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룩셈부르크의 다른 의미, rd1=룩셈부르크(동음이의어))] [include(틀:역대 신성 로마 황제)] [include(틀:신성 로마 제국)] [[파일:룩셈부르크 가문 문장.svg|width=20%]] {{{+1 Haus Luxemburg}}} [목차] == 개요 == [[중세]] 성기(High Middle Ages) [[신성 로마 제국]], [[룩셈부르크 공국]], [[보헤미아 왕국]]의 귀족 가문. 룩셈부르크 가문은 원래 신성 로마 제국의 [[로렌|로트링겐]] 일대인 현재의 [[룩셈부르크]]와 그 서쪽의 [[벨기에]]의 일부인 [[뤽상부르(벨기에)|뤽상부르]] 지역을 지배하던 [[유럽]]의 평범한 [[백작]] 가문이었다. 그러다가 1308년 [[하인리히 7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왕]]으로 선출되는 행운을 맞았다. 하지만 처음 독일왕으로 선출되었을 당시 독일왕, 더 나아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실권이 없던 허수아비였다. 13세기에 [[황제]]와 [[교황]] 간의 싸움의 후유증으로 [[대공위시대]]가 이어졌고, 이후 [[선제후]]들은 강력한 황제의 출현을 방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명망가 공작 가문 대신에 한미한 백작 가문 출신을 황제로 선출했으며, 한 가문에서 독점적으로 제위를 세습하지 못하도록 가문을 바꾸어 가며 황제를 선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때를 잘 만나 독일왕으로 선출된 것이었다. 하인리히 7세 역시 당시 그렇게 황제로 선출되었던 초기 [[합스부르크 가문]]이나 [[나사우 가문|나사우 백작가]] 출신 왕들처럼 실권이 미약한 단명한 군주가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1306년, [[보헤미아 왕국]]을 다스리던 프로셰미슬 왕조의 마지막 왕 [[바츨라프 3세]]가 16세의 나이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의문의 암살자에게 살해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1310년 [[하인리히 7세]]가 곧바로 이 지역에 개입, 아들 요한[* [[체코어]]로는 '[[얀 루쳄부르스키]]'이며 별명은 '맹인'이다. 훗날 리투아니아 십자군 원정 때 병으로 눈이 멀어,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앞이 안 보였기 때문이다.]을 바츨라프 3세의 여동생인 엘리슈카 공주와 결혼시키며 보헤미아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고, 경쟁자들을 물리치며 보헤미아 왕관을 차지하면서, 일약 유럽에서 가장 잘나가는 가문으로 급부상하는 반전을 맞게 되었다. 보헤미아 왕국은 뒤늦게 신성 로마 제국에 편입된 제후국으로 [[독일어]]가 아닌 [[체코어]]를 사용하는 이민족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구와 부유함, 천혜의 입지 조건 등으로 인해 왕국으로 승격될 수 있을 정도였기에 다른 공국들에 비해 그 위상이 매우 높아, 룩셈부르크 가문이 이곳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컸다.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룩셈부르크 가문은 대공위 시대 이후 약해진 황권을 강화하고 나아가 대공위 시대 이전처럼 제위를 독점 세습하려 했으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리고 아예 고향 룩셈부르크를 떠나 보헤미아의 [[프라하]]로 이주, 영구 정착하여 그곳을 크게 발전시켰다.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기의 룩셈부르크 가문은 룩셈부르크의 가문이 아니라 '''보헤미아 프라하 연고의 가문'''이었으며, 실제로 룩셈부르크 가문 또한 보헤미아 프라하 출신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카를 4세 등 룩셈부르크 가문의 대표적인 황제들은 지금도 '''체코의 위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잘나가던 룩셈부르크 가문 역시 보헤미아의 전 주인이었던 프로셰미슬 가문과 마찬가지로, 1437년 [[지기스문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단, 혈통 자체는 모계 혈통을 통해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왜냐하면, 지기스문트의 사위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2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기스문트 본인도 이복 형 [[바츨라프 4세]]가 있어 적장자는 아니었고, 카를 4세의 두 아들 바츨라프 4세와 지기스문트 말고도 방계 가문은 많았다.] 참고로 오늘날의 룩셈부르크의 지배 가문은 [[나사우 가문|나사우바일부르크 대공가]][* 원래는 제8대 룩셈부르크 대공인 [[장(룩셈부르크)|장]] 대공부터 [[부르봉 왕조|부르봉파름 가문]]으로 바뀌어야 하나 보르본-파르마 본가에서 장 대공의 아들들의 결혼을 귀천상혼이라 규정하고 반대하는 바람에 이에 화가 난 장 대공이 어머니 가문명을 계속 사용하기로 하고 단절을 선포하여 나사우바일부르크라는 가문명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진 장 대공 역시 부르봉파름 가문의 일원으로 보았다.]이다. == 룩셈부르크 백작 == 룩셈부르크 가문은 10세기경 아르덴 백작이었던 지그프리트 1세가 인근 도시 [[트리어(독일)|트리어]]의 성 막시민 수도원으로부터 지금의 룩셈부르크 땅을 얻어내 성을 건설하고 룩셈부르크 백작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룩셈부르크 백작은 이 가문이 소멸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룩셈부르크 가문이 1310년 보헤미아 왕국의 보위에 오른 후 가문의 중심지는 보헤미아 왕국령의 수도이며 당시 룩셈부르크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중심이었던[* 당시에는 명문화된 수도가 없었고 [[팔츠|군주가 거처하는 곳]]이 곧 행정적 중심지가 되었다.] [[프라하]]로 옮겨졌다. 1354년 백국에서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 신성 로마 황제 == 대공위 시대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유력 제후들은 특정 유력 가문이 제위를 세습하면서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한미한 백작 가문들을 교대로 선출하는 방법을 택했는데, 그 결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 [[알브레히트 1세]], [[나사우 가문]]의 [[아돌프(신성 로마 제국)|아돌프]]의 뒤를 이어[* 정확한 순서는 루돌프 1세, 아돌프, 알브레히트 1세이다. 알브레히트 1세는 선제후들의 반대로 부왕 루돌프 1세의 뒤를 이어 독일왕으로 선출되지 못했고, 무력을 사용해 아돌프를 패사시키고 나서야 독일왕으로 인정받았다.]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7세]]가 독일왕으로 선출되어 황제가 되었다. 하인리히 7세 사후 차기 독일왕으로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4세(신성 로마 제국)|루트비히 4세]]가 선출되었으나, 황권을 강화하려던 루트비히 4세의 말년, 하인리히 7세의 손자 [[카를 4세|카렐]]이 대립 독일왕으로 선출되었고 루트비히 4세가 얼마 못가 사망하며 단독 독일왕이 되었다. 룩셈부르크 가문은 카렐 이후에도 3명의 독일왕을 더 배출했다. == 보헤미아 국왕 == 하인리히 7세의 아들 [[얀 루쳄부르스키|요한]]은 보헤미아의 국왕이었던 바츨라프 3세의 여동생인 엘리슈카(Eliška)와 결혼했고, 1310년 보헤미아 왕위를 승계받아 보헤미아 국왕이 되었다. 1310년 요한이 프라하에 입성하면서 가문의 중심지는 룩셈부르크에서 프라하로 이동했다. [[분류:룩셈부르크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