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고구려 국왕)] ---- ||<#0000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fbe673 '''동천왕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고구려의 왕자)] ---- [include(틀:역대 고구려 태자)] ---- ||||||||||||||<:><#000000> [[고구려|[[파일:고구려 군기.svg|width=50]]]] [br] '''[[탱리고도선우|{{{#fbe673 고구려 탱리고도선우}}}]]''' || ||<:> '''동천왕''' ||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00, #000000 20%, #000000 80%, #000000); color: #fbe673" '''고구려 제11대 국왕[br]{{{+1 동천왕 | 東川王}}}'''}}}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임강총.jpg|width=100%]]}}} || ||<-2><#000000> {{{#fbe673 {{{-2 동천왕릉으로 추정되는 임강총 전경.}}} }}} || ||<|2> '''출생[br]{{{-3 (음력)}}}''' ||[[209년]] [[9월]] || ||[[고구려]] [[국내성]] || ||<|2> '''사망[br]{{{-3 (음력)}}}''' ||[[248년]] [[9월]] (향년 39세) || ||[[고구려]] [[국내성]] || || '''능묘''' ||[[시원]](柴原)[* [[임강총]]으로 추정된다.] || ||<|4> '''재위기간[br]{{{-3 (음력)}}}''' ||'''{{{#fbe673 고구려의 태자}}}''' || ||[[213년]] [[1월]] ~ [[227년]] [[5월]] {{{-2 (14년 5개월)}}} || ||'''{{{#fbe673 제11대 국왕}}}''' || ||[[227년]] [[5월]] ~ [[248년]] [[9월]] {{{-2 (21년 4개월)}}}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횡성 고씨]] || || '''휘''' ||우위거(憂位居) / 위궁(位宮)[* [[진수]]의 《[[삼국지(정사)|삼국지]]》에 나오는 기록으로, 《[[삼국사기]]》에서는 산상왕의 다른 이름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통전》의 기록을 잘못 인용한 것이다.] || || '''부모''' ||부왕 [[산상왕]][br]모후 [[후녀]] || || '''형제자매''' ||미상[* 동천왕의 출생 이전에 산상왕의 처자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동천왕은 적어도 형제자매가 1명 이상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 '''왕후''' ||[[중천왕|고연불]]의 모후 || || '''후궁''' ||미상[* 동해 사람이 동천왕에게 미녀를 바치자 그녀를 후궁으로 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 || '''자녀''' ||태자 [[중천왕|고연불]][br]왕자 [[예물#s-2|고예물]], [[사구#s-3|고사구]] || || '''신장''' ||약 165cm 이상[* 고구려인 평균키가 [[https://m.cafe.daum.net/alhc/51q2/3502?listURI=%2Falhc%2F51q2|165cm]]였는데 힘이 셌고, 말을 잘 타고 사냥에서 활을 잘 쏘았을 정도의 무예가 출중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동천왕의 키는 165cm보다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 || '''아명''' ||교체(郊彘)[* 아명(兒名).] || ||<|2> '''시호''' ||'''동천왕(東川王)''' || ||'''동양왕(東襄王)''' ||}}}}}}}}}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구려]]의 제11대 군주. 휘는 우위거 혹은 위궁이다. '위궁'은 진수의 《[[삼국지(정사)|삼국지]]》를 따른 것인데,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본 것이 증조부인 [[태조대왕]]과 닮았기 때문에 그의 휘인 '궁(宮)'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내용은 《삼국사기》 산상왕 즉위 기록에 똑같이 나와 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서는 산상왕의 이름을 연우 또는 위궁이라고 했다. 정작 산상왕의 다른 이름인 이이모란 이름은 고국천왕 즉위년 기록의 주석에 딸려 있다.] 