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송나라/인물]][[분류:1010년 출생]][[분류:1069년 사망]][[분류:징저우시 출신 인물]] [include(틀:송사)] ||<-2> '''{{{+1 唐介[br]당개}}}''' || || '''시호''' ||질숙(質肅) || || '''성''' ||당(唐) || || '''이름''' ||개(介) || || '''자''' ||자방(子方) || || '''생몰''' ||1010년 ~ 1069년 || || '''부친''' ||당공(唐拱) || || '''출신''' ||강릉부(江陵府)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송]]의 관료로 자는 자방(子方)이며, [[인종(송)|인종]], [[영종(북송)|영종]], [[신종(송)|신종]] 3대를 섬긴 인물이다. == 생애 == === 초기 생애 === 1010년 강릉부(江陵府)에서 태어났으며, 당개의 본적은 항주(杭州) 전당현(錢塘縣)이었으나 할아버지의 대에 강릉부로 옮겨 살아서 강릉부 출신이 되었다. 아버지 당공(唐拱)이 임지인 장주(漳州)[* 現 [[푸젠성]] [[장저우시]].]에서 죽자, 장주의 사람들은 당공의 집안이 가난하다는 걸 알고 돈을 모아 부의금으로 보냈지만 당시 나이가 어렸던 당개는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당개는 뒤에 진사에 급제하여 무릉현위(武陵縣尉)가 되었고 평강현령(平江縣令)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평강현에는 이씨(李氏)라는 인색한 부자가 있었는데, 평강현의 관리들은 이씨에게서 재물을 갈취했고 그를 무고하여 죽인 뒤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악주(岳州)의 지주사가 이씨의 집안 사람들을 모두 체포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않고 고문을 가했지만 자백을 받아내지 못했다. 당개는 현으로 부임해서 심문했지만 증거가 부족했고, 악주의 지주사가 분노하여 조정에 다른 어사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조정에서 파견한 어사(御史) 방해(方偕)도 심문을 진행했지만 당개의 심문과 똑같았다. 결국 이씨를 무고한 관리들은 모두 처벌을 받고 방해도 상을 받게 되었지만 당개는 자신의 공적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 당개는 다시 막주(莫州) 임구현(任丘縣)으로 부임했는데, 임구현은 [[요나라]]의 사신이 왕래하는 길목에 있었고 역참의 관리가 요나라의 사신으로부터 갈취를 당하는 문제가 있었다. 당개는 역참의 입구에 앉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법률에 공급이 규정되지 않으면 일체 공급해선 안 된다. 감히 우리의 생산 도구와 일상 집기를 훼손하는 자가 있다면 단호히 붙잡을 것이다. 당개가 위의 명령을 내리니 요나라의 사신들은 모두 법도를 따르게 되었다. 또한 당시 연변의 저수지가 해마다 넘쳐서 백성들의 밭을 해치자, 환관 양회민(楊懷敏)이 관리를 주관하며 읍 서쪽의 11개 촌의 저수지를 분할하자고 주장했는데, 당개는 여기에 제방을 축조하였다. 또한 덕주통판(德州通判)을 맡을 때 전운사(轉運使) 최역(崔嶧)이 곳집에 있는 명주를 백성들에게 고가로 팔려고 하자, 당개는 최역의 명령을 보류하여 하달하지 않았고 또한 사안을 안무사(安撫司)로 옮겨 최역의 잘못을 조목조목 알렸다. 최역은 분노하여 여러 차례 급하게 격문을 띄우고 당개를 심문하려 했지만 당개는 움직이지 않았으며, 결국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 재상을 탄핵하다 === 당개는 뒤에 입조하여 감찰어사이행(監察御史裏行)이 되었고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전임되었다. 당시 계성원(啓聖院)에서 용봉차(龍鳳車)를 만들 때 궁중에서 진귀한 보석을 내어 용봉차를 장식했는데, 당개는 여기에 대해 다음의 간언을 올렸다. >이곳은 [[태종(송)|태종황제]]의 어진이 봉안된 곳이니 이곳에서 떠들며 모독할 수 없으며, 후궁의 진기하고 사치스러운 도구도 법도를 초과해선 안 됩니다. 당개의 간언을 들은 인종은 재빨리 용봉차를 헐도록 지시하였다. 온성황후의 백부 장요좌가 선휘사(宣徽使), 절도사, 경령궁사(景靈宮使), 군목사(群牧使)를 한꺼번에 맡게 되자, 당개는 [[포증]], 오규와 함께 여기에 대해 간언했고 왕거정에게 관료들을 소집하여 논의하도록 요청하여 결국 장요좌는 선휘사와 경령궁사만 받았다. 