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42년 출생]][[분류:1896년 사망]][[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김씨 계림군파]][[분류: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분류:김홍집 내각]][[분류:영의정]][[분류:좌의정]][[분류:온건개화파]][[분류:살해된 인물]][[분류:구타로 죽은 인물]]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의 야구선수, rd1=김홍집(야구))]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총리)] ---- || '''{{{#f0ad73 김홍집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조선 영의정(순조-고종))] ---- [include(틀:역대 조선 정승(순조-고종))]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60420, #b82642 20%, #b82642 80%, #960420)" [[영의정|{{{#fff '''조선 제249대 영의정'''}}}]]}}} || ||<-2> '''[[대한제국 총리|{{{#f0ad73 조선 제1·3대 내각총리대신}}}]][br]{{{+1 김홍집}}}[br]金弘集 | Kim Hong Chip[* 미국 공사관 측의 영문 표기]''' || ||<-2> {{{#!wiki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홍집.jpg|width=100%]][* 흔히 볼 수 있는 흑백 사진. 해당 사진은 1880년 2차 수신사의 일원이었던 김홍집이 [[일본]]에서 촬영한 것이다. 4년 뒤인 1884년에 [[퍼시벌 로웰]]이 촬영한 [[https://collections.mfa.org/objects/417815/his-excellences-the-minister-and-vice-ministers-of-foreign?ctx=04cb55b2-233c-4c1d-af1e-3969fda173f6&idx=48|사진(사모관대를 한 민영목 바로 오른쪽이 김홍집)]]과 더불어 현재까지 김홍집의 용모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2> '''출생''' ||[[1842년]]([[헌종(조선)|헌종]] 8년)|| ||[[한성부]][br](現 [[서울특별시]])|| ||<|3> '''사망''' ||[[1896년]]([[건양]] 1년) [[2월 11일]] (향년 53 ~ 54세)|| ||[[한성부]] [[경무청]](現 [[서울특별시]])|| ||[[아관파천]] 때 피살|| || '''묘소'''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br]→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br](現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8> '''재임기간''' ||제249대 영의정|| ||[[1894년]] [[7월 27일]] ~ [[8월 15일]][br]{{{-2 (음력 [[고종(대한제국)|고종]] 31년 6월 25일 - 7월 15일)}}}|| ||의정부 총리대신|| ||[[1894년]] [[8월 15일]] ~ [[1895년]] [[4월 25일]][br]{{{-2 (음력 [[고종(대한제국)|고종]] 31년 7월 15일 - 고종 32년 4월 1일)}}}|| ||초대 내각총리대신|| ||[[1895년]] [[4월 25일]] ~ [[5월 28일]][br]{{{-2 (음력 [[고종(대한제국)|고종]] 32년 4월 1일 - 5월 5일)}}}|| ||제3대 내각총리대신|| ||[[1895년]] [[8월 24일]] ~ [[1896년]] [[2월 11일]][br]{{{-2 (음력 [[고종(대한제국)|고종]] 32년 7월 5일 - 양력 날짜)[* [[1896년]]부터 [[태양력]] 시행. [[을미개혁]]으로 음력 [[1895년]] 11월 16일까지 음력 날짜, 17일은 양력 1896년 1월 1일로 변경.]}}}|| ||<-2> {{{#!wiki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style="margin: -6px -1px -11px" || '''시호''' ||충헌(忠獻) || || '''[[본관|{{{#f0ad73 본관}}}]]''' ||[[경주 김씨]] (계림군파 16세 ◯集 항렬) || || '''이름''' ||굉집(宏集) → 홍집(弘集) || || '''[[자(이름)|{{{#f0ad73 자}}}]]''' ||경능(敬能) || || '''[[아호|{{{#f0ad73 호}}}]]''' ||도원(道園), 이정학재(以政學齋) || || '''부모''' ||[[아버지]] 김영작[* 金永爵], [[어머니]] 창녕 성씨 || || '''형제자매''' ||[[형]] 김항집[* 金恒集], 김승집[* 金升集][br][[동생]] 김증집[* 金證集] || || '''배우자''' ||남양 홍씨 || || '''자녀''' ||[[아들]] 김경희[* 金敬熙], [[딸]][* [[이시영(정치인)|이시영]]의 아내였다.] || || '''친인척 ''' ||[[현조(5대조)|현조할아버지]]의 [[여동생]] [[인원왕후]][br][[사위]] [[이시영(정치인)|이시영]] || || '''학력''' ||[[진사|진사시]] {{{-2 ([[합격]])}}}[br][[성균관]] {{{-2 ([[수료]])}}}[br]정시문과 {{{-2 (급제)}}} || || '''종교''' ||[[유교]] {{{-2 ([[성리학]])}}} || || '''정당''' ||[[개화당|{{{#!