아명은 '교체(郊彘)'. 교제(郊祭, [[제사]])에 쓸 돼지와 관련된 사건으로 태어났다는 뜻이다.[* 달아난 제사에 쓸 돼지를 [[후녀]]가 잡아줬고, 이를 들은 산상왕이 후녀와 만나 그녀와의 사이에서 동천왕을 낳았다. 그래서 교체는 한자 뜻 그대로 '들돼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삼국사기》)] 《[[삼국사기]]》에서는 '동양왕'(東襄王)이라는 다른 존호도 전한다. [[산상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관노부(灌奴部) 주통촌(酒桶村) 출신의 [[소후]]인 [[후녀]]이며 그녀의 성씨는 전하지 않는다. == 생애 == === 출생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천제-대한민국역사복원협회.jpg|width=50%]]}}} || || 대한민국역사복원협회의 이대선 회장이 그린 동천왕. || 때는 203년 3월, [[산상왕]]은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에게는 본래 처자식이 있었으나, 형 [[고발기#s-3]]가 197년 5월 왕위 계승권 문제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자세한 사항은 [[고발기#s-3]] 문서 참조.] 모조리 몰살되어 더 이상 왕위를 이을 자가 없게 된 것이었다. 산상왕은 할 수 없이 산천에게 기도를 올리며 [[왕후 우씨]]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던 3월 15일 밤, 산상왕은 꿈에서 하늘에게 "내가 너의 [[소후]]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걱정 말라"는 계시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산상왕에게는 정실인 왕후 우씨가 있을 뿐 소후는 없었으므로, 잠에서 깨어난 왕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어찌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이때 국상 [[을파소]]는 "하늘의 뜻은 예측할 수 없으니 왕께서는 기다리십시오."라며 적절하게 대답하였다. 동년 8월 을파소가 사망하였고, 그렇게 장장 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산상왕은 여전히 아들을 가지지 못했다. 208년 11월, 제사를 위해 잡아두었던 [[돼지]]가 우리 밖으로 달아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담당자는 돼지를 쫓아 주통촌(酒桶村)까지 이르렀음에도 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얼굴이 아름답고 요염한 20대 여인 [[후녀]]가 나타나 앞장서 돼지를 포획하였다. 이 기묘한 소식이 산상왕에게 전해지자, 그는 이를 아들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 여겨 후녀와 만나고자 했다. 결국 왕은 한밤중에 신분을 감춘 채 후녀의 집 앞에 도착한 뒤 시종을 보내 알리게 했는데, 그 집에서는 왕이 온 것을 직감하여 감히 거절하지 못하였다. 산상왕이 방에 들어가 후녀를 불러서 교제하려고 하자, 후녀는 "대왕의 명을 감히 피할 수 없으나, 만약 다행히 자식이 생기면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산상왕은 이를 허락하였고, 그렇게 둘만의 시간을 보내다가 자정 무렵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국내성]]에 있는 왕궁으로 돌아갔다. 정실 왕비인 [[왕후 우씨]]는 이듬해인 209년 3월이 되어서야 남편이 주통촌 여인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를 질투하여 몰래 자객을 보내 [[후녀]]를 암살하고자 하였다. 우씨의 군대가 추격해오고 있음을 알게 된 후녀는 [[남장|남자의 옷으로 변장]]하고 도망쳤는데, 결국 군대와 맞닥뜨리게 되자 다음과 같이 일갈하였다. >爾等今來殺我, 王命乎, 王后命乎. 今妾腹有子, 實王之遺體也. 殺妾身可也, 亦殺王子乎. >너희들이 지금 와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왕의 명령이냐, 왕후의 명령이냐? 지금 내 뱃속에 아이가 있는데 실로 왕이 남겨준 몸이다. 내 몸은 죽일 수 있으나 왕의 아이까지 죽일 수 있겠느냐? 병사들은 후녀가 왕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음을 깨닫고, 감히 그녀를 해치지 못하여 왕후에게 돌아와 보고했다. 