[희빈 장씨]], [[숙빈 최씨]], [[영빈 이씨]]를 꿈꾸었으나 결국엔 화무십일홍의 삶을 살다 간 인물. [[명성황후]]가 [[순종(대한제국)|순종]]을 낳게 되면서 완화군과 함께 출궁하기 전까진, [[희빈 장씨]]와 행보가 비슷했다. [[왕비]]가 들어오기 전부터 총애를 받던 연상의 [[궁녀]], 왕비를 제치고 먼저 [[왕자]]를 낳은 점, 심지어 둘 다 왕비가 [[여흥 민씨]] 집안 출신이었다. 다만 [[중인]]에 소문난 거부 집안의 딸이던 장씨와는 다르게, 이씨는 아예 평민 출신이다. == 생애 == 본래 [[궁녀]]였는데 [[고종황제|고종]]의 눈에 들어 [[승은]][[상궁]]이 되었다. 승은을 입을 당시 고종은 [[명성황후]]와 혼례를 올리기 전인 15세였고, 그녀는 9살이나 많은 24세였다. 명성황후와 가례를 올린 첫날부터 고종은 왕비의 처소엔 들지 않고 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만큼, 이씨를 총애했다고 한다. 1868년 [[운현궁]]에서 고종의 첫 아들을 [[출산]]하는데, 이 아들이 바로 고종의 서장자인 [[완친왕|완화군]]이다. >전교하기를, "오늘 진시(辰時)에 궁인(宮人) 이씨(李氏)가 아들을 낳았다. [[산후조리|산모를 보살펴주는 등의 일]]을 운현궁(雲峴宮)에서 대령하라." 하였다. >---- >《[[고종실록]]》 고종 5년 윤4월 10일 그러나 아들을 낳고도 이씨는 정식 [[후궁]]으로서의 봉작을 곧바로 받지 못했다. 1871년 왕녀를 낳았으나, 이때도 후궁 봉작을 받지 못하였으며 아들도 1876년(고종 13년)에 9세가 되어서야 군으로 책봉받았고, 본인은 1878년(고종 15년)에 관례를 치를 때까지도 봉작 받지 못했다. 역대 왕실 대대로, 이씨 성을 가진 여성은 [[왕비]]는 고사하고 [[후궁]]으로 봉작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경향이 컸다. 아마도, 이씨가 후궁으로 봉해지지 못한 이유를 살펴보자면 신분이 낮았다기보단 이씨 성의 후궁을 꺼리는 왕실 내부 사정 탓이 있지 않을까 추측할 뿐.[* [[조선]] 후기로 가면 갈수록 자손이 귀해지는 이유로, 왕녀이든 왕손이든 일단 왕의 후사를 낳는다면 [[후궁]]으로 봉작을 받았다. [[철종(조선)|철종]]의 후궁 봉작의 예를 살펴보면 알수 있는 부분.] 1880년(고종 17년)에야 비로소 최하위 말단 품계인 숙원에 책봉되었는데,[* 《[[고종실록]]》 17권, 고종 17년 1월 29일 정유 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701029_001|#]] ] 불행히도 그해에 [[완화군]]이 13세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남은 평생을 홀로 보냈다. 비록 신뢰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매천야록]]》에서는 [[명성황후]]가 한때 원자로 거론되었던 완화군을 죽였는데, 일설에는 젓갈항아리에 빠트려 죽였다고 하고 또는 방망이로 때려죽였다고 하는 말도 있었다고 기록했다. 또 다른 야사에는 [[명성황후]]가 [[홍역]]을 앓고 있는 완화군에게 [[인삼]]탕을 보내 열이 오르게 하여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야사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당대의 신문기사를 참고하면 "민비의 미워하심을 받아" 같은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너나 할 것 없이 명성황후를 범인으로 의심한 듯 하다.[* 〈[[매일신보]]〉 1913년 12월 7일자 기사에는 "이태왕전하의 왕자를 탄생하매 당시에 외외한 세력이 날아가는 새도 능히 떨어칠 민비(閔妃)의 미워하심을 받아 모자를 한가지로 궐내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라고 기재되어 있다.] 1906년(고종 43년)에 [[귀인]]으로 책봉받았고, 1928년 12월 17일에 사망했다. >李貴人別世 >순종의형님되시는이를나흐신 완왕궁 리귀인(完王宮 李貴人)은 팔십세의로령으로 지난십칠일 정오에 별세하얏더라 > >(현대어 버전) 이귀인 별세 > [[완친왕|순종의 형님되시는 이]]를 낳으신 완왕궁 이귀인이 80세[* 실제로는 85세였다.]