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나치 독일에 침투한 간첩, rd1=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쿠즈네초프)] [include(틀:소련군/원수)] ---- || '''{{{#ffe400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소련 국방장관)]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40000, #D40000 20%, #D40000 80%, #a40000)" '''{{{#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2대 해군장관[br]{{{+1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 쿠즈네초프}}}[br]Никола́й Гера́симович Кузнецо́в[br]Nikolay Gerasimovich Kuznetsov}}}'''}}}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Nikolai_Kuznetsov_3.jpg|width=100%]]}}} || ||<|2> '''출생''' ||[[1904년]] [[7월 24일]] || ||[[러시아 제국]] 볼로그다현 벨리코우스튜즈스키군[* Великоустюжский.] 메드비드키[br](現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아르한겔스크주]] 코틀라스스키군 메드베드키)|| ||<|2> '''사망''' ||[[1974년]] [[12월 6일]] (향년 70세) || ||[[소련]]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노보데비치 묘지|| ||<|8> '''재임기간''' ||제4대 해군인민위원|| ||[[1939년]] [[4월 28일]] ~ [[1946년]] [[2월 25일]]|| ||초대 해군 총사령관 {{{-2 (1기)}}} || ||[[1939년]] [[7월 24일]] ~ [[1947년]] [[1월 17일]] || ||초대 해군 총사령관 {{{-2 (2기)}}}|| ||[[1951년]] [[1월 20일]] ~ [[1956년]] [[1월 5일]]|| ||제2대 해군장관|| ||[[1951년]] [[7월 20일]] ~ [[1953년]] [[3월 15일]]||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부모''' ||[[아버지]] 게라심 표도로비치 쿠즈네초프 || || '''학력''' ||쿠즈네초프 해군사관학교 {{{-2 (졸업)}}} || ||<|2> '''복무''' ||[[소련 해군|소비에트 연방 해군]] || ||[[1917년]] ~ [[1956년]] || || '''최종 계급''' ||[[원수(계급)|소비에트 연방 함대 제독]] {{{-2 (소비에트 연방 해군)}}} || || '''주요 참전''' ||[[제1차 세계대전]][br][[스페인 내전]][br][[독소전쟁]] || || '''주요 서훈''' ||[[소비에트 연방 영웅]][br][[레닌훈장]] (4회)[br][[우샤코프 훈장]] 1등급 (2회)[br][[적기훈장]] (3회)[br][[적성훈장]] ||}}}}}}}}} || [목차] [clearfix] == 개요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46affa94784b3c40dc1a051f042d5e39.jpg|width=100%]]|| || [[해군]] [[장교|군관]] 예복을 입은 초상화 || [[소련 해군]]의 [[장성급 장교|장성]]으로 '''소련 해군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해군 [[원수(계급)|원수]] 및 해군 [[장관]]을 역임하였다. == 생애 == === [[출생]]과 [[성장]] === [[북극해]] 연안인 [[아르한겔스크]]에서 [[세르비아]]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러시아 혁명]] 직후에는 너무 어려서 징집 대상에서는 제외되었는데도 나이를 속여서 붉은 함대에 [[입대]]했고, [[1919년]]에 북방 드비나 분함대에서 근무하였다. 당시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군]]은 완전히 해체 상태였고, 새로 창립된 [[붉은 군대]]의 해군은 제대로 된 함정이 거의 없었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페트로그라드]] 해군사령부에서 근무하였다. 쿠즈네초프는 [[1926년]] 고급해군학교를 졸업한 이후, [[순양함]] 체르노바 우크라이나에서 근무하였다. [[1932년]]에는 다시 해군대학을 졸업하고 순양함 크라스니 캅카스("붉은 [[캅카스]]"라는 뜻)에 근무하였다. [[1934년]]에는 최초로 근무했던 체르노바 우크라이나에 [[함장]]으로 돌아와 근무하였다. 