한편 [[산상왕]]은 이참에 후녀를 다시 만나 누구의 아이를 배었냐고 물었는데, 후녀는 "평생 [[형제]]와도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감히 다른 성씨의 남자를 가까이 했겠습니까"라며 임신한 아이가 산상왕의 친자임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를 기특히 여긴 산상왕은 위로와 증여를 한 뒤 돌아가 왕후에게 소식을 전했다. 암살에 실패한 [[왕후 우씨]]는 성질이 뻗쳐서 후녀를 반드시 죽이려고 했으나 결국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후녀는 6개월이 지난 209년 8월에 마침내 아들을 낳았는데, 산상왕은 "하늘이 나에게 대를 이을 아들을 준 것"이라며 기뻐하였다.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난 일로 말미암아 후녀를 만나게 되었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아이의 이름을 교체(郊彘)라 하였고, 후녀를 [[소후]]로 삼았다. 뒤늦게 밝혀진 사실로, 후녀의 어머니가 후녀를 임신하고 있을 적에 [[무당]]이 점을 쳐서 반드시 왕후를 낳을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후녀(后女)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산상왕과 후녀의 만남은 이미 하늘에 의해 예견되어 있었다는 논조의 기록이다. 교체는 4세가 되던 213년 1월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15세 전후의 나이였던 224년에는 왕손 [[중천왕|연불]]을 낳았다. 《[[삼국지(정사)|삼국지]]》 〈동이전〉에서도 "[[산상왕|이이모]](伊夷模)가 아들이 없어 관노부(灌奴部)의 [[후녀|여자]]와 사통하여 아들 위궁(位宮)을 낳았다"고 하여 간략하지만 비슷한 출생 배경을 전하고 있다. 또한 삼국지에 따르면 동천왕은 용감하고 힘이 세었으며, 말을 잘 타고 [[사냥]]에서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https://db.history.go.kr/id/jo_004r_0010_0030_0120#|#]] === 즉위 === 227년 5월,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1년간 재위하였다. 적어도 이때부터는 아명 교체(郊彘) 대신 우위거(憂位居) 또는 위궁(位宮)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동천왕 시기부터 부자 세습이 확립되기 시작한다'''.[* 사실 부자 상속이 정해진 시기는 이보다 전대인 [[고국천왕]] 때였으나, 고국천왕 본인부터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승하한 탓에 또 한 번 왕위 계승 다툼이 벌어져 동천왕의 부왕이자 고국천왕의 셋째 동생인 [[산상왕]]이 왕위를 잇게 된 것이었다.] [[중천왕]](동천왕의 장남) → [[서천왕]](중천왕의 차남) → [[봉상왕]](서천왕의 장남) 순으로 부자 간의 세습이 이어졌다. 그 후 봉상왕 → [[미천왕]]은 질백 간의 세습이지만[* 이는 봉상왕은 폐위된 군주이며 그의 동생 [[돌고]]의 아들인 미천왕이 추대되었기 때문이다.] [[미천왕]] 이후 아들 [[고국원왕]]부터는 모두 직계로 세습되어 쭉 그의 후손들이다. 아무래도 정실 왕후가 아닌 소후의 소생이다 보니, 228년 3월 왕태후(王太后)로 봉해진 [[왕후 우씨]]가 234년 9월 사망하기 전까지는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야 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어느 날 왕후가 동천왕의 심성을 시험해보고자 왕이 외출했을 때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자르게 했는데, 동천왕은 돌아와 "말이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구나."라고 말하며 대충 넘겼다고 한다. 동천왕에게 수라를 올릴 때에도 우씨가 시종에게 일부러 동천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라고 명령했을 때도 [[나는 관대하다|역시 화를 내지 않을 만큼 성품이 관대하고 인자했다고 전한다.]] 