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42년 출생]][[분류:블라이나이궨트 출신 인물]][[분류:영국 노동당 당수]][[분류:카디프 대학교 출신]] [include(틀:역대 영국 노동당 당수)]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50938 0%, #b50938 20%, #b50938 80%, #b50938)" '''[[영국 귀족원|{{{#fff 영국 귀족원 의원}}}]][br]{{{#fff {{{+1 키녹 경}}}[br][[The Right Honourable|{{{#fff Rt Hon.}}}]] The Lord Kinnock}}}'''}}}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Joop_den_Uyl_and_Neil_Kinnock,_1984_(cropped).jpg|width=100%]]}}} || || '''본명''' ||Neil Gordon Kinnock[br]닐 고든 키녹||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영국)]|| ||<|2> '''출생''' ||[[1942년]] [[3월 28일]] ([age(1942-03-28)]세)|| ||[include(틀:국기, 국명=웨일스, 크기=21)] 트레데가 || ||<|2> '''재임기간''' ||제10대 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 ||[[1999년]] [[9월 16일]] ~ [[2004년]] [[11월 21일]] || || '''학력''' ||[[카디프 대학교]] {{{-2 ([[역사학]] / 학사)}}} || || '''직업''' ||[[정치인]]|| || '''정당''' ||[include(틀:노동당(영국))] || || '''종교''' ||[[무종교]] || || '''경력''' ||서민원 의원[br]노동당 대표[br]EU 집행위원[br]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br]'''귀족원 의원''' || || '''서명'''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fff; border-radius: 4px;" [[파일:Neil_Kinnock_signature.svg|width=150]]}}}|| [목차] [clearfix] == 개요 == [[노동당(영국)|노동당]] 소속의 [[영국]] 정치인이다.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 [[존 메이저]] 정부 시절 쇠퇴해가던 제1야당 [[노동당(영국)|노동당]]의 지휘봉을 9년간 맡았던 정치인이다. == 생애 == [[웨일스]]의 Tredegar라는 조그마한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들의 각각 전직 석탄 광부와 지역의 간호사였다. 키녹은 [[카디프 대학교]]에 진학해 그곳에서 산업과 역사에 관한 학위를 획득했다. 이듬해 교육 대학원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1967년]] 배우자를 만나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1970년 베드 웰티 지역구에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한다. 1978년 키녹은 웨일스의 자치의회를 만들자는 법을 발의,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었지만 정작 [[웨일스]]에서 약 80% 가량의 반대표가 나오며 무산된다.[* 이는 [[토니 블레어]] 총리 시절인 1998년, 웨일스 정부법을 제정하며 자치의회를 만들게 하고 대부분의 분야에서 입법 가능을 가능하게 해 준다.] 1979년 당시 제1야당 당수였던 [[마이클 풋]]의 [[그림자 내각]] 교육기술부 장관으로 임명된다 1983년 총선에서 베드 웰티 지역구가 통폐합됨에 따라, 신설된 이슬윈 지역구에 출마해 5선에 성공한다. 허나, [[포클랜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마거릿 대처|대처]] 내각에 대한 국민들의 강력한 지지로 인해 [[노동당(영국)|노동당]]은 [[보수당(영국)|보수당]]에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참패를 거뒀다.[* 단 209석만을 얻으며 몰락했다.][* 훗날 이 기록은 [[제58회 영국 총선]]에서 [[제러미 코빈]] 대표가 이어받는다.] 총선 이후 [[마이클 풋]] 대표가 사퇴함에 따라, 닐 키녹 의원은 1983년 노동당 대표 경선에 출마해 당선된다. 대표직 취임 후 키녹은 풋 대표 시기를 거치면서 좌측으로 다소 옮겨간 당의 이념 성향을 좀 더 중도적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이런 면에서도 볼때 후일 대표가 되는 [[토니 블레어]] 총리가 주창한 [[제3의 길]]의 시작은 닐 키녹 대표였던 셈이다. 1987년 총선을 앞두고 [[노동당(영국)|노동당]]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는데 [[자유민주당(영국)|자유민주당]]-사회민주당[* 이후 자유민주당에 병합된다.] 연합에 의해 제2야당으로 추락한다는 여론조사가 나온 것. 이후 노동당의 목표는 '제1야당 굳히기'로 수정되었지만, [[마거릿 대처]] 내각의 장기화와 여러 정책의 부작용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창의적인 선거 캠페인으로 인해 이전 총선보다 20석을 더 차지해 229석을 확보하며 기사회생에 성공한다. 1988년 노동당 대표 선거에서 경쟁자였던 [[토니 벤]] 후보에게 승리함으로써 키녹은 대표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되었고, 당 내에서도 절대적인 입지를 지니게 되었다. 