하지만 장요좌가 선휘사, 지하양(知河陽)으로 제수되자, 당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폐하께서 장요좌에게 선휘사를 제수하시려고 지하양을 명목으로 하셨으니 여기서 그만둘 수 없소. 당시 당개의 동료들이 불확실한 태도를 보여서 결국 당개 홀로 직언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자 인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임명문서는 본래 중서성에서 나온 것이오. 당개는 결국 당시 재상인 문언박을 탄핵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언박은 촉(蜀)을 수비할 때 금을 장식한 기묘한 비단을 몰래 만들어 환관과 결탁하고 황궁과 내통하여 재상의 지위를 얻으려고 했는데, 지금 장요좌를 중용하여 더욱 자신의 지위를 굳히려고 합니다. 문언박을 파면하고 부필을 재상으로 삼으십시오. 당개의 발언에 분노한 인종은 당개의 상주문을 쳐다도보지 않았고 먼 곳으로 유배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당개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신은 충의에 고무되어 비록 극형을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찌 유배라고 사양하겠습니까? 인종은 급하게 관리들을 불러 당개의 상주문을 보여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개가 의견을 표명하고 논하는 것은 그의 직책이오. 문언박이 비빈을 통해 재상의 자리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당개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소? 재상을 임용하는데 어떻게 비빈이 관여해야 하오? 당시 문언박도 어전에 있었는데, 당개는 문언박을 보고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문언박은 마땅히 스스로 반성해야 하며, 설령 이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숨길 수 없습니다. 인종은 당시 몹시 아끼던 재상 문언박이 탄핵당하자 분노가 점점 심해져 당개에게 궐에서 물러나라고 압박했고 당개는 결국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1051년 당개는 춘주별가(春州別駕)로 좌천되었지만 왕거정이 당개에게 내린 처벌이 너무 무겁다고 이야기하여, 인종은 결국 당개를 영주(英州)[* 現 [[광둥성]] [[칭위안시]].]로 전근시켰고 또한 당개가 혹여 도중에 죽어서 자신이 강직한 대신을 죽였다는 오명을 얻지 않을까 염려하여 내시에게 당개를 호송하도록 명했다. 문언박은 재상에서 파면되었으며, 당개는 이로 인해 자신의 강직한 성품이 알려져 매요신과 이사중이 모두 시를 지어 당개를 찬미했으며, 송나라의 선비들은 진정한 어사를 논할 때 당개를 거론하며 당자방(唐子方)으로 부르고 찬양하였다. === 조정으로 돌아오다 === 영주로 좌천되고 몇 달이 흘러, 당개는 빈주(郴州)의 조세 사무를 주관하다가 담주통판(潭州通判), 지복주(知復州)를 역임하고 전중시어사로 임명되었다. 인종은 조정으로 복귀한 당개를 치하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이 지방으로 좌천된 이래로 개인적인 서신을 조정에 보낸 적이 없으니 그대는 절개가 굳건하다고 할 만하오. 인종의 치하를 받은 당개는 언사에 거침이 없었는데 어떨 때는 다음의 직언을 올리기도 했다. >소신이 이미 간관을 맡고 있지만 말을 해도 행하지 않으면 장차 굳게 다툴 것이고 다툼이 치열해지면 폐하께 누가 될 것이니 저를 해직하시길 바랍니다. 당개는 뒤에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 직집현원(直集賢院)으로 전임되고 개봉부판관(開封府判官)이 되었으며, 다시 지양주(知揚州)로 전출되고 강동전운사(江東轉運使)로 옮겼다. 이때 어사 오중복은 당개가 오랫동안 지방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또한 다시 재상으로 복귀한 문언박은 지난번 당개에게 탄핵 당했었던 안좋은 과거가 있지만 그 일을 잊고 당개의 능력을 높이사서 조정으로 복귀를 요청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개가 제게 했던 직언은 진실로 소신의 폐단을 지적한 것이니 오중복의 말을 따라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인종은 명신인 문언박 등이 탄핵당했던 일을 잊지않았고, 결국 당개를 지방인 하동으로 부임시켰다가 후일 다시 조정으로 입조하게 하여 탁지부사(度支副使)로 임명하고 천장각대제(天章閣待制)로 진위되었으며, 다시 지간원(知諫院)을 맡았다. 