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29176e; font-size: .9em" {{{#ffd800 '''개화당'''}}}}}}]] || || '''파벌''' ||보수사대파(1868 - 1880)[br][[개화파|온건개화파]](1880 - 1896) || || '''경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68년(고종 5년) 정시문과에 급제[br]권지승문원 부정자[br]승문원 부정자[br]승문원 박사[br]승정원 가주서[br]부사과[br]흥양현감[br]사과(司果)[br]호조참의[br]공조참의[br]병조참의[br]예조참의[br]광양 현감[br]예조 참의[br]제2차 수신사[br]경기도 관찰사[br]규장각 직제학[br]지춘추관사[br]예조판서[br]한성부 판윤[br]독판교섭통상사무[br]예조 판서[br]한성부 판윤[br]우의정[br]좌의정[br]판중추부사[br]좌의정[br]판중추부사[br]행(行)[* 품계 보다 낮은 직책을 맡으면 행자가 붙는다. 일종의 좌천] 수원부유수[br]영의정[br]총리대신[br]총리대신 겸 군국기무처 총재 }}} ||}}}}}}}}} || [목차] [clearfix] == 개요 == [[개화기]]의 [[정치인]]. 초명은 굉집(宏集). 그의 유고집으로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3715&cid=46623&categoryId=46623|김총리유고]]》가 있다. 1880년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바 있는 [[온건개화파]]이며, 1894년에는 총리대신으로서 [[갑오개혁]], [[을미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을미사변과 을미개혁의 단발령 등으로 분노한 민중에 의해 아관파천 직후 살해당했다.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갑오개혁 이후 최초의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총리]]'''이다. == 생애 == [[인원왕후]]의 아버지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5대손이며 그의 아버지 [[개성시|개성]]유수 김영작은 [[개화파]]의 선구자 [[박규수]]와 친분이 두터웠다. 그로 인해 김홍집이 개화파가 되는 계기는 여기서 만들어졌다고 보면 된다. 1867년 경과정 문과에 급제해 정7품직인 [[승정원]] 사변가주서에 임명된다. 부모님의 상을 5년간 치른 후 종3품 권지승문원부정, 부사과, [[훈련도감]] 종사관을 거쳐서 3년간 흥양[*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고흥]].]현감이 된다. 그 후 내직으로 [[승진]]하여 호조, 경조, 병조, 예조의 참의를 돌아가면서 지내고 1879년 돈녕도정을 지냈다. [[강화도 조약]]에서 일본이 요구한 [[인천광역시|인천]] 개항, 공사 주차, 해관 세칙 등의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서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1달간 [[도쿄]]에 머물면서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된 일본의 발전상을 보고 김홍집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협상은 실패했으나 이때 김홍집이 가져온 책이 [[청나라]] [[황준헌]]의 《[[조선책략]]》[*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조선은 [[러시아]]를 막기 위해 친[[중국]](중국과 친하고), 결[[일본]](일본과 손을 잡고), 연[[미국]](미국과 연대)을 해야 하며 미국은 [[정의]]의 나라니까 조선을 이롭게 만들어줄 거라고 말한다. 사실은 일본을 통해서 조선과 수교하려 했던 미국과 조선의 수교를 중계하면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우위를 보이고 싶었던 것이 책의 목적이었다. 실제로 이 책을 계기로 조선은 미국과 수교하고 이후 여러 [[국가]]가 청나라를 통해서 조선과 연결되니 청나라로서는 대성공작이었다.([[이홍장]]과의 견해에는 어느 정도는 거리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일본과 손을 잡으라는 대목이 그랬다.) 이 책의 내용을 본 [[위정척사파]]들은 [[영남 만인소]]를 쓰는 등 불쾌해했다.]이었는데 책에서 개화를 통한 근대화를 주장했다. [[관료]]와 [[외교관]]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예조참판[* 오늘날의 [[외교부]]+[[대한민국 교육부|교육부]] 차관]이 되고 1880년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면서 통상을 전담하는 당상경리사[* 지금의 통상교섭본부장과 비슷한 역할이지만 장관급.]가 되었다. 