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벨기에의 국왕, rd1=레오폴드 1세)] [include(틀:역대 신성 로마 황제)] [include(틀:역대 헝가리 국왕)] [include(틀:역대 보헤미아 국왕)] ||<-2>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10대 황제''' [br]{{{+1 '''레오폴트 1세'''}}}[br]'''Leopold I'''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1280px-Benjamin_von_Block_001.jpg|width=100%]]}}}|| || '''이름''' ||레오폴트 이그나츠 요제프 발타자르 펠리치안[br](Leopold Ignaz Joseph Balthasar Felician)|| || '''출생''' ||[[1640년]] [[6월 9일]][br][[오스트리아 대공국]] [[빈(오스트리아)|빈]]|| || '''사망''' ||[[1705년]] [[5월 5일]] (64세)[br][[오스트리아 대공국]] [[빈(오스트리아)|빈]]|| ||<|8> '''재위''' ||[[신성 로마 황제]], [[로마왕]]|| ||[[1658년]] [[7월 18일]] ~ [[1705년]] [[5월 5일]]||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 국왕|| ||[[1656년]] ~ [[1705년]] [[5월 5일]]||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 대공, [[크로아티아 왕국|크로아티아]] 국왕|| ||[[1657년]] ~ [[1705년]] [[5월 5일]]|| ||[[헝가리 왕국|헝가리]] 국왕|| ||[[1655년]] ~ [[1705년]] [[5월 5일]]|| ||<|3> '''배우자''' ||[[스페인]]의 [[마르가리타 테레사]][br],,(1666년 결혼 / 1673년 사망),,|| ||[[티롤 후백국|오스트리아티롤]]의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br],,(1673년 결혼 / 1676년 사망),,|| ||[[엘레오노레 막달레네|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마그달레네]] ,,(1676년 결혼),,|| || '''자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프 1세]], 마리아 엘리자베트, 레오폴트 요제프, 마리아 안나, 마리아 테레지아, [[카를 6세]],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막달레나|| || '''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 || '''어머니''' ||스페인의 마리아 아나[* [[펠리페 3세]]의 딸.]|| || '''형제''' ||[[페르디난트 4세]], 마리아나, 필리프 아우구스트, 막시밀리안 토마스|| || '''종교''' ||[[가톨릭]]|| || '''서명''' ||[[파일:레오폴트 1세 서명.svg|width=100]]|| [목차] [clearfix] == 개요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 왕, [[헝가리 왕국|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왕국|크로아티아]] 왕이다. 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는 레오폴트 6세이다.[*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1세는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 중 한 명이다.] [[합스부르크 제국]] 역사에서 걸출한 업적을 남긴 군주 중 한 명이다. 개인적으로 부침은 있었을지언정 걸출한 외교력을 바탕으로 [[오스만 제국]]을 [[헝가리 왕국]]에서 몰아내며 근대 유럽의 판세를 바꾸어 놓았고, 이를 통해 합스부르크 제국의 중흥의 기반을 만들었다. 전쟁으로 시작해 전쟁으로 끝났다는 평까지 들을 정도로 치세가 모두 전쟁으로 도배되었던, 유럽의 격동기를 살았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주이다. 레오폴트 1세 대에 [[티롤]]과 외지오스트리아[* [[슈바벤]]과 [[알자스]]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월경지]]]를 다스렸던 티롤 분가[* [[페르디난트 2세]]의 남동생인 레오폴트 5세로부터 시작된 분가이다.]의 대가 끊기면서 [[프리드리히 3세(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3세]] 및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 대에 일시적으로 통일되기도 했었던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분할 상속이 완전히 끝났다. 초상화를 보면 알다시피, 선대부터 수차례 거듭된 근친혼으로 인해 이쪽도 친척인 [[카를로스 2세]]만큼은 아니지만 근친혼으로 인한 주걱턱과 유전병이 심각한 편이었다. 