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만 관련 문서)] [include(틀:나라별 핵개발)] [목차] == 개요 == [youtube(xFwnUgcibsA)] [[대만]]은 과거 자체적인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암호명은 '신주 계획(新竹計畫)'과 '타오위안 계획(桃園計畫)'이었다. 암호명은 핵무기 개발이 주로 진행된 지역인 대만의 도시 [[신주시]]와 타이베이 외곽에 있는 타오위안현(현 [[타오위안시]])에서 따온 것이다. 신주는 유력 제조업체, 과학기술 연구개발 시설이 다수 위치한 지역이며 특히 미국에서 도입한 대만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가 이곳의 [[국립칭화대학]]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타오위안에는 국방부 직속 중산(中山)과학연구원이 있었다. == 상세 == === 계기 ===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는 [[국공내전]] 당시인 1946년부터 핵폭탄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하며,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6년 미국으로 세 명의 물리학자를 파견해 핵기술을 연구케 했다. 하지만 1949년에 [[국부천대]]로 인해 핵폭탄 개발은 중지됐다. 대만으로 온 [[장제스]] 총통은 [[중국 대륙|대륙]] [[국광 작전|수복]]을 내세웠지만 이미 대륙을 내주고 작은 섬인 대만에 틀어박힌 이상 현실적으로 대륙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편 [[중국공산당]]은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고, 초기에는 외교적 고립에 시달렸지만 차츰 자국의 국력으로 고립을 이겨내고 중화민국(대만)을 외교 무대에서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미 1950년대부터 공산권은 물론 몇몇 자유진영 국가마저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 및 수교하였다. 그리고 1964년 중국은 [[양탄일성|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였다.]] 장제스는 중국의 핵실험 성공 1년 전인 1963년에 미국의 [[U-2]] 정찰기가 촬영한 항공사진을 통해 중국의 [[핵무장]]이 임박했음을 알았다고 한다. 당시 대만은 1954년 체결한 [[미국-중화민국 상호방위조약|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었지만 불안감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 진행 === 중국의 1964년 핵실험 이듬해, 1965년 장제스는 “5년 내 핵폭탄을 개발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핵무장 계획을 구체화한다. '''[[신주시|신주]] 계획(新竹計畫)'''이라는 이름도 이 때 붙은 것이다. 대만 서부 신주에 있는 대만 [[국립칭화대학|칭화대학]] 내에 원자로를 설치하고 핵 개발을 추진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는 이스라엘의 [[이스라엘의 핵개발|디모나 계획]]을 본뜬 것으로, 이스라엘은 1950년대 말 ‘디모나 계획’에 따라 프랑스 핵기술을 베껴서 핵무기 보유에 성공했다. 장제스는 ‘이스라엘 핵 개발의 아버지’로 불리는 [[https://en.wikipedia.org/wiki/Ernst_David_Bergmann|데이비드 버그만]] 박사를 고문으로 영입했고, [[타이중시|타이중]]의 [[일월담|르웨탄]](日月潭)에 있는 별장에서 데이비드 버그만 박사를 3일간 면담하였다. 이 때 장제스는 “[[이스라엘]]과 대만은 동병상련의 국제고아”란 점을 강조했다고 하면서 핵무장을 도와달라고 호소했으며, 버그만 박사에게 극진한 대우를 했다. 이때 일부 전문가들이 경제적 부담과 좁은 국토 등을 이유로 핵개발을 반대하자, 장제스는 신주 계획을 '''[[타오위안시|타오위안]] 계획(桃園計畫)'''이란 극비 계획으로 전환시킨다. 1969년에는 [[타이베이시]] 외곽에 있는 타오위안현(현 타오위안시) 룽탄(龍潭)에 있는 [[대만 국방부|국방부]] 직속의 스먼(石門) 과학연구소를 국방부 직속 중산(中山)과학연구원으로 확대개편해 핵무기 개발을 담당하게 하였다.[* ‘중산’이란 연구원 이름은 [[국부]] [[쑨원]](孫文)의 호(중산)에서 따왔다.] 중산과학연구원은 ‘국방자주, 과기건군’을 슬로건으로 전투기와 미사일을 비롯 전자전, 화학전에 대비한 무기개발을 표방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만은 [[미국]]의 눈을 피해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캐나다]]에서 천연 우라늄과 연구용 핵반응기를 도입했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농축 우라늄 추출 기술을 확보했다. 장제스가 사망한 후 정국이 혼란해지고 미국의 감시망을 피하면서 개발을 진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 총통도 일단 핵무기 개발 계획을 유지했다. 특히 [[1979년]]에 미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미국이 대만과 단교하자 장징궈 총통은 핵무기 개발에 더 절박함을 느끼게 되었다. 당시 [[대만군|중화민국군]] 참모총장이자 중산과학연구원 원장을 겸임했던 대만 군부의 원로 [[하오보춘]]은 2000년 출간된 회고록을 통해 "[[1986년]]에 단기간 내에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한 상태였다."라고 주장했다. [[파일:external/thinking-taiwan.com/20150528-b821.gif]] 1970~80년대 중산과학연구원의 핵무기 개발에 참여했던 핵물리학자 허리웨이(賀立維. 