이러는 동안 그는 탁월한 지휘를 보여 군에서 주목받았으며, [[1936년]]에는 [[스페인 내전]]에 공화국측 군사 고문으로 파견되었는데, 이 때 [[파시즘]]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 === 독소전쟁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uznetsov1.jpg|width=100%]] || || 해군 군관 예복을 입은 쿠즈네초프 || [[1938년]]에 귀국한 뒤에는 34세의 [[나이]]로 [[제독]]에 이르러 소련 [[태평양함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때 소련 해군도 육군과 마찬가지로 [[대숙청]]의 여파가 덮쳐서 많은 장교들이 [[니콜라이 예조프]]의 [[NKVD]]에 끌려갔다. 쿠즈네초프는 자신 또한 [[반동]]으로 몰려 숙청될 가능성이 있음에도 이를 감수하고 용감하게 이에 대해 크게 항의하였고, 많은 장교들의 신원보증을 서줘 석방시키기도 했다. 능력이나 인품이 탁월했기 때문에 태평양함대사령관이 된 지 1년만인 [[1939년]] 해군장관에 임명, 1939년 3월 전연방공산당 18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이 자리를 맡으면서 소련 해군을 지휘하였다. 쿠즈네초프는 해군 장관 시절 소련 해군이 [[서방]]이나 [[독일]]에 맞서기에 너무 빈약하다는 것을 지적하며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에게 대양함대 육성 계획을 발표했다. [[해군력]] 양성에 관심이 있던 스탈린은 쿠즈네초프의 [[함대]] 육성 계획을 지지했고 이에 대한 재원 마련에 들어갔지만, 독소전쟁이 발발하며 그 [[예산]]은 모두 [[지상군]]으로 전용되었다. [[독소전쟁]] 발발 직전 스탈린은 공식적으로 군에 경계령을 내리는 것을 금했으나, 이를 순순히 받아들인 육군과는 달리 쿠즈네초프가 지휘하는 해군의 모든 함정은 경계령에 들어가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에 당한 피해가 매우 적었다. 스탈린은 쿠즈네초프가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해 무척 화를 냈지만 [[우디르급 태세전환|소련 해군의 피해상황을 보고받자 화를 풀고 쿠즈네초프를 칭찬했다.]] 쿠즈네초프는 해군 장관으로서 [[총사령관]] 스탈린, 총사령관 대리 [[게오르기 주코프]],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공군 사령관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등과 함께 [[스타프카]](최고지휘부)의 멤버였다. [[무르만스크]]로 들어오는 [[연합국]] 수송선단을 보호하는 작전을 감독하기도 하고, 특히 [[흑해]] 방면 작전에 [[힘]]을 기울였다. [[독일 해군]], [[크릭스마리네]]는 [[지중해]]에서 강력한 [[영국 해군]]에 가로막혀 [[흑해]]까지 일부 [[U보트]]와 [[소해정]], [[슈넬보트]] 정도밖에 진출하지 못했고, 쿠즈네초프는 이런 [[제해권]]을 이용하여 상륙전 교리를 개발하고 직접 실행시키기도 했다. 이런 업적으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및 [[이반 이사코프]] 제독,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제독과 함께 해군에 단 3명 뿐인 원수가 되었다. === 전후 === 전쟁후에도 [[1947년]]까지 해군총사령관 및 [[국방부차관]]을 역임하고 있었으나, [[1947년]]에 스탈린의 명령으로 근무불성실 혐의로 다른 제독들과 함께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에서 쿠즈네초프는 [[중장|상장]]으로 2계급 강등 조치로 경미하게 처벌받았지만, 같이 체포된 제독들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51년]] 스탈린은 다시 변덕을 부려 쿠즈네초프를 해군장관으로 임명했지만 계급을 복귀시켜주지는 않았다. 1952년 10월, 소련공산당 19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55년]] 스탈린 사후에야 계급이 복귀되었다. 그러나 쿠즈네초프는 육군을 중시하는 당시 [[상관]]인 국방장관 주코프 육군 원수와 사이가 매우 안 좋았고,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1955년]] [[8월]] [[전함]] 노보로시스크[* 원래는 [[2차 대전]] 종전후 3대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로부터 전쟁배상조로 받아낸 [[이탈리아 해군]]의 전함이었다. 당시 소련은 신형이었던 비토리오 베네토급을 원했지만 당연히 영/미의 반대로 구형전함(1차대전형 전함으로 1930년대말 이탈리아가 대대적으로 마개조했다. 당시 마개조한 이유도 [[프랑스 해군]]이 독일의 장갑함(그라프 쉬페급)건조에 대응해 됭케르크급을 건조하자 이탈리아 해군도 됭케르크급에 대항할 신형함이 급히 필요한데 신형함 건조에는 시간이 모자라다고 판단, 기존의 구형전함들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친 것이었다.)