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시베리아]] [[분류:러시아의 역사]] [include(틀:러시아 관련 문서)] [include(틀:시베리아의 역사)] [목차] [clearfix] == 개요 == 대략 16세기부터 18~19세기까지에 걸친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에 대한 문서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 이후로 [[러시아 제국]]과 그 후신인 현대 [[러시아]]는 지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되었다. 흔히 혼동되는 사안이지만 러시아의 시베리아 확장에서 카자크들의 시비르 칸국 '정복'은 특정 기간과 지역에 한정된 지엽적인 사건에 불과했다. 애시당초 정규군대도 아닌 카자크들은 원주세력의 정치적 구심점을 격파하더라도 독자적으로 이를 대체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거나 상주하면서 통치할 수 있을 만한 역량은 없었다. 때문에 흔히 무시되지만 어디까지나 '''러시아의 시베리아 확장은 수 세기에 걸친 러시아 농민들의 개척'''이 메인이다. == 카자크의 이동 == 1570년대 [[루스 차르국]]의 스트로가노프 가문[* 비프 스트로가노프의 그 스트로가노프 맞다. 자세한 내용은 [[비프 스트로가노프]] 문서 참조.]이 [[우랄 산맥]] 서부의 광산을 개발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는 와중에 바로 시비르 칸국이 광산 노동자들이 사는 지역을 습격하여 광산업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이에 분개한 스트로가노프는 차르 [[이반 4세]]에게 시비르 칸국을 토벌할 것을 호소하여 허락을 받고, [[코사크]] 산적 출신의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Ермак Тимофеевич)'''를 아타만[* [[러시아어]] 표기는 Атаман, 러시아 카자크 부대 내 최고 [[지휘관]]에 대한 호칭.]으로 삼아 [[카자크]] 기병 500여 명에 리보니아 전쟁 와중에 포로로 잡은 [[란츠크네히트|독일인]]과 [[리투아니아인]] 300여명을 동원하여 1581년에 [[시비르 칸국]]과의 전쟁을 개시했다. == 원주민 정복 == 16세기 초반에 [[시비르 칸국]]은 오늘날의 서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 일부 지역를 지배하는 시베리아의 강력한 국가였다. 시비르 칸국은 러시아와 경제적 유대 관계를 유지했고 중국과 유럽 간의 중요한 무역 중심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16세기 말에 러시아 코사크들이 이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다.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의 코사크들은 1580년대에 시비르 칸국 영토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1582년 코사크들은 추바시 전투에서 시비르 칸국의 군대를 무찔렀고, 이로 인해서 더 동쪽으로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로도 계속 중요한 무역 중심지와 요새를 정복하다가 마지막 거점인 카쉬리크를 점령하였다. 결국 사실상 러시아인들에게 합병당한 것이다. 러시아 코사크 정복 이후로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에서 튀르크계 칸국들이 쇠퇴하고 대신 [[코사크]]가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코사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 극동으로 확장 == || [[파일:Treaty-of-Kyakhta.jpg|width=90%]] || 1598년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 식민도시 [[톰스크]]를 세웠으며, [[17세기]]에는 [[바이칼호]] 부근까지 진출했다. 이후 1647년, 기어이 러시아는 북태평양 연안에 도달했으며, 이를 [[오호츠크 해]]라 이름붙였다. 이후 러시아는 [[예니세이 강]]에 세운 식민도시와 [[레나 강]] 중류의 [[야쿠츠크]]를 바탕으로 1638년 남진을 시작, [[아무르강]] 유역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당시 아무르강에 도달한 탐험대는 포야르코프 원정대로, 이후 하바로프[* 훗날 이 강변에 세워지는 도시 [[하바롭스크]]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원정대가 1649년, 1651년 두 차례에 걸쳐 강 근처 [[원주민]] 부락들을 공격하고 부락의 물품들을 노획하는데, 이때 주로 노획한 물품은 [[털]][[가죽]]이었다. 1648년 러시아의 탐험가 세묜 데즈뇨프는 베링 해협을 발견하여 러시아가 극동으로 확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17세기 후반에 러시아인 탐험가들과 무역상들은 [[캄차카 반도]], [[오호츠크]] 등 태평양까지 진출하여 전초 기지를 세웠다. 이 기간동안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 시민들에게 동쪽으로 이주를 장려하여 시베리아 지역을 개발하려고 했다. 하지만 극동으로 확장하는데 [[청나라]]와 분쟁도 있었다. 당시 [[만주족]]의 청나라는 만주와 몽골의 영토를 장악하였는데 17세기 후반 러시아의 확장으로 인해 러시아인들을 위협으로 봐서 러시아와 청나라는 접촉하게 되었다. 