더더욱이 이 시절엔 사진이 없던 시절이라 저 초상화도 실제보다 엄청 미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심하게 튀어나온 입술과 주걱턱 때문어 말년까지도 콧수염을 고집하였는데, 동시기의 10세 연상 [[찰스 2세]]와 2세 연상 [[루이 14세]]도 젊은 시절에는 콧수염을 길렀지만 17세기 후반에 들어 유행의 변화로 깔끔하게 면도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 생애 == [[페르디난트 3세]]와 마리아 안나[*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의 딸. 페르디난트와 안나는 서로 사촌이었다. 참고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펠리페 3세의 큰딸의 아들이니 이종사촌 형이다.]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원래는 형 [[페르디난트 4세]]가 제위를 계승할 예정이었기에, 어려서부터 [[가톨릭]] [[신학교]]로 들어가 종교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순수한 종교인은 아니다. 왕위 계승에서 밀린 유럽 왕실의 일원들은 이렇게 교회에 들어갔다가 이후 [[대주교]]나 [[추기경]]까지 올라가서 다른 의미로 권력을 가지게 된다. 일본의 다이묘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차남 이하는 승려가 되는게 관례였다. 이렇게 종교인이 된 귀족들은 사생아를 두기도 했다.] 레오폴트는 [[프랑스어]]를 싫어해 궁중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부아 공자 외젠]]을 처음 만났을때인데, [[이탈리아인|이탈리아 혈통]]이지만 프랑스에서 자란 외젠에게 [[이탈리아어]] 할줄 아냐 물어보고 그렇다고 답하니 그럼 이탈리아어로 말하자고 하였다.] 형 페르디난트 4세가 1654년 이른 나이에 [[천연두]]로 급사하면서 갑작스레 제위 계승을 준비하게 되었고, 뒤이어 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가 1657년에 죽으면서 얼떨결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인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을 물려받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만 18세의 어린 나이로 제위에 오른 데다, [[30년 전쟁]]으로 피폐해진 합스부르크 제국을 재건해야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거기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원한 원수, [[프랑스 왕국]]의 [[부르봉 왕조]]는 그의 제위계승을 방해하는 공작까지 펼쳤다. 프랑스의 재상이었던 [[쥘 마자랭]]이 [[바이에른 선제후국|바이에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 [[루이 14세]]의 아들인 [[그랑 도팽 루이]]의 장인이다. 프랑스는 이러한 것을 한 번 더 벌이는데 1690년대 [[요제프 1세]]를 로마왕으로 선출할 당시 바이에른을 포섭하고 팔츠 계승전쟁으로 [[팔츠 선제후국]]을 루이 14세의 동생 [[필리프 1세(오를레앙)|오를레앙 공작]]에게 내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바이에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여담으로 페르디난트 마리아의 아들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장남이 [[스페인 국왕]]이 되지 못하자 왕이 되려는 욕구를 버리지 못해 프랑스를 믿고 레오폴트 1세에게 대들다가 [[블레넘 전투|블렌하임에서 털렸다]].]를 황제로 선출하려 했다. 결국 레오폴트 1세는 프랑스로부터 제위계승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조건으로 같은 [[압스부르고 왕조|합스부르크 왕가]]인 [[스페인]]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한 술 더 떠, 프랑스와 스페인 영토를 균등분할하기로 합의한 사실까지 탄로나면서[*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1670년에 분할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 의하면 프랑스가 저지대와 북아프리카, 남부 이탈리아, 나바라를 얻고 오스트리아가 아메리카와 스페인 본토, 북부 이탈리아를 얻는 것이었다고. 그러나 당시 레오폴트에게는 마리아 안토니아를 제외하고 후사가 없었지만 루이 14세에게는 후계자인 [[그랑 도팽 루이]]가 있어서 후일 자신이 모든 영토를 상속받게 될 것이라 짐작한 루이 14세는 바이에른 선제후와 동맹을 맺어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바이에른에게 주고 자신이 스페인과 부속 영토 전체를 차지하기로 하지만 이 계획은 바이에른 선제후가 반대하고 레오폴트가 후사를 얻음에 따라 유야무야 되었다.] 스페인에서의 감정이 크게 나빠졌다. 레오폴트는 그 대신 독일 제후들의 연합인 라인 연맹에 가담하였다. [[스웨덴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가 폴란드 왕위를 노리던 [[트란실바니아 공국|에르데이 공국]]의 [[라코치 죄르지 2세]]와 짜고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자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연합하여 대항하기도 했다. 