후일 동천왕은 자신에게 했던 모든 행위의 배후에 우 왕후가 있음을 알게 되었음에도, 오히려 왕태후의 예로 모셨다고 한다. === 내정 === 230년 7월, [[을파소]]의 뒤를 이어 국상의 벼슬을 지내던 [[고우루]]가 사망하자 그 자리에 우태(于台) [[명림어수]]를 앉혔다. === 위나라와 충돌하다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비류수 전투)] 치세 초기에는 [[위(삼국시대)|조위]]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이때 [[오(삼국시대)|동오]]의 [[손권]]이 [[동연]]의 수장 [[공손연]]에게 사신을 보내 [[동맹]]을 맺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공손연은 손권을 배신하고 사신들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냈다. 이 사신들 중 일부가 탈출하여 [[고구려]]까지 넘어왔는데, 동천왕은 그들을 잘 대접하고 [[보물]]과 호위 무사를 딸려서 오나라로 도로 보내주었다. 죽은 줄 알았던 사신들이 돌아오자 손권은 기뻐하며 공손연 대신에 고구려와 동맹을 맺기로 하고 다시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고, 이때 손권이 동천왕을 '흉노 선우'로 책봉했다. 하지만 [[고구려]]는 234년에 위(魏)나라와 화친하고, 236년에는 [[손권]]의 사신 호위(胡衛) 등을 참수한 뒤 그들의 머리를 유주로 보냈는데 이는 위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확실히 하겠다는 의사표시로 해석된다. 238년 위나라가 공손연(公孫淵)을 포함한 요동의 동연을 [[토벌]]하자 군사 1,000여 명을 보내 위나라를 지원하기도 했다.[* [[신채호]]는 수만(數萬)여 명이라고 주장했다.] 허나 이것은 위나라를 정탐하려는 다른 꿍꿍이로 벌어진 것이었는데 실제 [[공손연]]의 세력이 멸망하고 위나라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고구려와 위나라의 관계는 악화 일변도를 걷게 된다. 238년의 [[중국]]은 《[[삼국지연의]]》로 유명한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로 [[촉한]]의 [[제갈량]]이 234년 사망한 직후였다. 다시 말하면 조위의 기세가 점점 상승하던 시기였다. 명제 [[조예]]는 239년에 죽었고 조위가 촉한에게 완패하는 [[흥세 전투]]는 244년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동천왕과 관구검이 충돌하던 시점은 조위의 최고 [[전성기]]였던 것이다. 특히 고구려는 공손연 토벌을 지원하고도 위나라한테 받은 보상이 하나도 없다보니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그래서 동천왕은 242년에 위나라 요동의 험요지인 [[단둥시|서안평]]을 선제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때 신하였던 득래가 고구려가 쑥대밭이 될 것이니 단식을 하면서까지 위나라와의 전쟁을 반대했지만 동천왕은 무시하고 위나라 공격을 강행한다. 끝까지 단식했던 득래는 결국 굶어 죽었다.] 이에 분노한 위나라가 244년 8월 유주 자사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를 전격 침공했다. 사실 이 시기는 244년 4월 흥세 전투에서 위나라가 촉한한테 개털린 직후였는데, 당시 위나라 최대의 척신인 [[조상(삼국지)|조상]]이 대대적으로 촉한을 침공했음에도 실패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위나라가 동북의 고구려를 침공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고구려가 관구검을 격파하는데 성공했지만 이에 들뜬 나머지 관구검을 추격하다가 [[비류수 전투]]에서 처참하게 [[역관광]]을 당했다. 당시 전투를 다루고 있는 많은 책들에서는 동천왕이 "기병이 보병보다 낫다"는 생각에 빠져 위나라 [[보병]]들의 [[기병]]에 대한 전법을 몰랐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당시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환도성]]까지 내주고 말았다. 고구려는 [[평화]] 시기에는 평지성인 [[국내성]], 전시에는 산성인 환도성을 도읍으로 했는데 이 둘이 가까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환도성을 내줬다는 건 사실상 국내성도 내줬다는 이야기가 된다. 245년 재차 관구검이 밀고 내려오자 동천왕은 북[[옥저]]로 도망쳐야 했다. 관구검은 현도 태수 [[왕기(삼국지)|왕기]](王頎)를 보내 동천왕을 추격했는데 246년에 이르러 동천왕은 [[밀우]]와 [[유유(고구려)|유유]]의 계책으로 위나라의 장수[* 왕기는 고구려 침공 이후로도 활동했기에 이때 죽은 위나라 장수는 왕기의 부하로 추측된다.]를 죽이고 역습을 가해 왕기의 위군을 패퇴시키는데 성공했다. 밀우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위군의 추격을 늦췄고, 유유는 >"형세가 매우 위태롭고 급박하나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략이 있습니다. 