한때 위정척사파의 반대에 [[사표]]를 썼으나 얼마 안가 통리기무아문이 개편되면서 통상사당상[* 당상경리사와 같은 직위]이 되었다. 1882년 3월과 5월 사이에 [[신헌]]의 부관으로 미국, [[대영제국]], [[독일]] 제국과 차례로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으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때도 함께 갔다. 그 후 부제학에 임명되었고 호조참판, 공조참판,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1883년 [[규장각]] 직제학을 거쳐 1884년 예조판서와 독판교섭통상사무(督瓣交涉通商事務)를 겸임하여 대외 통상의 최고 책임자[* 오늘날의 외교부+산업통상자원부 장관]가 되었다. [[갑신정변]] 뒷수습을 위해 [[좌의정]]을 겸하고 1885년 일본과 [[한성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종1품 판중추부사라는 한직에 있다가 1887년 다시 좌의정이 되지만 사임하고 [[수원시|수원]]유수가 되어 [[백성]]의 반란으로 고생했다. [include(틀:김홍집 내각)]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총리교섭통상사무가 되어 청나라와 일본을 중재하면서 민심 수습과 내정 [[개혁]]의 필요성을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 강조했다. 1894년 7월 일제의 강요[* 이때 일본은 [[군대]]를 이끌고 기습해서 [[경복궁]]을 포위했다. 갑오개혁은 이 시점에서 시작되고 [[동학]] 농민군이 2차 봉기를 한 것도 이 때문이다.]로 세워진 초정부적 내정 개혁 기구인 [[군국기무처]]의 총재관[* 양지아문(측량 산업에 집중한 오늘날의 [[국토교통부]])의 장관.]이 된다.(제1차 김홍집 내각) 당시 김홍집의 활약은 놀라운데 12월에 군국기무처가 해체될 때까지 제1차 갑오개혁의 총책임자가 되어서 약 210건의 개혁을 단행했다.[* 어느 정도 수준이냐면 군국기무처가 활동한 기간이 7월 말부터 12월 초까지였는데 약 120일간 210건, 하루에 2건을 처리한 셈이다.] 이 시기는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 때문에 일본의 간섭이 조금 약해지고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를 대놓고 쫓아내려고 할 정도로 억압했고 일본은 도리어 [[섭정]]으로 뛰어들었던 흥선대원군을 배제하고자 하면서 김홍집이 가장 의욕적이고 독자적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했던 시기이다. 하지만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이 일본의 의도대로 끝나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가 귀국하면서 박영효와의 연립 [[내각]]이 수립되어(제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 정국의 무게추는 일본에 넘어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홍범 14조]]를 발표하고 제2차 갑오개혁을 시작했는데 의정부는 내각, 각 아문은 부로 개편되고 7부의 제정과 군제 개편 등을 하였지만 역시 [[돈]]이 딸려서 개혁은 중단된다. 이후 일본의 지원을 받은 [[박영효]], [[서광범]] 등 급진 개화파와의 갈등이 심화되어서 결국 사임하기도 하는 등 실권이 없어졌다.(사실상 박영효 단독 내각)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8dc94910c91c47e199b169b7e7aaf7a8_tplv-mlhdmxsy5m-q75_0_0.image.jpg|width=100%]]}}} || || '''말년의 모습'''[* [[1894년]] [[8월 11일]]의 모습] || 1895년 4월 [[삼국간섭]]이 일어나고 박영효 내각이 붕괴되는데 안 그래도 일본 우위의 방식이 마음에 안 들던 고종은 김홍집을 파면하고 1895년 5월 17일 갑오개혁 [[무효]]를 선언해버렸다. 개혁 내용이 마음에 안 들었다기보다는 일본이 마음에 안 들었다는 느낌의 행동으로 보인다. 이후 임시로 [[박정양]]과도 내각이 형성되었는데 1895년 7월 박영효의 [[반란]] 음모 사건이 터지면서 붕괴된다. 이후에는 명성황후가 주도해서 친미파와 친러파에 더해서 김홍집과 다시 제휴하여 제3차 갑오개혁을 시도했다.[* 이때 친러파 혹은 친미파로 유명한 이가 바로 [[이완용]]이다.](제3차 김홍집-박정양 연립 내각)[* 다만 이 시기의 김홍집은 [[얼굴마담]]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이걸 김홍집 내각으로 인정하지 않기도 하고 갑오개혁을 기준으로 보아서 이 시기와 박영효의 연립 내각 시기를 합쳐서 제2차 김홍집 내각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면 김홍집 내각은 이후 성립될 것을 포함해 총 3차가 된다. 그러나 본문처럼 지금의 내각을 별개의 김홍집 내각으로 인정하면 3차 내각이 되고 이후까지 총 4차가 성립된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구성한 내각에 김홍집도 참여했다.(제4차 김홍집 내각) 이때 참여한 인물이 [[친일]] 성향이 강한 [[조희연(1856)|조희연]], [[유길준]] 등으로 조희연과 유길준이 고종의 [[상투]]를 자르고 [[단발령]]까지 추진하니 민중들의 반발이 격해졌다. 