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시성된 교황]][[분류:가톨릭 성인]][[분류:성 베드로 대성당 안장자]][[분류:750년 출생]][[분류:816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로마 제국의 황제, rd1=레온 3세)] [include(틀:역대 가톨릭 교황)] ||<-5><#806600> [[교황|[[파일:교황 문장.svg|height=40]] '''{{{#FFF 가톨릭 교회의 교황}}}''']] || ||<-5> [[파일:96_s_leone_III.png|height=125]] || || 제95대 [[하드리아노 1세]] || → ||<#806600> '''{{{#FFF 제96대 성 레오 3세}}}''' || → || 제97대 [[스테파노 4세]] || * [[라틴어]]: Leo III * [[이탈리아어]]: Leone III * [[영어]]: Pope Leo III * 생몰년: 750년 ~ 816년 6월 12일 * 재위 기간: 795년 12월 27일 ~ 816년 6월 12일 [목차] == 개요 == 제96대 교황. == 생애 == 레오 3세는 전임 [[하드리아노 1세]]가 사망한 후 치러진 장례식에서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정황상 프랑크 왕국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이처럼 빠른 교황 선출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레오 3세는 교황좌에 착좌한 직후 '베드로의 열쇠'와 '로마의 기(旗)'를 [[샤를마뉴|카롤루스]]에게 보내어 일종의 충성 서약을 한다. 하지만 교회 내부에서는 이러한 교황의 저자세를 비판적으로 보는 세력들이 있었고, 특히 전임 교황의 추종자들은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게 된다. 결국 799년 4월 전임 교황 [[하드리아노 1세]]의 조카를 영접하는 도중 레오 3세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암살은 미수에 그치긴 했지만 교황의 신변에 심각한 위협이 있음이 증명되었고, 교황은 거처를 [[파더보른]]으로 옮긴다. 당시 [[파더보른]]은 카롤루스의 야영지였기 때문에 교황의 신변을 보호할 수 있었다. 교황이 자리를 비우자 그를 갖은 항목으로 비난하고 고소하는 일이 이어졌다. 일련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카롤루스는 교황의 위법성을 증명할 증인은 [[파더보른]]으로 와서 교황의 죄를 증명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800년 12월 1일 카롤루스는 교황이 로마에 가서 교회회의를 열어 무죄를 증명하도록 했으며 레오 3세를 호위할 병사들을 딸려보냈다. 이 회의에서 레오 3세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했으며 결국 무죄를 입증했다. 그 후, 800년 12월 25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카롤루스 대제]]는 자신의 아들을 위한 [[도유식]][*塗油式 머리에 기름을 붓는 행사로 왕위 장차 왕위에 오를 것임을 나타내는 행사다.]을 행해 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이날 행사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데, 레오 3세가 카롤루스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준 것이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지 300여 년 만에 부활하는 상징적인 일이었다. 이로서 '성화상 공경 문제'로 소원해졌음에도 상징적으로나마 종주권을 쥐고 있던 [[동로마 제국]]과의 결별이 확실해졌다. 이후 확실한 후견자를 확보한 레오 3세와 서로마 황제이자 서유럽의 패자로 자리매김한 카롤루스는 정치와 종교에서 각각 확고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된다. 레오 3세는 이러한 안정적 배경을 바탕으로 많은 성당을 세우는 한편, 잉글랜드를 비롯한 서유럽 전역에서 종교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레오 3세는 816년 6월 13일에 선종하였고,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6월 12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