청컨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군에 제공하고 틈을 엿보아 저들의 장수를 찔러 죽이겠습니다." 라고 제안하여 적진으로 들어가 적장과 함께 [[동귀어진]]했고 동천왕은 이 틈을 타 수습한 병력으로 위군을 공격하여 무찌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환도성으로 돌아오자 성은 이미 폐허로 변해있어서 도읍을 임시로 [[평양성]]으로 옮겨야 했으며 [[태자]]인 [[중천왕]]이 [[왕위]]에 오르고서야 다시 국내성으로 환도했다. 이 평양성이 평양에 있는 [[대성산성]]이라는 주장 등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일단 우리가 아는 평양은 아닐 가능성이 높은데 그 당시 이 지역은 [[낙랑군]]의 영역이었던 데다가 이름도 평양이 아니라 조선현(朝鮮縣)이었다.] 동천왕 때 큰 피해를 입은 고구려는 70여 년 후 위나라의 뒤를 이은 사마씨의 [[서진]]이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혼란에 빠진 [[미천왕]] 시기인 313년에 비로소 서쪽의 서안평, 남쪽의 낙랑군과 대방군 등을 공격해 싸그리 집어삼키면서 확실히 앙갚음하게 된다. === 말년 === 248년 [[신라]]와 화친했고[* 245년 10월 신라 북쪽을 침공한 적이 있었다. 동천왕대 신라 관련 기록은 신라본기 쪽 기록을 고구려본기에 내용만 조금 수정해서 옮겨적은 기록이며, 실제로는 동천왕대 기록이 아닌 4세기 초중반대 기록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내용은 [[석우로]] 문서 참고.] 그 해에 동천왕이 승하하자 [[신하]]나 [[백성]]들이 크게 슬퍼한 나머지 [[순사#s-2|동천왕을 따라 죽으려고 했다]]고 한다. 후임인 중천왕은 이것은 예가 아니라고 금지했지만 결국 장례일에 장지에서 왕을 따라 죽는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이때 백성의 [[시신]]들을 죄다 땔[[나무]]로 덮어버려서 동천왕릉이 있는 곳을 땔나무 '시'(柴)를 써서 '시원'(柴原)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왕이 죽었다. 시원(柴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동천왕이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은덕을 생각하며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가까운 신하 중에 자살하여 따라 죽으려고 하는 자가 많았으나, 새 임금이 예가 아니라고 여기고 그것을 금하였다. 장례일이 되어 묘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땔나무를 베어 그 시체를 덮었으므로, 마침내 그 땅을 시원이라고 이름하였다. >---- >《[[삼국사기]]》 동천왕 22년(서기 248년) 9월조 그 후 아들인 중천왕이 왕위에 올랐고, 아버지의 수난에 화난 중천왕이 위나라 소속의 선비족이 침공해왔을 때 [[양맥 전투]]에서 이를 물리치고, 선비족 8,000여 명의 수급을 베어버리면서 아버지 동천왕의 원수를 제대로 갚았다. == 기타 == * 2000년대 중반 동천왕 벽비, 동천왕 양위 벽비라는 정체불명의 유물이 나왔지만 전부 위작으로 밝혀져서 사료적 가치는 없다. [[https://m.blog.naver.com/yc8663/221031898379|동천왕 11년명 벽비]], [[https://blog.naver.com/xurongzhen/220031922498|또 다른 자료]]. 애초 근래 이전에 사용되지 않는 한자가 쓰인 점을 미뤄보면 20세기에 [[조작]]된 걸로 추정되고 있다. * 동천왕의 친어머니 [[후녀]]는 《삼국사기》에는 '주통촌의 여인'이라고 되어 있는데 유력가가 아닌 일개 촌에서 살던 여자에게서 태어났으니 자연히 동천왕 역시 행동 자체를 조심스럽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금만 수틀리면 반대 세력이 "촌 출신이 설친다."라며 들고 일어날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 동천왕릉은 [[임강총]]으로 추정되는데, 임강총은 국내성 일대 무덤 중 가장 크다. 