이것이 제3차 갑오개혁 혹은 [[을미개혁]]이다. 이런 틈에 끼어 있던 김홍집은 을미개혁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결국 [[욕]]이라는 욕은 다 먹게 되었다. 김홍집은 국모 [[시해]]의 책임을 지고 [[자결]]을 하려 했으나 "대감이 죽어서 이 일이 해결된다면 모르겠으나 실상은 해결될 일이 아니다"는 유길준의 만류로 그만뒀다.[* 안승일(2016)을 참고하면 이 즈음에 김홍집의 가족들이 김홍집의 자살을 우려하여 유길준에게 어떻게 좀 말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때 유길준과 김홍집 사이에서 오간 말은 다음과 같다. >'''유길준''': 대감! 좀 고정하십시오. 대감께서 돌아가셔서 모든 것이 수습된다면 모르지만, 모후께서는 이미 참변을 당하셨고 사태는 기왕 벌어진 일입니다. 우리는 거꾸로 일격을 당한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태를 수습하는데 노력하는 것도 충절이 될 것입니다. 대감께선 그 뒤에 가서 돌아가신다 해도 늦지 않으니 제발 고정하시고 심사숙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김홍집''': 유공(유길준)! 그대가 말하는 뜻은 다 알겠소.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보전과 개혁을 위하여 모든 굴욕을 참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번 사태만은 절대로 저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세록지신(世祿之臣)[* 대대(代代)로 나라의 녹봉(祿俸)을 받은 신하(臣下).]으로 또 일국의 중신된 자가 국모의 참변을 보고 어찌 살아서 폐하와 만백성을 대할 수가 있겠소? 나는 유공의 처지와 다릅니다. 유공은 어떤 난국이라도 극복해서 앞으로 이 나라를 건져야 할 사명이 있지만 내가 할 일은 이제 내 스스로 죽는 일밖에 없소.[* 유동준(2005:205-206), "유길준전". 안승일(2016:253), "김홍집과 그 시대"에서 재인용.] 김홍집 내각은 백성들의 일관된 [[여론]]인 '반일, 반외세'에 반할 뿐 아니라 [[을미사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일본 측에 유리하게 처리했다는 의혹까지 얻게 되었고[* 민비를 폐서인하는 데 [[서명]]하고 당시 왕태자였던 [[순종(대한제국)|순종]]의 반발에 다시 빈으로 올린다고까지 했으니 욕을 안 먹을 수 없었다.] 김홍집의 운명도 대략 정해졌다. 김홍집은 [[총리대신]]으로서 내각에 참여할 것을 수락할 때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것 같은데 총리대신 수락을 반대하는 [[가족]]들에게 "이 난세에 상감께서 잠을 못 이루고 조르시니 어찌 내 한 몸이나 아끼려고 거부할 수 있겠느냐? 부득이 어명대로 승낙했으니 내 생명은 이미 각오한 바이다. 너희들도 미리 짐작하여라"라고 못박았다고 한다.[*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2]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주한러시아공사관|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한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하고 친러 내각이 수립된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오자마자 을미사적[* 총리대신 '''김홍집''', 내부대신 [[유길준]],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군부대신 [[조희연(1856)|조희연]]]과 법부대신 [[장박]][* 이후 장석주로 [[개명]]하였다.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매우 박식하여 '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을 [[역적]]으로 선포하고 처형을 명령한다. 친러 정권들은 즉각적으로 [[의병]]과 [[보부상]] 수천 명을 동원하였고 경복궁에 경관들을 배치하였는데 일본 [[군인]]들은 [[총검]]을 날카롭게 세우면서 김홍집, 정병하, 유길준을 [[호위]]하였다. 유길준, 조희연, 장박 등이 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망명하는 와중에 김홍집은 고종을 직접 배알하여 회심을 촉구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죽을 각오로 [[거리]]로 나섰다. 지금 나섰다가는 죽을 것이라고 만류하는 [[일본군]]을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뿌리쳤다. > "시끄럽소! 일국의 총리대신으로서 백성에게 죽는 건 천명이오! 남의 나라 군인의 도움까지 받아서 살고 싶지는 않소!" 이후 직접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다가 일개 [[순사]]에게 붙잡혀[* 혹은 내무실에서 경무청 순사들한테 잡힌 후 [[참살]]당했다고 한다[[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2105189|(유영익 2002:129-130)]]. 