인종이 지화(至和) 연간 이후부터 국정을 처리할 때 대신들과 대화를 하지 않자, 당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신의 관계는 천지와 같고 천지의 교태야말로 올바른 도리입니다. 신하들을 항상 소집하시고 덕음을 펼치시고 정사를 토론하며 천하를 행복하게 하시길 바랍니다. 당개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후궁이 은택에 청탁하는 것을 금지해야 하며, 왕명이 중서성을 거치지 못했다면 마땅히 규율을 세워서 제지해야 하며, 비빈에게 내리는 물품이 전대보다 수십 배나 많고 날마다 끝이 없으니 마땅히 제한해야 하며, 감사(監司)에서 천거한 관리들은 대부분이 문법만 터득한 아전들이니 감사에 단정하고 선량하며 돈후하고 소박한 선비들을 선발하되 간사함을 좋아하고 경박한 이들과 함께 승진하지 못하게 하며, 각지의 주마승수(走馬承受)가 군현을 침범하니 마땅히 파직하여 파견하지 말고 그 권한을 감사로 돌려야 하며, 연국공주(兗國公主)가 밤에 제멋대로 궁문을 여니 마땅히 숙위의 관리들에게 경고하여 궁성의 제도를 엄격하게 해야 합니다. 인종은 당개의 진언을 모두 널리 받아들였다. 어사중승(御史中丞) 한강(韓絳)이 재상 부필을 탄핵하자, 부필은 자신의 파면을 청했고 한강 또한 대죄하였다. 당개는 왕도와 함께 한강이 위법으로 대신을 중상하였다고 탄핵하여 결국 한강은 파면되었다. 당개는 다른 재상과 갈등을 빚어서 자신의 전출을 주청했고 형남으로 전출되었지만 칙서가 문하성(門下省)을 지날 때 지은대사(知銀台司) 하담(何郯)이 칙서를 봉환하여 개봉부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진승지(陳升之)를 탄핵하여 지홍주(知洪州)로 전출되었다. 당개는 이후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 하북도전운사(河北都轉運使)가 더해졌고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 지영주(知瀛州)를 맡았다. === 영종 재위기 === [[영종(북송)|영종]]이 즉위하고 이듬해인 1064년 어사중승으로 임명되었다. 영종은 당개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이 전대에 강직했다는 평판이 있었기 때문에 경을 등용한 것이지 좌우의 건의에 따른 것이 아니요. 그러자 당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신은 특별한 공적이 없는데 폐하께서 소신을 너무 좋게 말씀하시니 소신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예로부터 천하를 다스리려는 군주는 세상을 놀라게 하고 전무후무한 정책을 찾는 것이 아니며 그 요체는 인정을 따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조종이 남긴 덕택과 공업은 그리 멀지 않은 사람에게 있으니 조상이 이미 완성한 대업을 거울로 삼으신다면 천하가 복을 입을 수 있습니다. 1065년,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의 신분으로 지태원부(知太原府)를 맡았다. 이때 영종은 당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이 하동을 보니 중집법(中執法)의 아래에 있지 않으니 잠시 번거롭겠지만 경이 하동으로 부임해주시오. 뒤에 [[서하]]가 여러 차례 대주(代州)를 침공해오자 대주 경계에 여러 개의 보루를 쌓았다. 당개는 군대를 파견하여 모두 보루들을 모두 철거하고 서하에 서신을 보내 이해를 진술했으며, 서하는 당개의 서신을 받고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 왕안석과의 갈등 === 1067년, 영종이 사망하고 영종의 태자 [[신종(송)|신종]]이 즉위하자 당개는 삼사사(三司使)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인 1068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임명되었다. 당시 신종이 [[왕안석]]을 등용하려고 했고 [[증공량]]이 신종에게 왕안석을 적극적으로 천거하자, 당개는 여기에 반발하였다. 다음은 당개와 신종의 문답이다. >신종: 왕안석의 문학적 재능 때문에 임용할 수 없소? 정사를 처리하는 능력 때문에 임용할 수 없소? 경학 때문에 임용할 수 없소? >당개: 왕안석은 학문을 좋아하지만 낡은 것을 고집하기 때문에 논의가 실제와 맞지 않을 것이니 만약 왕안석에게 정사를 맡긴다면 틀림없이 많은 것이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왕안석을 천거한 증공량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안석이 정말로 등용된다면 천하가 반드시 혼란해질 것이니 공들은 마땅히 이 점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오. 