거기다 영원한 숙적 프랑스는, 태양왕이라 불린 [[루이 14세]]의 통치하에 적극적인 확장정책을 펼치면서 오스트리아와 잦은 충돌을 벌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의 맹공으로 여러 차례 불리한 상황에 놓이곤 했다. 거기다가 프랑스가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과 공수동맹까지 맺어, 오스만으로부터 여러 차례 공세를 받았다. 1663년에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였을 때는 생고타르 전투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상 헝가리([[슬로바키아]]) 일대의 [[노베잠키|에르셰쿠이바르]]를 오스만 제국에게 내주면서 불리한 조건으로 향후 20년간 서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조약을 맺었다. 이 때문에 [[크로아티아 왕국]]의 주요 귀족들인 즈린스키, 프랑코판 가문 등이 반발하여 그들을 가혹하게 처분했고 이러한 귀족 탄압이 원인이 되어 [[퇴쾨이 임레]]의 주도로 상 헝가리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퇴쾨이 임레가 [[메흐메트 4세]]와 카라 무스타파 파샤에게 [[빈(오스트리아)|빈]]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이 벌어졌고 레오폴트 1세는 일찌감치 빈을 포기하고 [[파사우]]로 피난을 떠났다. 다행히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도움으로 위기는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뛰어난 장군인 [[사부아 공자 외젠]]의 활약으로 [[오스만 제국군]]을 몰아내면서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을 맺어 [[오스만 헝가리]] 대부분과 에르데이 공국을 되찾았고, 헝가리 의회로부터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의 왕위를 세습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더 정확히는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만 헝가리 왕위 후보자로 출마할 수 있도록 계승법을 바꾸었다. 통념과 달리 [[헝가리 왕국]]과 [[보헤미아 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선출제를 유지했다.] 하지만 1697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낼 때는 [[슈트라스부르크]]를 프랑스에 양도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enjamin_von_Block_001.jpg|width=100%]]}}} || || 레오폴트 1세, 벤야민 폰 블로크(Benjamin von Block) 작, 1672년 || 잦은 전쟁으로 파탄난 재정을 메꾸기 위해 [[헝가리 왕국]]을 착취하는 한편 대외전쟁에서 독일 제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보니 이들에게 저자세로 나가며 우대책을 써야하기도 했다. 1663년에는 [[제국의회(신성 로마 제국)|제국의회]]가 해산되고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가 새로 만들어졌다. 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이 [[하노버 왕국|하노버]] [[선제후]]가 되었다.[* 자신의 아들인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를 신교도 가문인 [[벨프 가문]]의 공녀들과 결혼시켰는데, 이 가문이 선제후가 됨에 따라 동맹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여담이지만 뤼네부르크계는 훗날 영국 왕실이 되는 [[하노버 왕조]]이고 볼펜뷔텐계는 주로 [[프로이센 왕국]]과의 연관성이 깊은데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프로이센 원수인 페르디난트 공작이 볼펜뷔텐계의 수장이었다. 거기다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왕비 역시도 이 가문 출신이다.] 이는 안 그래도 결속력이 약한 신성 로마 제국에 큰 타격이었다. 이 와중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게 왕의 지위를 내려 [[프로이센 왕국]]을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는데[* 신성 로마 제국에서 왕의 지위는 제위 계승 후보인 [[독일왕]]과 선제후인 보헤미아 왕밖에 없었기 때문에 본토인 브란덴부르크는 [[변경백]]-[[선제후]]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형식적인 봉신국이었다가 독립한 [[프로이센 공국]]의 이름을 빌려 왕으로 승격시켰다. 따라서 프로이센의 왕(König von Preußen)이 아닌 프로이센'''에서의''' 왕(König in Preußen)으로 칭했다. 