영토를 두고 싸우다가 1689년 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에 [[네르친스크 조약]]이 체결되어 두 국가 사이의 국경을 설정했다. == 시베리아 개발 == || [[파일:Подведение_сибирских_инородцев_под_высокую_Царскую_руку.jpg|width=90%]] || 사실 러시아가 원체 크고, 전근대의 행정력이 낮은지라 대러시아 지방을 제외한 유럽도 통제가 약했고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캅카스 등은 그냥 현지 유력자의 통치권을 적당히 인정해주거나 특정 거점의 현장 군사령관의 군정을 세워서 분할 통치(divided and rule)에 입각하여 정책을 펼치는 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반 4세]]는 동방 민족들 사이에서 '''하얀 차르(혹은 하얀 칸)'''으로 칭송받았고, 이는 19세기에 [[예카테리나 2세]]가 [[캄보 라마]]로부터 '''하얀 타라보살의 화신'''으로 인정받으면서 러시아 차르들의 아시아, 시베리아권으로의 통치 이념이 확립되기 시작한다.[* [[모스크바 대공국]] 시절부터 일종의 비공식 칭호로 러시아 군주들에게 '하얀(Белый)'라는 형용사가 붙었고 이는 기독교적 이념에서 온 것이었다. 즉 재미있게도 기독교적 이념이 중앙아시아, 시베리아의 비기독교 민족들의 전통적 전승과 결합하면서 독특한 관념을 만들어 낸 것.] 그러나 이런 것들은 정립된 시스템 없이 그때그때 다른 케바케거나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였고 19세기에 넓은 지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국가 체계와 법률을 성문화하고 이론적 법의 토대를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832년에 러시아 제국 기본법이 발간되었고 코카서스,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의 대부분의 현지 법률과 관습은 전 러시아 법과 연결시켰다. 1822년 미하일 스페란스키는 "이노로드치 행정 헌장"과 "시베리아 키르기스 헌장"을 채택했다. 이 법령은 원주민의 통치 체계를 결정했으며 그들은 "이노로드치(Инородцы)"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이 헌장에 따르면 이노로드치는 크게 "정착민(оседлые)"[* 영구적 거주지가 있지만 기독교인은 아님], "유목민(кочевые)"[* 일년에 여러 번 거주지를 변경함] 및 "방황민(бродячие)"[* 강이나 특정 지대를 따라 이동함]의 세 범주로 나누었고, 이 구분에 따라 그들의 행정적 및 법적 지위를 결정했다. 정착민 이노로드치는 대충 국가농민과 비슷한 법적 위치를 지녔고[* 전반적으로 정주민에 가까울 수록 러시아 농민들과 비슷해졌다.], 자신들만의 자치정부를 가지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교역을 하면서 방랑하는 이노로드치들은 러시아 시 자치정부에 속했다. 반대로 정착민과 방황민들은 이전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관습과 규칙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최소 15개 가구가 속한 스토이쉐나 울루스는 자체 부족 관리가 존재했다. 일부 스타로스타는 해당 부족들이 선출하거나 세습하여 러시아 지방정부의 승인을 받는 식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전반적으로 케바케가 심했고 러시아 제국 중앙정부는 오히려 각 부족과 민족들 사이의 중재자, 균형자로서 군림하면서[* 예를 들자면 러시아 중부 지역에서의 인구과잉으로 농민-정착민들이 동쪽과 남쪽으로 이주하던 당시 기존 원주민들과 토지 점유를 두고 갈등이 있었는데, 이 소수민족들의 대응책 중 하나는 러시아 정부에 청원하는 것이었고 결국 둘 사이의 분쟁은 무력 충돌이 아닌 재판장에서 이어진다.] 특정 시기(주로 전쟁기)에 해당 부족들에게 의무를 강요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러시아 농민 인구과잉으로 인해 새로운 농지를 개척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으로 러시아 제국의 '서구화'와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이들에 대한 국가 통제력을 점차 강화하는 방향의 정책이 시작된다. 당연히 여기에는 시베리아의 소수민족들을 국가 시스템에 통합시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시베리아 소수민족들의 일상생활도 자본주의화로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개선되고 악습들이 종식되어간 반면 전통사회와 문화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이르쿠츠크]]와 같은 새로운 행정 구역 및 기관을 설립했다. 나중에는 가장 중요한 발전 중 하나인 [[모스크바]]와 [[러시아 극동]]을 연결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인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하였다. 19세기는 또한 광산, 목재 생산과 같은 새로운 산업이 출현하여 러시아 제국의 산업화를 도왔지만 이러한 산업은 원주민들을 희생시키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20세기에는 스탈린의 [[굴라크]]가 시베리아에 많이 건설되어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트라우마를 얻거나 목숨을 잃었다. 또한 1630년대부터 처음 시베리아 땅에 들어온 [[천연두]]는 1650년대 예니세이강 동쪽에 살던 [[사하]]와 [[퉁구스]] 인구의 80%를 감염시켰고, 1690년대 [[유카기르]] 인구의 44%를 죽여버리는 데 일조했다. 특히 유카기르의 경우는 그 세력이 급격하게 축소되어 오늘날엔 콜리마 일대에서 겨우 연명하고 있는 듣보잡 소수민족으로 전락해버렸다. 전 세계적으로 민족주의가 발흥하던 20세기 초중반에 이 지역은 당연히도 [[소련]]이었다. 소련은 많은 소수민족 지역에 자치공화국을 형성하며 민족 평등에 신경을 썼다. 이러한 상황들이 겹치면서 오늘날 극동과 시베리아 지역은 사하와 투바 지역을 제외하면 [[러시아인]]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고, 독립 여론 역시 없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