그리고 중서성에서 임명장을 제출했음에도 신종이 오랫동안 결정하지 못했다. 다음은 당개와 신종의 문답이다. >신종: 마땅히 왕안석에게 자문하겠소. >당개: 폐하께서 왕안석이 중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곧바로 왕안석을 중용했을 텐데 어찌 중서성의 정사를 한림학사(翰林學士)에게 결정하게 할 수 있습니까? 소신은 근래에 폐하께서 어떤 사안을 효유하실 때 왕안석에게 자문하여 왕안석이 동의하면 시행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시행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되면 재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대신을 신임하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신들의 재주가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것일테니, 저를 먼저 파면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왕안석이 재상이 되자, 당개는 신종에게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중서성이 공문서를 처리할 때 모두 성지(聖旨)라고 부르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것들이 거의 많으니 마땅히 중서성만 공문서를 내도록 해야 합니다. 신종은 당개의 발언에 놀란 모습을 보였지만 당개는 다시 다음의 발언을 이어갔다. >옛날 [[구준(북송)|구준]]이 공문서를 올리며 풍증을 승진시킨 것이 부당하다고 상주하니 풍증이 비판했고 [[태종(송)|태종황제]]께서는 "전대에는 중서성이 당첩(堂帖)을 이용했고 이에 권신이 이를 틈타 위복을 행사하였소. [[태조(송)|태조황제]]께서는 당시 당첩이 칙명보다 비중이 큰 것을 보고 결국 권한을 없앴소. 지금 다시 공문서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당첩과 무엇이 다르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계(張洎)가 "공문서를 폐기한다면 중서성이 공문서를 처리할 때 참고할만한 격식이 없어집니다."라고 대답하니 태종황제께서는 "긴요한 사무라면 황제가 직접 칙령을 내리고 공문서를 사용해야 할 일이라도 역시 모름지기 결재를 상주해야 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성지(聖旨)로 칭한 것입니다. 만약 왕안석의 말과 같다면 이것은 정치가 천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설사 재상이 모두 충성스럽고 어질더라도 오히려 제 마음대로 명령을 내린 것이니, 충성스럽고 유능하지 않다면 어찌 나라를 해치지 않겠습니까? 신종은 당개의 말을 받아들여 결국 그만두었다. 당개는 이때부터 수차례 왕안석과 쟁론을 벌였으며, 왕안석이 강변할 때 신종은 왕안석을 두둔했다. 당개는 분을 견디지 못하고 등에 등창이 났다. 병이 심해지자 신종이 직접 문안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결국 1069년 사망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하고 질숙(質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신종은 당개를 조문할 때 황궁의 초상화를 꺼내 당개의 집안에 하사하였다. == 기타 == * 당개는 재상과 동료들이 함께 문서를 보는 것을 관례로 정착시켰는데, 이전에는 재상이 대루사(待漏舍)에서 문서를 열람할 때 동료 관원들은 내용을 알 수 없었다. 당개는 이에 증공량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정의 관료가 문서의 내용을 모르는데 폐하께서 혹여 문서의 내용을 물으신다면 무슨 말로 대답하겠소? * 당개는 사람됨이 순박하고 강직했으며, 거짓 없는 직언으로 안팎의 두려움을 받았다. 관원에 결원이 생기면 중신들은 모두 당개가 보임되기를 바라며 당개의 풍채를 관망하였다. 신종은 당개를 선제가 남긴 충신이라 생각했기에 당개를 중용하였지만, 당개는 항상 왕안석과 갈등을 빚었기에 그의 명성은 오히려 이전에 간관이나 어사를 지냈을 때보다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