동양으로 비유하면 [[외왕내제]]와 비슷하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반 세기 후에 일어난 일]]을 생각한다면 실책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건 논란의 여지가 상당히 있는 부분인데,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최대의 적은 [[프랑스 왕국]]과 [[오스만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는 당시 유럽의 인구대국으로 국력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밀리지 않는 [[강대국]]이었다. 그러다보니 프랑스를 확실히 막아야 하는 레오폴트 입장에서는 자신을 제대로 지지해줄 세력이 하나라도 더 필요했다.[* 당장 자기 손녀인 [[마리아 테레지아]] 조차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프랑스-[[스페인]]이 신성 로마 제국 내의 프로이센, [[바이에른 선제후국]], [[팔츠 선제후국]], [[작센 선제후국]]과 연합했고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게 떼어 준 후에야 해결되었음을 생각해보자.] 레오폴트 1세로서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등장이라는 미래의 변수를 예상할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주요 원인은 [[카를 6세]]가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이지, 레오폴트 1세가 이에 직접적인 원인 제공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 실제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프로이센)|프리드리히 3세]]를 왕으로 만들어 준 것은 황제 선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경향이 강했고, 그는 왕이 되는 대가로 오스트리아에 파병을 해야 했으며 칭호 역시도 König in Preußen, 즉 프로이센 안에서는 왕이라는 조금 격이 낮은 칭호를 써야 했다. 그걸로 부족해 철저한 가톨릭 국가답게 [[개신교|신교]]에 대한 탄압에 더더욱 박차를 가해서 상공업의 발전도 지지부진했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상공인 계층은 개신교 신자가 많았기에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죄다 프랑스[* [[낭트 칙령]]이 폐지된 건 1685년이라 그때까진 프랑스는 개신교를 차별하지 않았기에 주로 프랑스로 도피했다.]와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 등지[* 프랑스가 [[위그노]] 학살을 할 때부터 전통적인 종교적 망명의 땅으로 인식되었다.]로 빠져나가게 되었다. 그나마 합스부르크 제국의 불세출의 명장인 [[사부아 공자 외젠]] 덕분에 여러 차례 위기를 넘기고 오히려 [[대튀르크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 왕위를 승계한 이래 150년 동안 분열되었던 헝가리 전역을 재통합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오늘날의 [[티미쇼아라]]를 중심으로 하는 바나트(Banat) 지역은 둘째 아들 카를 6세가 수복했다.] 말년에는 자신이 버리다시피 한 스페인 왕위가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에 간다는 사실에 스페인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사실 스페인 왕위는 별 관심 없었고 스페인이 보유한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등 이탈리아 영토에 더 관심이 많았다. 실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기 전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제국이 체결한 밀약의 쟁점은 스페인령 이탈리아 영토였지 스페인 왕위 자체는 후순위였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하여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으나 전쟁 중인 1705년에 64세의 나이로 죽었다. == 평가 == 몇몇 실책이 있긴 하나 레오폴트 1세는 유능하고 수완이 뛰어난 군주 중 한명이었다. [[네이버]] 지식평가에서 연재중인 [[주경철]]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의 서양[[근대]]인물열전을 봐도 레오폴트 1세를 '''[[외교]]적으로 뛰어난 인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끌어들여 [[제2차 빈 공방전]]을 승리로 이끄는 등 [[오스만 제국]] 및 유럽 다른 국가들 왕들에 비해 외교적 평범함을 넘어서 그 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 '''월등한 인물'''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 가족관계 == === 조상 === ||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13> 레오폴트 1세[br]{{{-2 (Leopold I)}}} ||<|6> [[페르디난트 3세]][br]{{{-2 (Ferdinand III)}}} ||<|3> [[페르디난트 2세]][br]{{{-2 (Ferdinand II)}}} || || 내지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br]{{{-2 (Karl II, Archduke of Inner Austria)}}} || || [[비텔스바흐 가문|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A [[페르디난트 1세]]의 외손녀다.][br]{{{-2 (Maria Anna of Bavaria)}}} || ||<|3> [[비텔스바흐 가문|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br]{{{-2 (Maria Anna of Bavaria)}}} || ||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br]{{{-2 (Wilhelm V, Duke of Bavaria)}}} || || [[로렌 공국|로렌]]의 르네[br]{{{-2 (Renée of Lorraine)}}} || ||<|7> [[스페인 왕국|스페인]]의 마리아 아나[br]{{{-2 (Maria Ana of Spain)}}} || ||<|3> [[펠리페 3세]][br]{{{-2 (Felipe III)}}} || || [[펠리페 2세]][br]{{{-2 (Felipe II)}}} || || [[오스트리아의 안나]][br]{{{-2 (Anna of Austria)}}} || ||<|3> [[합스부르크 가문|오스트리아스티리아]]의 마르가레테[br]{{{-2 (Margarete of Austria-Styria)}}} || || 내지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br]{{{-2 (Karl II, Archduke of Inner Austria)}}} || || [[비텔스바흐 가문|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A [[페르디난트 1세]]의 외손녀다.][br]{{{-2 (Maria Anna of Bavaria)}}} || === 아내와 자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harles_Boit,_Emperor_Leopold_with_family.png|width=100%]]}}} || || 그리스 풍으로 묘사된 레오폴트 1세 일가. [br]중앙의 레오폴트 1세, 좌측에 [[요제프 1세]], 우측에는 [[카를 6세]]가 서있다.[br] 샤를 브와(Charles Boit) 작, 1703년 || 총 3번 결혼했는데 이는 첫번째와 두번째 아내가 연달아 요절하고 남성 상속자를 얻지 못해서 재혼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첫번째 황후는 [[펠리페 4세]]의 딸로 3촌이자 4촌인(...) [[마르가리타 테레사|스페인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외삼촌 [[펠리페 4세]]와 누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의 딸이기 때문에 외사촌임과 동시에 외조카가 된다. 펠리페 4세가 조카인 마리아나와 결혼하면서 이런 개족보가 되었다.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카를로스 2세]]의 친누나이기도 한데 병약하고 지적 장애가 있던 카를로스와 달리, 머리가 좋고 예술에도 관심이 있어 부부간의 금슬은 좋았고 레오폴트 역시 마르가리타를 평생 좋아했다고 한다.]였고, 두번째 황후는 6촌 관계의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오스트리아티롤의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 레오폴트 1세의 할아버지인 [[페르디난트 2세]]가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의 할아버지인 오스트리아 대공 레오폴트 5세와 형제지간이었다.]였는데 마르가리타와 클라우디아 모두 22살에 사망했다. 세번째이자 마지막 황후는 6촌 관계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레오폴트 1세의 할머니인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가 엘레오노레 막달레네의 할머니인 [[바이에른]]의 막달레네와 자매지간이었다. 팔츠 선제후 [[필리프 2세 빌헬름]]의 장녀. 필리프 2세 빌헬름은 팔츠지메른 분가의 마지막 선제후인 [[카를 2세(팔츠)|카를 2세]]가 후손없이 죽으면서, 그의 팔츠-노이부르크계 친척으로서 [[팔츠 선제후국]]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팔츠 선제후위는 [[엘리자베트 샤를로테|자신의 제수]]와 [[필리프 1세(오를레앙)|동생]]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9년 전쟁]]을 일으키자 이를 막기 위해 사위인 레오폴트에게 의존했다. 심지어 또 다른 딸인 마리아 안나를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에게 시집보내 동맹을 강화하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외손녀인 이사벨 파르네제의 남편 [[펠리페 5세]]는 적이었던 루이 14세의 손자이고, [[카를로스 3세]]부터 모든 스페인 국왕들(부르봉 파르마 공작과 부르봉 양시칠리아 포함)은 모두 필리프 2세 빌헬름의 후손이다.]