의 고령으로 지난 17일 정오에 별세하였다.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812190020920202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8-12-19&officeId=00020&pageNo=2&printNo=2990&publishType=00020|1928년 12월 19일 자 〈동아일보〉 기사]] 현재 묘소는 [[서삼릉]] 귀인 묘역에 있다. == 대중 매체 == * 1965년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에서는 배우 [[이민자(배우)|이민자]]가 연기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풍운 영보당.png|width=100%]]}}} || || {{{#gold '''〈풍운〉의 영보당 귀인 이씨'''}}} || 1982년 [[KBS1]] 드라마 〈[[풍운(KBS)|풍운]]〉에서는 배우 이기선이 연기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명성황후 영보당.png|width=100%]]}}} || || {{{#gold '''〈명성황후〉의 영보당 귀인 이씨'''}}} || 2001년 [[KBS2]] 드라마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는 배우 [[정선경]]이 연기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이인(배우)|이인]], [[이진우(배우)|이진우]] 분)의 첫사랑으로 나왔다. 총애를 받아 [[완친왕|완화군]](강성현, 김영찬 분)을 낳았지만, [[명성황후]]([[이미연(배우)|이미연]] 분)가 성장하고 순종이 태어나면서 완전히 뒷방 신세가 되었다.[br][br] 이에 아들만 바라보고 처음에는 [[흥선대원군]]에게, 뒤에는 [[신정왕후 조씨|조 대비]]에게 붙어 완화군의 세자 책봉을 도모하지만 완전히 실패.[* 애초에 간택후궁이 아닌 [[궁녀]] 출신이라 뒷배를 봐줄 친정세력도 없었고, 훗날 [[엄귀비]]의 황후 책봉이 논의된 것을 보면 조선 왕실 말기에선 아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었으나, 결정적으로 이미 왕비 소생의 적자가 태어난 마당에 [[광해군]]과 [[영창대군]] 정도의 나이차가 아니면 불가능에 가까운 얘기였다.] "나밖에는 모르시던 전하셨거늘"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고종의 마음도 식었고 어린 원자에게 방해가 되자 궐 밖으로 내쳐졌다.[* 처음에는 "완화군이 혼인도 하지 않았는데 궐 밖에서 살라고 하는 게 말이 되냐"고 항의했다. 도저히 방법이 없자 "그럼 모자가 떨어지지 않고 같이 살게 해달라"고 [[명성황후]]에게 울고 빌어서 완화군과 같이 살게 되었다. ][br][br] 작중에서는 완화군의 죽음을 끝으로 44회에서 퇴장했다. 퇴장할 때 나오는 내레이션에 오류가 있다. 실제로는 순종보다 늦게 죽었는데, "영보당 이씨는 순종 7년에 사망했으며, 순종이 아들 완왕(완화군) 묘역에 장사지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순종 7년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순종 재위 햇수로 4년 째인([[융희]] 4년) 1910년에 [[경술국치|나라가 망했기]] 때문이다. 저기서 말하는 순종 7년은 1914년으로, [[이왕]] 시절 순종의 행적을 적은 《[[조선왕조실록]] - [[순종실록|순종실록부록]]》을 보면 1914년을 순종 7년으로 표기했다.[[http://sillok.history.go.kr/search/inspectionMonthList.do?id=kzc|#]] 그때 사망해 완왕 묘역에 묻힌 귀인 이씨가 있긴 한데, 영보당이 아니라 [[귀인 이씨(내안당)|내안당 이씨]]라는 또 다른 후궁이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명성황후(드라마)/등장인물, version=75, paragraph=3)] [[분류:조선의 후궁]][[분류:1843년 출생]][[분류:192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