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amPhuong.jpg]] || || Nam Phương / 南芳皇后 阮有氏 || |||| 1914년 12월 14일 ~ 1963년 9월 16일 (향년 48세) || [[베트남 제국]] 마지막 [[황제]] [[보대제|바오다이]]의 [[황후]]. 절세미인으로 유명하다. 남프엉이라는 이름은 '남쪽으로부터 오는 향기(南芳)'라는 뜻이다. 꽃다울 방([[芳]]) 자를 쓴다. 휘는 응우옌흐우티란(Nguyễn Hữu Thị Lan, 완유씨란(阮有氏蘭)). 베트남 남부 [[재벌]] 가문의 딸이다. 12살 때 [[파리(프랑스)|파리]] 부근 뇌이쉬르센의 가톨릭 학교에서 유학했고 이 때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프랑스식 이름은 마리테레즈(Marie-Thérèse).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서, [[불교]]를 믿는 황실에서 가톨릭 신앙 유지를 조건으로 바오다이의 [[황후]]가 되었다고 한다. 내막을 살펴보면, 식민통치를 하는 [[프랑스]]가 바오다이를 천주교로 개종시켜 보고자 하였고, 바오다이의 황후로 천주교도를 고른 게 남프엉이었던것.[* 이에 대해 바오다이의 모친 단휘황태후(端徽皇太后, 휘는 黃氏菊/Hoàng Thị Cúc, 1890-1980)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다만 황후가 된 후 남프엉은 기존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는 한편 불교를 존중하여 사원 행사에도 참석하는 등 종교에 매우 포용적인 행보를 보이며 더욱 인기를 끌었다. [[1934년]](보대 9년) [[3월 24일]]에 결혼했다. 바오다이는 프랑스 유학 후에도 천주교로 개종하지 않았지만, 남프엉 황후와 아들은 천주교 신자였다. [[중국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바오다이는 [[1935년]] 장인 응우옌호하오(Nguyễn Hữu Hào, 阮有豪, 1870-1939)를 융미후(隆美侯), 즉 [[후작]]에 봉하고 2년 후에는 융미군공(隆美郡公), 즉 [[공작(작위)|공작]]으로 승작시켰다. 그리고 [[절일]]은 아직 [[음력]]을 썼는지 황후의 [[생일]]인 음력 10월 17일은 '장희절(長熙節), [[결혼기념일]]인 음력 2월 10일은 '문정절(文定節)'이었다고 한다.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보륭(바오롱) 황태자(1936-2007), 보승(바오탕) 황자(1944-2017)는 모두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현 응우옌 왕조의 왕위요구자는 바오다이와 다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 이다.] 그리고 맏딸 방매(프엉마이) 공주(1937-2021)는 [[피에트로 바돌리오]]의 장남 피에트로(2대 아디스아베바 공작)와 결혼해서 아들 플라비오(1973-)와 딸 에마누엘라(1979-)를 낳았다. [[한국]]으로 치면 [[이방자]]와 비슷한 포지션으로, 실제로 남프엉 황후도 자선활동 같은 걸 하며 사랑 받았다고 한다. [[호치민]]이 황실에 대한 예우로 1만 달러에 달하는 돈을 생활비로 주었으나, 폐위된 황후는 그 돈을 모두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지금 시각으로 봐도 빼어난 [[미인]]이라 그런지 [[베트남]]에서는 지금도 상당히 인기가 있다고 한다. 물론 남편인 [[바오다이]]는 전혀 인기 없고. 바오다이는 소문난 [[바람둥이]]에다 공식적인 [[후궁]]도 몇 명 두었고 그녀 사후 [[재혼]]도 했지만 다들 첫 황후보다 못했다는 평이다. 워낙 옛날 [[사람]]이라 돌아다니는 [[사진]]도 얼마 안 되지만 요즘 같았으면 [[언론]]의 빅스타였을 듯. 여담으로 [[응우옌 왕조]]의 역대 황후들 중에서 [[추존]]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 황후 칭호를 받은 단 둘뿐인 사람이다.[* 다른 한 사람은 왕조의 초대 황제 [[가륭제]]의 첫 황후인 투아티엔(承天高皇后, 승천고황후).] [[1963년]] 48세때 프랑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분류:응우옌 왕조 황후]] [[분류:1914년 출생]] [[분류:1963년 사망]][[분류:띠엔장 성 출신 인물]][[분류:심장마비로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