을 받았는데 항구에 정박중 2차대전중 독일이 흑해에 뿌린 부유기뢰가 흘러들어와 함체와 접촉하여 폭발, 함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는데 전복위험이 없다고 본 함장 때문에 승조원들의 대피가 없었고 이 때문에 함이 갑자기 전복되는 바람에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해임된 것이다.]가 폭발사고를 일으키자, 주코프 장군은 이의 책임을 물어 쿠즈네초프를 해임하고 다시 [[중장]]으로 [[강등]]시켜 예편시켰다.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에서 퇴출되었다. 쿠즈네초프는 예편된 후 해군에 관한 저술에 힘쓰고 [[전쟁]] 당시의 회고록을 저술하였으나 출판이 금지되었다. 스탈린을 이런 저술에서 직접적으로 비난하고, 해군에 간섭하던 [[공산당]]을 비난했기 때문이다. 쿠즈네초프는 저술 중에 "[[국가]]는 [[법률]]로 다스려져야한다"고 서술, 공산당의 이런저런 불법적인 간섭을 비난하였다. 그래서 이런 저술들은 쿠즈네초프의 사후에야 출판될 수 있었다. [[1957년]] 쿠즈네초프를 해임했던 주코프도 [[니키타 흐루쇼프]]의 미움을 사서 해임되었다. [[1964년]] 많은 제독들이 쿠즈네초프를 복귀시켜달라고 청원을 냈고, 명예직이었던 국방부 감독관에 임명되었으나 쿠즈네초프와 사이가 무척 안좋았던 후임이자 소련 해군의 [[어머니]]로 평가받는 고르시코프 제독의 반대로 인해 생전에 원수로 복귀하지 못했다. 세상을 떠난 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던 [[1988년]]에야 소련 해군 원수로 사후 복귀되었다. == 평가 == || [[파일:external/7826d65f018e7556b5ef335dc32e316c77d5f44cd8bae7abcd4505353c554d77.jpg|width=100%]] || ||▲ 고향인 [[아르한겔스크]]에 세워진 쿠즈네초프의 동상. || 탁월한 지휘관으로서, 그리고 능숙한 행정가로서 쿠즈네초프가 소련-러시아 해군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소련 붕괴]] 후의 [[러시아 해군]]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현대]] 해전이 [[미사일]] 위주의 [[시대]]로 간다는 것에는 깊은 이해가 없었다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1940년대]] 후반부터 [[견제]]받기 시작해 [[1950년대]] 중반에 [[실권]]에서 완전히 배제된 [[인물]]이라 큰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미사일 중심의 해전론이 대두된 것이 로켓의 유도기술이 충분히 발달한 [[1950년대]] 말이었고, 소련이 손놓고 있던 것이 아니라 [[스틱스 대함 미사일]]을 개발해서 [[이집트군]]이 이를 사용, [[1967년]] 에일라트 함을 격침시켰음을 보면, 소련 해군도 미사일 중심 [[해전]]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붙인 [[항공전함|항공순양함]] 함급인 [[어드미럴 쿠즈네초프급 중항공순양함]]이 2척 건조되었다. 1번함인 어드미럴 쿠즈네초프함은 아직도 러시아 해군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고, 제2번함인 바랴그함은 미완성 상태로 준공비용도 없고 완공하더라도 운용비가 나올 구멍이 없어서 [[우크라이나]]에서 방치되었다가 [[중국]]에서 해상 [[카지노]]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팔려갔다가 [[중국 해군]]이 개조하여 [[001형 항공모함|랴오닝함]]이라는 함명으로 취역시켰다. 비슷한 사례로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인 [[손원일]] 제독이 있다. == 진급 이력 == * 1955년 5월 3일: 소비에트 연방 함대 제독 * 1956년 2월 17일: [[상장(계급)|상장]] (강등) * 1988년 7월 26일: 소비에트 연방 함대 제독 (사후 복위) == 관련 [[문서]] == * [[어드미럴 쿠즈네초프급 중항공순양함]] * [[스베들로프급 순양함]] * [[월드 오브 워쉽]][*소련 전설함장으로 쿠즈네초프를 구매할 수 있다. 함장 스킬 중 '승리의 의지'가 있는데 불타는 전함도 살리는 기적을 행하기 때문에 쿠즈네초프의 '소뽕의 의지'라고도 불린다.] [[분류:1904년 출생]] [[분류:1974년 사망]][[분류:아르한겔스크 주 출신 인물]][[분류:소련군 원수]][[분류:소련 국방장관]] [[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스페인 내전/군인]][[분류:독소전쟁/군인]][[분류:소비에트 연방 영웅]][[분류:소련 공산당 18기 중앙위원회 위원]][[분류:소련 공산당 19기 중앙위원회 위원]][[분류:노보데비치 묘지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