실제로 가서 보면 '''무덤 규모가 [[장군총]]을 압도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임강총의 규모에 대해서는 동천왕 개인뿐만 아니라 왕을 따라 [[순사]]한 백성이나 신하들을 한꺼번에 묻어서 이렇게 커졌다는 해석도 있다. * 동천왕이 승하하자 따라 죽으려고 한 사람들 역시 많았다는 것으로 봐서 당시 신민들에게는 꽤 존경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이 적어서 그렇지 당시에는 [[성군]]으로 제법 존경받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동천왕이 단순하게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리며 번영시킨 타입의 성군이 아니라는 걸 감안하면 저런 존경심은 괴이해 보일 정도이다. 동천왕은 재위 말기, 그러니까 죽기 2년 전에 [[위(삼국시대)|위나라]]한테 괜시리 [[선빵]]을 쳤다가 [[역관광]]을 당해서 [[수도(행정구역)|수도]]인 [[국내성]]-[[환도성]]까지 털리고 동천왕 본인도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린 상황에서 어찌저찌 위군이 물러나면서 살아남았다. 한마디로 임금 한 사람의 오판으로 나라가 망할 뻔했는데 위군이 물러가고 나서 동천왕이 승하할 때까지 1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왕이 전국적인 지지도를 회복했다는 뜻이 된다. 자기 나라의 왕이 옆나라 선빵쳤다 되레 털려가지고 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결국 지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라가 망할 뻔했다.[* 이는 이전까지의 왕들과 비교해봐도 초라한 실적인데 동천왕 이전의 왕들은 민중왕과 차대왕만 빼면 외치에서의 업적도 있었다. 게다가 차대왕도 태조대왕 시절 왕제 자격으로 후한과의 전쟁에 참전해 승리하여 실적을 쌓았다. 물론 유리왕은 부여의 5만 군대에 위험해졌다가 폭설 덕에 살아났고 대무신왕도 대소왕과 싸우던 도중 위기에 처했으며 산상왕은 아얘 수도가 공격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리왕은 부여의 재침을 막아냈으며 대무신왕은 어쨌든 대소왕을 죽이기는 했고 산상왕도 아들과는 달리 수도는 지켜냈다. 뭔가 외치에서 흠이 있는 이들도 하나 정도는 업적이 있는데 동천왕만은 정말 굴욕을 제대로 당하다가 겨우 살아난 거다.] 그런데도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왕이 승하할 때 다수의 [[신하]]랑 [[백성]]들이 뒤를 따라 [[자살]]했다는 것이다. 동천왕이 그전에 쌓아온 인덕이 워낙 컸거나 아니면 전후의 수습 기간 동안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해 금방 회복시킨 것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때문에 이때 관련한 [[고고학]]적 발굴 조사나 [[역사학]] 연구가 되어서 동천왕의 내정 관련 자료가 더 발견된다면 평가가 올라갈 가능성도 꽤 높다. * 위나라와 전쟁할 당시 [[밀우]]가 자신을 구하다 다치자 직접 다리에 눕혀 돌보아주었다는 점을 보면, 아랫사람을 잘 봐주는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역시도 정치적인 면이 있었을지도.[* 이후 실제로 동천왕의 목숨을 구해준 밀우와 밀우를 구출한 유옥구는 식읍을 받는 것으로, 위나라 장수와 동귀어진한 유유는 유유의 아들 다우가 대사자로 임명되는 것으로 보상받기는 했다. 이는 기본적인 논공행상이지만 이것도 제대로 못해 말아먹는 사람도 있는 걸 보면 동천왕에게 기본적인 정치력은 있었다고 봐야 한다.] * 임용한은 이 때 고구려가 위나라를 이기고 요동을 점령했다는 가정을 하면 고구려가 가장 먼저 크게 발전하는 나라가 되었을 거라는 의견을 내놨다. 실제 관구검에게 패배하고 국내성을 빼앗긴 게 꽤 컸는데 이 때 동천왕이 임시로 평양으로 가면서 평양 세력이 커지게 되었고, 장수왕때는 아예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강해진 평양성 세력과 국내성 세력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도 대립했다고 한다. == 대중매체에서 == * [[최훈]]의 《[[삼국전투기]]》에서는 《[[태왕북벌기]]》의 [[담덕]]으로 패러디된다. 본격적인 첫등장인[* 전투 외편 3-3편의 마지막 컷에서 모습을 비추면서 처음 등장했지만 본격적인 등장은 비류 전투편부터이다.] 비류 전투 (1)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 너그럽지만 의외로 싸움은 잘한다나. 그리고 최훈은 위나라가 [[흥세 전투]]에서 [[왕평]]에게 처발린 걸 숨기기 위해 관구검을 높이 띄워줬다고 평했다. 물론 이건 최훈의 개인 설정으로 역사적인 근거는 '''없다'''. 비류 전투편에서 처음 등장. 