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가톨릭 교황)] ||<-5><#806600> [[교황|[[파일:교황 문장.svg|height=40]] '''{{{#FFF 가톨릭 교회의 교황}}}''']] || ||<-5> [[파일:155_niccolo_II.png|height=125]] || || 제154대 [[스테파노 9세]] || → ||<#806600> '''{{{#FFF 제155대 니콜라오 2세}}}''' || → || 제156대 [[알렉산데르 2세]]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D9A100, #EFBC00 20%, #EFBC00 80%, #D9A100);" '''{{{#670000 제155대 교황[br]{{{+1 니콜라오 2세}}}[br]Nicolaus II}}}'''}}}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니콜라오2세.jpg|width=100%]]}}}|| || '''교황명''' ||니콜라오 2세 (Nicolaus II) || || '''본명''' ||제라르 드부르고뉴 (Gérard de Bourgogne)[br]제라르 랄로브로주 (Gérard l'Allobroge)[br]제라르 드로랭 (Gérard de Lorraine) || ||<|2> '''출생''' ||[[990년]]~[[995년]] 사이 ||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width=25]] [[신성 로마 제국]][br][[파일:아를 왕국 문장.svg.png|width=20]] [[아를 왕국]] [[알베르빌|메르퀴리]] 셰브롱 궁전 || ||<|2> '''사망''' ||[[1061년]] [[7월 27일]] (65~71세) ||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width=25]] [[신성 로마 제국]] [[피렌체]] || || '''재위기간''' ||[[1059년]] [[1월 24일]] ~ [[1061년]] [[7월 27일]] || || '''언어별[br]명칭''' ||[[라틴어]]: Nicolaus PP. II[br][[이탈리아어]]: Papa Niccolò II[br][[영어]]: Pope Nicholas II || [목차] [clearfix] == 개요 == 제155대 [[교황]]. 성직자들과 [[로마]] 귀족들이 선출하던 기존의 교황 선거 방식을 [[추기경]]들이 선출하는 방식으로 개혁을 단행한 인물이다. == 교황 선거법 개혁 == 당시 부패해진 교회를 두고 개혁파 성직자들은 그 근본적인 원인이 교황 선거 방식이 잘못되었고, 세속 권력의 영향을 받아 오남용되었던 서임권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을 의식한 니콜라오 2세는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고 세속 권력으로부터의 교회 간섭을 방지하기 위해 교황 선거법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1056년 교회를 좌지우지하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6살이라는 어린 나이의 [[하인리히 4세]]가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자, 교황은 이때가 교회가 황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했고 1059년 4월 13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니콜라오 2세는 칙서 <주님의 이름으로{{{-1 ''(In nomine Domini)''}}}>를 공표해 교황 선거법 개정을 단행했다. 새로운 선거법의 중요 사항은 일반 성직자와 로마 귀족들 및 군주들을 포함한 평신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교황 선출권을 오로지 [[추기경]]들에게만 부여한다는 것. 추기경 이외의 다른 성직자들은 선거에 참여하려면 추기경의 선정과 동의가 있어야 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추기경들이 선출한 교황을 승인하는 권리만을 가지게 했다. 이뿐만 아니라 개혁파 성직자들과 협력을 해 다양한 개혁들을 추진했으며 이러한 개혁들이 향후 교황권이 확립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니콜라오 2세는 개혁에 대한 반발에 대비하여 [[노르만족]]과의 관계를 개선해 우호적인 관계를 다졌고, [[밀라노]]의 개혁 세력과도 협력해 밀라노 교구를 [[교황청]]으로 종속시켜 교황의 지리적 영향을 확장했다. 이러한 교황의 정치로 [[교황령]]이 신성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간섭을 벗어나 독립적인 지위를 점하게 되었으며 추기경의 위상이 상승하는 발판이 되었다. [[분류:990년 출생]][[분류:995년 출생]][[분류:1061년 사망]][[분류:사부아 출신 인물]][[분류:신성 로마 제국의 인물]][[분류:프랑스인 교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