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 김덕기}}}[br]金悳基'''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덕기 얼굴.jpg|width=100%]]}}} || || '''별명''' ||'''고문의 황제'''|| ||<|2> '''출생''' ||[[1890년]]|| ||[[강원도]] [[양양군]]|| || '''사망''' ||1950년경 {{{-2 (추정)}}}|| || '''직업''' ||고등계 형사|| || '''학력'''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2 (졸업)}}}||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 출신 고등계 형사. 그러나 조선인 출신 고등계 형사들이 그렇듯이 일본인 형사들보다 더욱 더 악랄하게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악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얼마나 악행이 컸는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서 '''유일하게''' 사형 선고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 생애 == 1890년 [[강원도]] [[양양군]]에서 태어나 1911년 3월 관립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형사가 된 때는 1929년인데 그 때부터 16년 동안 평안북도 경찰부의 주임과 고등과장을 역임하면서 만주 독립군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며 누구보다 가혹하게 탄압했다. 그가 체포한 사람들 가운데는 [[홍범도]]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를 이끌었고 [[청산리 전투]] 때에도 독립군을 이끌고 참여했던 [[오동진(독립운동가)|오동진]] 장군, 의성단 단장을 역임했던 [[편강렬]], [[참의부]]의 [[장창헌]], 일목장군 이진무, 정의부의 김형출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중 낭림당 단장 장창헌과 김형출은 1924년 7월에 체포하면서 곧바로 '''직접''' 엽총을 쏴 사살해 버렸으며[* 이게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이냐면 [[노덕술]], [[하판락]], [[신상묵]] 같은 극악무도한 고문경찰들조차 아예 독립운동가를 체포한 자리에서 즉시 직접 총을 쏴 살해하는 만행은 저지르지도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정의부의 김형출과 그 부원 2명은 부하들에게 사살을 지시하며 그 자리에서 사살해 버렸다. 이진무는 사형 집행, 오동진은 1928년에 옥사, 편강렬은 옥중 고문으로 병을 얻어 가출옥 중 사망했다. 심지어 김덕기의 자백에 따르면 김덕기는 [[조봉암]], [[박헌영]], 심지어는 '''[[안창호]]'''까지 체포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1923년에는 [[의열단]]이 현직 경찰인 황옥과 함께 계획한 [[황옥 경부 폭탄사건|대형 의거 계획]]을 탐지하여 이를 저지함으로서 경찰 최고의 훈장인 경찰 공로기장을 받는 등 '공'을 인정받았다. 반민특위에서 김덕기가 한 자백에 따르면 자기가 취급한 독립운동가 관련 사건만 4000여건에 체포하고 검거한 독립운동가 숫자만 '''무려 1000여 명'''에 달하며 그 중 사형이 9.6%, 무기징역이 9.4%, 10년 이상의 징역이 10%, 1년 이상 징역이 71%에 달했다고 한다. 이쯤이면 '''조선의 [[롤란트 프라이슬러]]'''[* [[나치 독일]] 시기 독일의 대법원장격인 인민재판소장을 역임했고 인민재판소장을 역임한 3년 동안 혼자서 '''2,600여건'''의 사형 판결을 내린 것과(물론 이들 중에는 진짜 흉악범이나 [[간첩]]들도 있었지만, 반나치 [[정치범]]들도 굉장히 많았다.) 피고인들에게 가혹한 태도로 일관한 것 때문에 '피의 재판관'이라고 불린다. 김덕기가 직접 형량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그가 취급한 독립운동가 대다수가 무자비한 형량을 선고받았기에 프라이슬러와 비교해도 큰 무리는 없다.]라 봐도 손색이 없는 셈. 1934년 4월에는 쇼와 6~9년 사면 조군기장(漎軍記章)과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관료로 중용되어 1942년 평안북도 참여관 및 산업부장, 1943년에는 농상부장에 임명, 1944년 9월 조선철도간선 긴급증강 부산지방연락부 간사를 냈다. 하지만 김덕기의 이런 잘 나가던 출세가도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기점으로 꺾이게 되었다. 그가 경찰로 재직하던 북한 땅에는 [[소련군정]]이 들어섰고 소련군정은 간접 통치를 택하면서 북한 지역 내 친일파 청산 작업이 남한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밑돌을 깔아 주었다.[* 사실 통상적 인식과는 달리 북한도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에 있어서는 떳떳하지 못했는데, 당장 북한의 제2의 국가인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작사한 리찬(李燦, 1910~1974)도 일제강점기 말기에 선전 시를 지어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온 사람이다. 다만 남한이 노덕술, 신상묵은 물론이고 '''김덕기와 비견될 수준의 악질 친일파였던''' [[이종형]]처럼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지른 자들까지 모조리 면죄부를 주고 등용했기에 상대적으로 양호해 보이는 것일 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직접 죽이기까지 했던 이 악인을 당연히 살려둘 리는 없었기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김덕기는 곧바로 남한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이뤄지면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결성되었고 김덕기는 결국 체포되었으며, 그간의 악행이 낱낱이 밝혀지면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즉시 항소하여 항소심을 진행하다가 [[국회 프락치 사건]]이 터지면서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감형되었고 나중에는 [[6.25 전쟁]]이 터지기 전에 석방되었으나, 독립투사인 정이형 씨의 딸의 증언에 의하면 [[http://www.prehistory.co.kr/split99/kdk2182.htm|한국전쟁 직전에 정릉 근처의 산에 갔다가 추락사했다고]] 한다. == 여담 == * 친일인명사전에 그로 알려진 유일한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 대중들에게는 그가 '고문의 황제'로 알려져 있어 그가 직접적으로 잔혹한 [[고문]]을 자행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본인은 1949년 4월 27일에 있던 반민특위 1차 공판에서 장창헌을 손수 살해한 것과 오동진을 옥사케 한 것은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고문은 해본 적이 없다고 전면 부인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904270032920200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4-27&officeId=00032&pageNo=2&printNo=795&publishType=00020|#]] 지극히 당연하지만 그의 증언에는 신빙성이 없으며 '''설령 그가 고문을 하지 않았더라도 무수히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최악의 반민족 친일 경찰이란 것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분류:1890년 출생]][[분류:양양군 출신 인물]][[분류:전쟁 사망자]][[분류:몰년 미상]][[분류:강릉 김씨]][[분류:추락사한 인물]][[분류:일본 제국 경찰/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