공손연에게 통수를 맞고 간신히 도망친 동오의 사신 일행을 받아들였고, 동오의 사신이 고구려에게 줄려고 했던 선물을 요동의 공손연이 털어갔다며 거짓말을 하자 동천왕은 선물은 앞으로 받을 걸로 치고 답례품과 칭신을 맹세하는 표문을 사신에게 줘서 동오로 돌려보냈다. 동천왕은 요동을 얻고 싶었기에 동오와 손을 잡기로 했던 것. 동천왕은 동오가 조위를 견제하는 동안 요동을 치는 걸로 계획하고 있었는데[* 작가의 추측이다.], 뜻밖에도 조위와 요동의 사이가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고, 이 때문에 동천왕에게 있어 동오의 존재가치가 떨어지게 되었다. 그렇기에 동천왕은 234년경 조위와 화친을 맺었고, 236년경 동오가 보낸 사신의 목을 잘라다 조위에 바치며 손권의 뒷통수를 쳤다. 그리고 조위와 요동의 공손연이 전쟁을 벌일 때 지원군을 보내 공손연 격파에 일조했지만 [[토사구팽|아무것도 돌아오는 건 없었고]], 이에 서운해진 동천왕은 242년경 요동의 서안평 공격을 명하였다. 동천왕은 위나라가 명제 조예 사후 개판이 된 상태라면 변경까지 지속적으로 신경을 쓸 수는 없을 테니 요동을 공격할 적기라고 판단하고 공격한 것이었고, 실제로 서안평도 접수하는데 성공하고 그 이후에도 수 차례 요동을 찔러대기도 했다. 보다못한 관구검이 직접 나서며 위군과 비류수에서 맞붙게 되었고, 첫 전투에서는 철기마를 이용해 관구검의 군세의 6할을 날려버리는 대승을 거두지만 이후 전투에서는 방진에 제대로 물을 먹으며 병사의 9할을 날려먹고 퇴각하게 되었다(표현하길 '저놈들은 일점공격밖에 못하니 우린 일점방어로 간다!' 피터지게 싸워가며 온갖 전술을 익힌 중국군을 표현한 것. 환도성에서 방어선을 짜 봤지만 환도성까지 위군에 대패하며 무너졌고, 결국 동천왕은 수도를 버리고 옥저로 피신했다. 왕기가 이끄는 위군의 추격은 계속 이어졌지만 유유가 위장 암살에 성공한 틈을 타 동천왕이 추격대를 타격하여 물리치면서 간신히 목숨은 붙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쑥대밭이 된 국내성 대신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248년에 사망했다.[* 이 평양성의 위치 논란을 작가도 알고 있는지 중천왕이 평양성이 어디냐고 묻고, 직후 죽은 동천왕에게 평양성이 어딘지는 알려주시고 가셔야라며 운다.] *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관구검]] 열전에서 언급이 되었다. [[맹획]][* 다만 연의 한정. 정사에서는 엄연히 중국인 호족이며 이민족이라는 언급도 없는 인물이다.], [[답돈]], [[호주천]], [[히미코]][* 4나 9에서 간접적으로 나왔고 13에서 정식 등장은 아니고 [[고대무장]]으로 나왔다], [[조씨정]] 등 삼국시대에 중국과 엮인 적 있는 주변국 군주들이 장수로 많이 등장하는 게임이지만 아직 동천왕 및 고구려 장수[* 혹은 한국계 장수(예, 맥, 한 등).]가 등장한 삼국지 시리즈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회사가 만든 [[삼탈워]]에도 없다. * 유튜버 [[삼칠이]]의 삼국지 랭킹전에선 고구려 인물들 중에서 무려 3번이나 언급되는데, 손권이 저지른 뻘짓 TOP 10 중 외교참사를 일으킨 사례와, 반란을 일으켰다가 망한 인물 TOP 5에서 관구검을 언급할 때, 그리고 손권의 뻘짓으로 인한 나비효과로 인해 위나라와 고구려가 싸우게 된 사례를 설명할 때 언급된다. * 《[[아! 내가 마속이다]]》에서는 온화하고 선량한 성품으로 오나라 사신단을 환영하며 국교를 맺는 역할로 등장한다. == 《[[삼국사기]]》 기록 == [include(틀: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45&categoryId=49615&cid=49615|《삼국사기》 〈동천왕 본기〉]]''' 一年夏五月 동천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시조 사당에 제사 지내고 대사면을 단행하다 二年春三月 우씨를 왕태후로 삼다 四年秋七月 명림어수를 국상에 임명하다 八年 조위가 사신을 보내오다 八年秋九月 태후 우씨가 죽다 十年春二月 오의 손권이 사신을 보내오다 十一年 조위가 연호를 개정한 것을 축하하다 十二年 조위를 도와 공손연을 공격하다 十六年 서안평을 공격하다 十六年 연불을 왕태자로 삼고 사면을 실시하다 十九年春三月 동해의 미녀를 후궁으로 맞이하다 十九年冬十月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다 二十年秋八月 위의 유주 자사 관구검이 침략해오다 二十年冬十月 위의 관구검이 침입하자 이를 물리치다 二十一年春二月 평양성을 쌓고 천도하다 二十二年春二月 신라가 사신을 보내오다 二十二年秋九月 동천왕이 죽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고구려 왕실)] [각주] [[분류:동천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