때마침 [[마거릿 대처]] 총리가 [[인두세]] 도입과 유럽 통합 논란으로 서서히 지지를 잃고 있었으며, 1990년 사퇴하게 된다. 그리고 [[존 메이저]] 총리의 [[보수당(영국)|보수당]]이 내분으로 인해 반사이익을 보며 보수당에게 경합우세인 여론조사를 [[1989년]]부터 3년동안 유지하며 13년이라는 길고 길었던 야당 생활을 끝맺을것 처럼 보였다.[* 물론 중간에 [[존 메이저]] 총리의 취임, 허니문 효과로 잠깐 우세를 내주었다가 반년만에 다시 경합우세를 유지한다.] 하지만 이길줄만 알았던 [[1992년 영국 총선|1992년 총선]]에서 패배하고 만다. 이유는 [[노동당(영국)|노동당]]의 계속된 정책 변경으로 인한 전통적 지지층 이탈과 [[보수당(영국)|보수당]]의 대처 색깔 탈색을 통한 중산층의 지지 확보였다. 정작 다 잡은 쉬운 선거에서 패배한 키녹 대표는 총선 후 사퇴했으며, 그 자리는 [[존 스미스(1938)|존 스미스]] 의원이 이어받게 된다. 이후 [[유럽연합]]에서 주로 활동하며, 영국 정치계와는 거리를 두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탈리아의 [[로마노 프로디]] 전 총리가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자 집행위 부위원장으로 참여해 행정 개혁과 감사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2004년을 마지막으로 집행위원회에서 물러난 이후 영국 정계로 복귀했는데 [[2005년]] [[1월 28일]], [[일대귀족]] 남작으로 서임되면서 [[영국 귀족원|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귀족원에서 보수당의 힘을 빼려는 [[토니 블레어]] 총리의 의도에 따른 것인데[* 키녹의 귀족원 등원으로 상원에서 노동당과 보수당의 의원 수가 동률이 되었다.], 원래 키녹 전 대표가 귀족원에 비판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작가 겸 저널리스트인 윌 셀프로부터 위선자라고 저격당하기도 했다. [[2018년]]에는 [[브렉시트]]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표출하면서 노동당 [[제러미 코빈]] 대표에게도 브렉시트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라고 압박했다. == 선거 이력 == || '''연도''' || '''선거'''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락''' || '''비고''' || || 1970 || [[1970년 영국 총선]] ||<|4> 베드웰티 ||<|7> [include(틀:노동당(영국))] || '''28,078 (74.6%)''' ||<|7> '''당선(1위)''' || '''초선''' || || 1974.2 || 1974년 2월 영국 총선 || '''26,664 (67.06%)''' || '''재선''' || || 1974.10 || 1974년 10월 영국 총선 || '''27,418 (70.88%)''' || '''3선''' || || 1979 || [[1979년 영국 총선]] || '''28,794 (71.35%)''' || '''4선''' || || 1983 || 1983년 영국 총선 ||<|3> 이슬윈 || '''23,183 (59.4%)''' || '''5선''' || || 1987 || 1987년 영국 총선 || '''28,901 (71.3%)''' || '''6선''' || || 1992 || 1992년 영국 총선 || '''30,908 (74.3%)''' || '''7선''' || == 기타 == * 그의 아들 스티븐 키녹은 1970년생으로 닐과 마찬가지로 웨일스 출신이며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브뤼셀 유럽대학교를 졸업한 뒤 EU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1996년 덴마크 사회민주당 정치인인 [[헬레 토르닝-슈미트]]와 결혼했고 배우자인 헬레는 2011년부터 4년간 [[덴마크 총리]]로 일했다. 스티븐은 [[제56회 영국 총선]]에서 웨일스의 [[https://en.wikipedia.org/wiki/Aberavon_(UK_Parliament_constituency)|Aberavon]]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2019년 기준 하원 3선 의원이다. *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모처럼만에 미국 정계에 키녹의 이름이 회자되었는데, 키녹 본인이 주목을 받았던 것은 아니고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가 과거 키녹의 연설을 표절했다가 낙마했던 이력이 회자되면서 다시 이름을 올리게 됐다. * [[노엘 갤러거]]가 열성적으로 지지했던 정치인으로도 알려져있다. 80년대 노동당 전당대회도 따라다녔었고, 블레어 이후에는 "사실 총리는 키녹이 되었어야 했어"라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언젠가 노엘 갤러거가 닐 키녹의 부인을 만나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부군께서 연설하실 때 정말 뿅 갔어요."라고 극찬을 했는데, 키녹 부인은 "그 이는 저를 침대에서 뿅가게 했지요."(...)라고 화답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