영어이름 David Ho)는 2015년에 출간된 저서 <대만제 핵무기>(원제: 核彈MIT: 一個尚未結束的故事)[* 책 제목의 MIT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가 아니라 대만제(Made in Taiwan)의 머리 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참고로 '폭탄(Bomb)'이라는 표현도 단순히 폭탄이 아니라 원자(Atomic)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에서 [[https://web.archive.org/web/20200706223251/http://thinking-taiwan.com/thinking-taiwan.com/mit-a-bomb-made-in-taiwan/index.html|당시 중화민국군이 핵무기를 개발한 후 어떠한 투발수단(예: 항공기, 미사일)으로 실전에 사용할 지의 여부가 불분명한 상태였고 때문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침공할 경우 핵무기를 일종의 '대규모 자폭 무기'로 사용할 가능성을 우려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당시 [[징궈|경국 전투기]]와 단거리 유도탄이 개발되고 있었기에 핵무기 개발이 완료되면 투발수단도 충분히 있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 폭로와 중단 === [[파일:external/static.ettoday.net/d589392.jpg]] (핵개발을 폭로한 장셴이. 1988년 1월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현재까지 생존 중이다.) 1988년 1월 9일에 [[대만 육군|중화민국 육군]] [[대령|상교]]이자 중산과학연구원 내 핵무기 연구센터 부소장이었던 장셴이(張憲義)가 미국으로 망명하여 대만의 핵개발을 폭로했다. 하필 1월 13일에는 장징궈가 오랜 와병생활 끝에 사망하는 바람에 정국이 혼란에 빠졌다.[* 장징궈가 장셴이의 망명으로 인한 충격이 결정타가 되어 숨을 거두었다는 음모론식 이야기도 있다. 그는 당시 [[당뇨병]]을 앓고 있었고 장셴이 망명을 보고받고 나서 3일 뒤에 사망했다.] 헌법에 따라 [[리덩후이]]가 총통 권한대행이 되었지만 당시 그는 [[중국 국민당|국민당]] 내에서 확고한 입지를 가진 총통이 아니어서 대만은 정치적 공백에 시달렸다. 이 때 데이비드 딘 [[미국 재대만협회]](AIT) 회장은 장셴이가 제공한 문건과 미국 첩보위성이 촬영한 소형 핵실험 위성사진을 들이대고는 하오보춘에게 “일주일 내에 핵 개발 계획을 중지하고, 핵시설을 폐쇄하지 않으면 [[타이완 관계법]]에 따른 기존의 방위 공약을 무효화하겠다”고 협박하였다. 더불어 [[IAEA]]도 특별 감사에 나섰다. 결국 [[대만]] 정부는 IAEA의 감사를 수용함과 동시에, 미국과 IAEA의 감시 하에 공식적으로 핵개발을 중단했다. 훗날 장셴이는 자신의 미국 망명, 핵개발 폭로가 장징궈의 사후 [[하오보춘]] 참모총장을 위시한 군부의 정권 장악으로 중국과의 전쟁 위험이 높아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행위가 정당했음을 강변했다. 대만이 단순히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을 갖는 것을 넘어서 군부를 중심으로 실제로 핵무기를 생산 및 배치할 의도를 보였기 때문에 이를 막으려 했다는 논리이다.[[http://shindonga.donga.com/3/all/13/1179816/1|#]] 한편 장셴이는 미국 [[테네시 대학교]]에서 원자력 부문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이 때문에 오래 전부터 미국 [[미국 중앙 정보국|CIA]]에 포섭된 상태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으며, 하오보춘도 장셴이가 도주했다는 것을 알자 CIA의 수작이라 확신했다고 한다. == 현황 == * 대만은 이후에도 몇 차례 극비리에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의혹이 있었으나 정부에서는 모두 부인하고 있다. * 1995년 7월 [[타이완 독립운동|타이완 독립주의자]]였던 리덩후이 당시 총통은 중국이 자신의 미국 방문 직후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실시하자 "핵무기 개발 재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으나 국내외적으로 파장이 커지자 부랴부랴 번복한 일이 있었다. * [[천수이볜]] 총통 시절에도 자체 핵무기 개발을 추진 중이라는 의혹이 [[입법원]](국회에 해당)에서 제기됐으며, [[홍콩]]의 아주주간도 “대만이 2004년부터 인도의 지원을 받아 핵을 개발 중이다”는 보도를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이에 대해 천수이볜은 “대만에는 핵폭탄이 없고, 개발할 의사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아시아 국가 중 한국, 일본과 함께 높은 수준의 원자력 기술을 확보한 국가 중 하나라서 핵 도미노 현상이 현실화할 경우 핵개발을 재개할 가능성이 높다. * 대만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탓에 [[NPT]]에도 가입하지 않고 있는데(1970년에 가입했으나 1971년 쫓겨남), 따라서 핵무기 개발을 다시 추진한다고 했을 때 막을 수 있는 국제법적 장치는 없다. 이 경우는 대만의 불리한 지위가 오히려 이점으로 작용하는 셈. 그러나 대만 정부는 NPT를 준수할 것임을 대내외에 발표한 바 있다.[* 대만 정부는 NPT와 비슷하게 BWC(생물무기금지조약), CWC(화학무기금지조약)에도 가입하지 못했지만 조약 내용은 준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 2020년대 들어서서 중국이 대만에 침공 위협을 가하기 시작하자 다시 핵무장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https://m.yna.co.kr/view/AKR20220413098300009?section=international/all|#]] * 중국은 2000년대 들어서 대만이 핵무장을 시도하거나 혹은 독립선언을 할 경우 곧바로 무력침공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엄포를 놓고 있다. == 언론기사 == *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179816/1|대만 비밀 核개발 전모]] - [[신동아]] 2018년 1월호 *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255100003|CIA는 대만 핵무장을 어떻게 좌절시켰나]] - [[주간조선]] 2255호(2013년) == 관련 문서 == * [[핵개발]] * [[양탄일성]]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중화민국군, version=734, paragraph=4.6)] [[분류:나라별 핵개발]][[분류:장제스 시대]][[분류:장징궈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