물론 그 후에 시신이 청계천에 유기된 건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정병하[* 급진 개화파로 [[김옥균]]과 가깝게 지냈던 인물이다. 이 사람은 단발령 시행 당시에 고종의 [[머리카락]]을 직접 잘랐으며, 을미사변 당시 [[일본인]]들의 침입을 알고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보고한 사람이다.]와 함께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앞으로 끌려간 다음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동원한 지방에서 올라온 보부상[* 일본 공사관 기록에 의한 것이다. 보부상은 훗날 만민 공동회를 [[폭력]] 습격할 때도 동원되는 만큼 고종이 자신의 반대파를 박해하기 위한 어용 폭력 조직으로 자주 활용되었다.]들에게 [[돌]]을 맞고 집단 [[구타]]당한 끝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이에 끝내지 않고 두 대신들의 사지를 찢고 [[종로]]까지 시체를 끌고 가면서 그야말로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 [[종로]] 거리를 [[피바다]]로 만들어버렸다.[* 구한말 [[선교사]]였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부인은 길거리에서 온몸이 피에 젖고 눈빛이 무서운 사람들을 보았다고 하면서 알고 보니 그들이 김홍집을 살해했다고 저서인 <15 Years Among Top-Knots>('상투의 나라 조선', '조선 견문록'이라고 출판되기도 했다.)에서 서술하고 있다.] 김홍집의 가족 또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는데 [[연좌제]]를 통한 처벌이 내려질 것을 예상한 김홍집의 부인은 아들을 죽이고 자결한 것이다. 한편 살아남은 [[유길준]], [[조희연(1856)|조희연]], [[장석주]]는 [[경술국치]] 때까지 살아남아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으며 그나마 강직한 유길준은 [[남작]] 작위를 거절했다.[* 본인은 남작 작위는 거절했지만 은사금으로 나온 [[상금]]은 받았으며 유길준 일족 중에는 작위를 받은 사람과 골수 친일파가 된 인물들이 넘쳐난다.] 조희연은 죽을 때까지 남작 작위를 갖고 있었고[* 반납해서 [[세습]]하지는 않았다.] 장석주는 대대로 작위를 [[세습]]했다. == 평가 == 김홍집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엇갈리는데 한때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을 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이완용]]이랑 함께 일하고 [[박영효]]랑 손을 잡았으며 [[조희연(1856)|조희연]], [[장석주]]를 포함해서 죽지 않은 이들은 모두 친일파가 되었다. 그런데 정작 당시 박영효는 김홍집을 [[친일파]]라고 비판했다.] 허나 김홍집을 이완용, 박영효와 동급의 친일파로 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이고 지나치게 [[이분법]]적이고 편협한 시각이다. 애초에 [[갑오개혁]]이 일본에 의한 타율적인 개혁이라는 이유만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논리는[* 제1차 갑오개혁 시행 시기는 [[청일전쟁]] 와중이라서 일본이건 청이건 조선의 세세한 부분까지 건드릴 여유가 없었다. 본격적으로 친일 내각이 포함되는 것은 박영효가 들어온 다음부터다.] 성립할 수 없는 것이 20세기 5년이 남은 1895년에 신분제 폐지, 연좌제 폐지, 과부 재가 허용, 청나라 사대 폐지, 왕실 재정 분리 등은 일본의 강요와 무관하게 이미 진작에 했어야 하는 것이었고, "외세가 강요해서 한 것이면 신분제 타파이고 근대교육이고 다 때려치자"는 건 [[위정척사파]] 논리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시기 국정 책임자들에도 [[친러]]파와 [[친미]]파가 포함되는 혼돈의 [[카오스]]였으며 김홍집은 [[갑오개혁]]의 [[얼굴마담]]이자 중재자로 계속 포함되어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이 박영효를 귀국시켜 김홍집과 연립 [[정권]]을 구축한 것은 일본이 김홍집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견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김홍집에게 공동으로 정권을 맡긴 것은 명백한 친일파인 박영효에게 단독으로 정권을 맡길 경우 반발이 불보듯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김홍집을 이용한 것이었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일본]]으로 도주하여 편안한 말년을 보낸 이들과 달리 일본의 보호를 거부하고 군중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도 거리에 나선 김홍집의 행동은 사리사욕을 위한 행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김홍집의 5대조 경은부원군 