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제국군의 편제)] [[분류:1895년 설립]][[분류:1905년 해체]][[분류:대한제국군]] 大韓帝國 親衛隊 [목차] == 개요 == [[1895년]] 9월 [[김홍집]] 내각이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육군 편제 강령을 통해 군제를 개혁하면서 창설된 중앙군이다. [[대한제국군 시위대|시위대]]와 [[조선군 훈련대|훈련대]]를 합쳐 친위대를 편성했다. 2개 대대로 편성되었고 1,700명 규모였다. [[아관파천]] 이후 훈련대와 시위대를 합쳐 친위대와 지방 수비를 맡은 [[진위대]]로 나뉘었다. [[대한제국]] 건국 전인 1897년 9월 친위대의 정예병력을 선발하여 시위대를 부활시키면서 친위대의 규모는 축소되었다. 1902년에 군제가 강화되어 친위대의 규모는 다시 늘어났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일으키며 서울을 점령한 일본은 1905년 4월에 대한제국군의 1차 군축을 요구하여 진위대를 줄이고 친위대는 해산시켰다. 해산 당시 친위대의 규모는 2개 연대 4개 대대로 4,000명의 병력이었다. == 편제, 훈련 및 장비 == 처음에는 2개 [[대대]]로 시작했다. 1개 대대에 4개 [[중대(군대)|중대]]를, 1개 중대에 3개 [[소대]]를 편제했는데, 1개 중대는 220명으로 총 병력은 약 1,700명이었다. [[1896년]] [[1월]] [[공병]]으로 편제된 3대대를 창설했고, 3월에 제4대대, 5대대를 추가로 배치하였다. 그 후 4월 22일자의 칙령 21호로 공병대를 폐지하고 [[연대(군대)|연대]]로 편성하여 연대 본부와 휘하에 3개 대대를 두고 4대대, 5대대는 이를 독립 대대로 두었으며 [[기병]]대를 독립시켰다. [[아관파천]] 이후에 상당 병력이 다시 시위대로 독립하면서 친위대는 1개 대대로 감축되었다가, [[1900년]]에는 공병 1개 중대와 보급 중대 1개 중대를 증강했고, [[1902년]]에는 2개 연대로 증편되었다. 당시 [[제국신문]]의 기사를 보면 친위대는 3,000명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연대에는 [[연대장]], [[부관]](副官) 1명, 무기주관(武器主管) 1명, 기관(旗官) 1명이 있었고 각 대대에는 [[대대장]], 향관(餉官) 2명, 부관과 정교(正校) 각 1명, 부교(副校) 3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대에는 중대장, [[소대장]] 4명, 정교·부교·참교(參校) 각 1명, 곡호대(曲號隊)[* 나팔수로 이루어진 부대로 현대의 [[군악대]]이다.] 부교 1명이었다. 처음에는 러시아인 푸티아타(Putiata) 대령과 장교 3명을 포함한 10명의 교관단이 지도했고 무기도 러시아제 [[베르단]] 소총으로 훈련했으나, 이후 교관은 일본인으로 바뀌었고 총도 [[독일]]제 [[마우저 소총]]으로 교체되었다. 이 외에 독일 크루프사의 7㎝ 야포와 맥심 중기관총도 운용했다. == 몰락과 해산 == 위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을미 개혁과 함께 의욕적으로 창설된 군대였으나 [[일본 제국|일제]]의 방해로 만족할만한 전력은 갖추지 못했다. 맥심 기관총을 사들이는 과정에서도 방해가 있었으며, 그 이후로도 일본의 방해와 예산 부족으로 탄약 재고량이 넉넉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후 [[1905년]] 4월 16일 일제의 군제 개혁으로 인해 해산되었으나, 이곳의 병력과 [[1907년]] 정미 7조약으로 불리는 [[한일 신협약]] 때 군권을 빼앗기면서 해산된 시위대, 진위대의 병력과 함께 이후 [[의병]]에 합류하여 정미 의병의 [[서울 진공 작전]]을 계획하게 되는데 큰 전력이 되었다. == 관련 항목 == * [[친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