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304년 사망]][[분류:3세기 교황]][[분류:4세기 교황]][[분류:교황(로마 제국)]][[분류:시성된 교황]][[분류:가톨릭 성인]][[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가톨릭 교황)] ||<-5><#806600> [[교황|[[파일:교황 문장.svg|height=40]] '''{{{#FFF 가톨릭 교회의 교황}}}''']] || ||<-5> [[파일:29_s_marcellino.png|height=125]] || || 제28대 [[카이오(교황)|성 카이오]] || → ||<#806600> '''{{{#FFF 제29대 성 마르첼리노}}}''' || → || 제30대 [[마르첼로 1세|성 마르첼로 1세]] || * [[라틴어]]: Marcellinus * [[이탈리아어]]: Marcellino * [[영어]]: Pope Marcellinus [[파일:교황 마르첼리노.jpg]] * 생몰년: ? ~ 304년 4월 1일 * 재위기간: 296년 6월 30일 ~ 304년 4월 1일 [목차] == 개요 == 마르첼리노는 가톨릭의 제 29대 [[교황]]이다. == 생애 == 로마 제국이 안정기로 접어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에 선출되었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없었기 때문에 마르첼리노의 재임 초기에 기독교도의 수가 증가하였고, 성당도 다수 세워지게 된다. 그러나 부제(副帝) [[갈레리우스]]가 기독교 박해를 시작한데 이어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까지 303년 기독교 박해를 시작하여 위기에 처하게 된다. 마르첼리노는 [[296년]]에 [[교황]] 성 [[카이우스]]를 계승하여 [[로마]]의 [[주교]]인 [[교황]]에 올랐다. 그의 생애나 재임 기간 등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연대 교황표”에 따르면, 그는 프로젝투스의 [[아들]]로 로마인이며 [[순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303년]] [[로마]]에서 시작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받지 않고 사망한 뒤에, [[사제]] 마르첼루스에 의해 로마의 비아 살라리아에 있는 [[성녀]]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한다. 그로부터 100년 정도 후인 4세기 초에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가 박해 시기에 일시적으로 배교를 했고, 박해자에게 성경을 넘겨주었다는 악의적 주장이 주로 도나투스파(Donatismus) 이단 신봉자들에 의해 퍼뜨려졌다. 하지만 히포(Hippo)의 주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는 이 같은 주장이 잘못된 중상모략임을 강력히 피력했다.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 역시 그를 '박해를 극복한 교황'이라고 했고, 키로스의 주교인 [[테오도레투스]](Theodoret)도 그가 박해 중에 훌륭한 역할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의 배교 주장을 근거 없는 거짓으로 생각하고 있다.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은 4월 26일 목록에서 다른 전승을 전해주고 있다.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로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참수형을 선고받고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 성 키리누스(Cyrinus), 성 안토니누스(Antoninus)와 함께 순교했다는 것이다. 연대 교황표에 따르면, 그는 4월 1일 순교한 후 25일이 지난 4월 26일 비아 살라리아에 있는 성녀 프리스킬라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리베리오 교황표”(Catalogus Liberianus)는 10월 25일을 순교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10월 25일에 성인의 두 번째 축일을 기념하기도 한다. 동방 교회는 6월 7일에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병사들을 군대에서 쫓아 냈으며, 재산을 몰수하였고, 결국에는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처형하는 초강경 박해를 가하기에 이른다. 후대의 기록에 의하면 마르첼리노가 체포된 후 우상에 향을 피워 배교함으로서 구명하였다가 풀려난 뒤 곧바로 뉘우쳐 기독교 신앙 고백을 하였고, 결국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의 일시적인 배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그의 배교 행위에 대해 가장 오래된 기록이 그의 사후 100년 후의 것이기 때문이다. 배교 행위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사후에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4월 26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