김주신은 왕의 장인이었음에도 정치에 일절 개입하지 않고 사리사욕과는 담을 쌓은 채 평생 근신하는 모습을 보여 [[외척]]의 모범으로 칭송받았고 이러한 가풍은 김홍집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일생동안 김홍집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친일을 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김홍집에 비판적인 이들조차 김홍집이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일국의 대신으로서 가져야 할 철학이나 신념이 확고하지 못하고 줏대가 없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당시 [[풍전등화]]의 정국에서 나라를 살려보기 위해 여러 세력을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친일이라고 알려진 것과 달리 일본 세력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위정척사파, 친청파, 친러파, 친미파 세력과 제휴하기도 했다. 오히려 한 세력에 일방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을 등용한 것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영의정과 총리대신을 지낸 것, 여러 차례 정권이 바뀌면서도 지속적으로 등용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한말 관료 중에 정무 능력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했다. 그래서 [[별명]]이 '''비 오는 날의 나막신'''이라고 불렸으며 [[최익현]] 등 일부 골수 [[위정척사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김홍집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갑신정변]]에서 살해당한 [[홍영식]]을 거만하다고 비판했던 매천 [[황현]]마저도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고 재간과 지략은 속류배가 따를 바가 못 되었다"며 "그의 죽음에 세인들은 모두 애석해했다."라고 평했다. [[시인(문학)|시인]]이자 [[사학자]]로서 죽기 전까지 친일파 연구를 해왔던 [[임종국(1929)|임종국]]은 김홍집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 "김홍집의 최후가 이렇게 숙연하거늘 어느 누가 그를 친일파라고 욕하겠는가? '일국의 총리로서 동족에게 죽는 게 ''''천명''''이라고 갈파한 살신성인의 투철한 정치 책임으로 '일본의 앞잡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김홍집을 '한말의 위대한 정치가'라고 평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역사학자 박은숙 박사는 저서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에서 [[김옥균]]을 우호적으로 평가하며, 반대 급부로 김홍집을 비판하기도 했다.[* 박은숙의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6482|김기협의 서평이 있으니]] 참조하길 바람.] === 대외관 === 김홍집은 주변국 가운데 [[러시아]]를 가장 위협적으로 생각했고 이를 막기 위해 일본과 [[청나라]]의 힘을 적절히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김홍집이 처음 조선으로 가지고 들어온 <[[조선책략]]>의 내용이다. 조선 말기 [[개화파]]들의 특징이 자신들이 처음 배운 내용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했다는 것으로 청나라에 가서 [[양무운동]]을 보고 온 사람들은 친청파가 되었고 일본에 가서 [[메이지 유신]]을 접한 사람은 친일파가 되었으며 미국에 [[보빙사]]로 간 사람들은 친미파가 되었다. 대다수가 이런 식이었는데 김홍집은 [[조사 시찰단]]으로 일본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친일, <조선책략>으로 반러가 된 경우이다. 그러나 이를 해외 정세에 어두웠던 [[조선]]의 인물로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사고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러시아를 위협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조선 사람 김홍집뿐 아니라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배하기 전까지 '''당대 세계인들이 모두가 그랬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는 후대인의 관점에서는 말기 [[러시아 제국]]의 이런저런 문제점이 눈에 띄어서 '''속 빈 [[강정]]'''처럼 보이겠지만 [[19세기]] 말 당대인의 관점에서 러시아는 아시아를 정복할 기세의 대[[제국]]이었고 여기서 호적수는 오직 [[영국]]뿐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랬기 때문에 [[그레이트 게임]] 같은 국제적 쟁탈전이 벌어진 것이고,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배했을 때에도 세계적으로 경악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기본 체급부터 전술까지 러시아가 압도하고 있었고 러시아가 패배한 이유도 내부 사정 때문에 전쟁을 지속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딱히 전황이 불리하지 않았다. 