로 그녀와의 사이에서 10명의 자녀들을 낳았다.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가 엘레오노레의 아들들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an_Thomas_-_Infanta_Margaret_Theresa%2C_Empress%2C_in_theater_dress.jpg|width=400]] 첫번째 황후 [[마르가리타 테레사]]([[1651년]] [[7월 12일]] ~ [[1673년]] [[3월 12일]]) [[파일:1663429909877.jpg|width=400]] 두번째 황후 [[클라우디아 펠리치타스]]([[1653년]] [[5월 30일]] ~ [[1676년]] [[4월 8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leonore_of_Pfalz_Neuburg.jpg|width=400]] 세번째 황후 [[엘레오노레 마그달레네]]([[1655년]] [[1월 6일]] ~ [[1720년]] [[1월 19일]])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5> [[마르가리타 테레사|스페인의 마르가리타 테레사]][br]{{{-2 (Margarita Teresa of Spain)}}} || || '''1녀''' || [[바이에른]] 선제후비 마리아 안토니아[br]{{{-2 (Maria Antonia, Electress of Bavaria)}}} || [[1669년]] [[1월 18일]] || [[1692년]] [[12월 24일]] ||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br]슬하 1남 || ||<-5> [[엘레오노레 막달레네|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br]{{{-2 (Eleonore Magdalene of Pfalz-Neuburg)}}} || || '''1남''' || [[요제프 1세]][br]{{{-2 (Joseph I)}}} || [[1678년]] [[7월 26일]] || [[1711년]] [[4월 17일]] || [[빌헬미네 아말리|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br]빌헬미네 아말리]][br]슬하 1남 2녀[* 폴란드 왕비 마리아 요제파, 신성 로마 제국 황후 마리아 아말리아 등] || || '''2녀''' || 마리아 엘리자베트 여대공[*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이었다.][br]{{{-2 (Archduchness Maria Elisabeth)}}} || [[1680년]] [[2월 13일]] || [[1741년]] [[8월 26일]] || || || '''3녀''' || [[포르투갈 왕국|포르투갈]]의 왕비 마리아 안나[br]{{{-2 (Maria Anna, Queen of Portugal)}}} || [[1683년]] [[9월 7일]] || [[1754년]] [[8월 14일]] || [[주앙 5세]][br]슬하 5남 1녀[* [[주제 1세]], [[페드루 3세]] 등.] || || '''4녀''' || 마리아 테레지아 여대공[br]{{{-2 (Archduchness Maria Theresa)}}} || [[1684년]] [[8월 22일]] || [[1696년]] [[9월 28일]] || || || '''2남''' || [[카를 6세]][br]{{{-2 (Karl VI)}}} || [[1685년]] [[10월 1일]] || [[1740년]] [[10월 20일]]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br]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br]슬하 3녀[* [[마리아 테레지아]] 등] || || '''5녀''' || 마리아 요제파 여대공[br]{{{-2 (Archduchness Maria Josepha)}}} || [[1687년]] [[3월 6일]] || [[1703년]] [[4월 14일]] || || || '''6녀''' || 마리아 막달레나 여대공[br]{{{-2 (Archduchness Maria Magdalena)}}} || [[1689년]] [[3월 26일]] || [[1743년]] [[5월 1일]] || || == 기타 == 그는 아들 [[요제프 1세]], 증손자 [[요제프 2세]]와 마찬가지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미사]]나 오라토리오 무용조곡[* 오페라 황금사과의 오라토리오를 썼는데, 상당한 걸작이라고 한다.]들을 작곡했으며, 첫번째 아내 마르가리타가 죽었을 때도 자신이 직접 [[레퀴엠]]을 작곡할 정도였다. 사냥과 승마에도 취미가 있었다. [[분류:신성 로마 황제]][[분류:독일 국왕]][[분류:오스트리아 대공]][[분류:헝가리 국왕]][[분류:크로아티아 국왕]][[분류:보헤미아 국왕]][[분류:모라비아 변경백]][[분류:합스부르크 가문]][[분류: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분류:1640년 출생]][[분류:1705년 사망]][[분류:빈 출신 인물]][[분류:카푸친 교회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