일본이 러시아에게 배상금 얘기를 꺼내자 러시아는 전쟁을 다시 할거라고 말했고 일본 외교관들은 빈 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국제 정세상 [[만주]]에 더 관심이 많았던 러시아가 [[한반도]] 본토를 1차 타겟으로 잡고 있던[* 사실 이마저도 러일전쟁 전엔 '조선을 존속시키고 종주권만 휘두를지, 아예 합병을 할지' 일본 정계 내부에서도 합의가 없었다.] 일본보다는 나았음이 밝혀졌지만, 이 역시 역사를 다 알고 있는 현대인만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고, 당대인 시점에서 보면 [[베이징 조약]]으로 이미 기존에 인근 지역인 [[연해주]]를 [[청나라]]로부터 강탈해간 러시아를 더 경계하는 것이 당연했다.[* 심지어 1910년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은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무효화되었지만 베이징 조약 때 이루어진 연해주 할양은 21세기까지 효력이 유지되고 있다.] 당시의 그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것을 김홍집이 몰랐다고 죄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생각은 이후 고종과 [[독립협회]]의 대립 과정에서도 다시 재현되는데 고종은 일본을 배제하고 러시아를 포함하여 협정을 맺으려 했고 독립협회는 러시아를 배제하고 일본을 포함하려고 했다. 특히 독립협회의 경우는 친미, 친일 세력이어서 자신들의 연줄인 미국과 일본을 옹호하려고 저런 주장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는데 김홍집은 당시에 만일 살아서 정계에 있었다면 고종을 위해서 일했을 [[위인]]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김홍집을 '''[[애국]]적 [[친일파]]''' 또는 '''[[친일]]적 [[애국자]]'''라 부르기도 한다.[* 사실 [[친일]]이라는게 [[친일반민족행위자]] 때문에 나쁜 것으로 여겨지지만 조금만 더 편견없이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일본을 지향하는 사상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 기타 == 김홍집의 사위는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인 성재 [[이시영(정치인)|이시영]]이다. 이 인물은 [[이항복]]의 후손이기도 하다. == 대중매체 == * 1959년 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에서 배우 [[박암]]이 연기했다. * 1974년 [[동양방송|TBC]] 드라마 <총리대신 김홍집>에서는 배우 [[최무룡]]이 연기했다. * 1982년 [[KBS]] 드라마 <[[풍운(KBS)|풍운]]>에서는 배우 [[김세윤]]이 연기했다. * 1987년 [[KBS]] 드라마 <[[이화(드라마)|이화]]>에서는 배우 [[임혁]]이 연기했다. * 1990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대원군'에서는 배우 [[최상훈]]이 연기했다. * 1994년 [[MBC]] 드라마 <[[새야 새야 파랑새야]]>에서는 배우 [[박영지]]가 연기했다. * 1995년 [[KBS]] 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는 배우 [[임혁주]][* 1995년 [[KBS]] 드라마 <[[서궁(드라마)|서궁]]>에서는 [[임해군]] 역,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맹사성]] 역,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박영규]] 역,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장택상]] 역.]가 연기했다. * 2001년 [[KBS]] 드라마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는 배우 강태기[* [[무쓰 무네미쓰]]와 1인 2역을 맡았다. 2013년 3월 12일 사망.]가 연기했다. * 2019년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는 배우 황만익이 연기했다.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 황태자를 교육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 [include(틀:아관파천)] ---- [include(틀:개화당)] ---- [include(틀:온건개화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