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관련 문서, top1=만주 종족 계보)] [include(틀:퉁구스)] [include(틀:만주의 역사)]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말갈 7부.jpg|width=100%]]}}} || || 말갈 7부[* 자세한 위치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린다. 덤으로 지도는 삼국시대 후기 기준인 듯 하다.] || [목차] == 개요 == [[고대]]에 [[만주]] 동부 지역과 [[연해주]] 일부, [[한반도]] 북부 일대에 거주했던, 계통상 현재 [[만주족]]으로 계보가 이어지는 [[퉁구스]] 계통으로 추정되는 [[종족]]이다. 순수한 [[유목민족]]은 아니고, 유목 혹은 [[반유목]], [[어로]]와 [[수렵채집인|수렵채집]], [[목축]], [[농경]]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영위했다. 다만 동시대 및 약간 뒷시기의 다양한 용례 및 고고학적 발굴 결과로 봤을 때는, 말갈이라 불리는 부류 안에는 흔히 생각하는 흑수말갈의 직계조상인 퉁구스계 외에 예맥족도 상당히 있었던 걸로 생각된다. == 말갈의 명칭과 말갈비칭설 == 기록에서 나오는 말갈의 최초 선조는 [[시황제|진시황]]의 [[진(통일왕조)|진나라]] 이전 기록에 나오는 [[숙신]]이다. 숙신은 진시황의 진나라 이전 종족이고 이들이 [[한나라]] 시대에는 [[읍루]]였으며, [[남북조시대]] [[북위|후위]] 때는 [[물길]], 그리고 [[수나라|수]], [[당나라]] 시대에는 말갈이었다. 이 말갈이 [[발해]]가 멸망하고 [[송나라]] 때부터 [[여진족|여진]]으로 불렸다는 게 정설이다. 다 외부 기록자 중심 명칭으로서 스스로 부른 종족명이 아니었다. 당대 발음은 [[중고한어]] 기준으로 '모트기트', '마트카트'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뒤의 '기트' 혹은 '카트'는 튀르크계 언어로 '돌'을 뜻하는 단어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건 [[갈족]] 문서로. '말갈은 자칭했던 종족명이 아니라 고구려 중앙에서 도성 중심의 시각으로 [[고구려]]의 변방인들을 멸시해 부른 비칭이기도 했다'고 보는 학설 또한 있다. 말갈이라고 호칭되는 부류에 분명 퉁구스계적 고고학 요소가 우세하고 이것이 어떤 종족을 뜻할 정도의 일체성은 보이지만, 그렇다고 말갈 전체를 전부 퉁구스계로만 퉁치는 것 또한 큰 오류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으로 예맥계적 요소가 두드러져 다른 말갈 부족과는 확연히 다른 [[백산말갈]]과 [[속말말갈]]이 있으니 비칭설을 마냥 일각의 학설이라고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왕조 시대 국가관은 주로 수도 중심으로, 신라 주류층이 경주 외에는 전부 변방촌놈으로 업신여겼듯 고구려 또한 평양 사람 입장에서 동쪽 변방 시골 사람들을 말갈로 낮춰 불렀다는 견해이다. [[한규철]] 교수 등이 지지하는 설이다. 이에 따르면 말갈은 [[촌놈]]과 같은 뜻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 시골 사람들을 비하하는 뜻으로 촌놈이라 부르듯, 고구려 시대엔 말갈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본다. 당이 [[발해]]를 말갈이라 하였던 것은 중국 측의 [[신당서]]에 [[고왕|대조영]]을 속말말갈이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인데, 아주 한참 전 및 동북공정 입장에서는 이 구절을 곧이곧대로만 해석해 대조영의 가문이 말갈'족' 출신이라는 의미로 이해했으나, 실제로는 그가 고구려 속말부[* 송화강 북쪽 지류인 속말수 일대에 있었던 곳으로 지금의 [[헤이룽장성]] [[치치하얼]] 일대를 말한다.] 출신이었음을 나타낸다는 해석이 현재로서는 유력하기 때문이다. 결국 속말말갈로 불리는 이들도 고구려인이었고 훗날 발해인이 되었다는 해석이다. 물론 기록에 따르면, 말갈 7부 중 하나인 속말부는 강한 병사가 수천 명이고, 날랜 무사도 많아, 매번 고구려를 노략질하였다고 전하며, 궐계부의 만돌[* 만돌이 죽자 그 동생 돌지계가 연맹을 이끌었다.]을 중심으로 한 속말말갈의 소부 8부는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자 수나라로 귀순한 사례가 있다. 이 기록들을 보았을 때 [[물길]]-말갈의 독자적인 외교가 기록에 남아있는 이상 '말갈이 촌놈이란 뜻의 비칭이지 이민족을 구분해 부른게 아니라는 주장'에도 오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24사|중국의 역사서]]에서 이민족 열전에는 말갈에 대한 내용을 고구려와 분리하여, 고구려전과 말갈전(혹은 물길전 등)이 따로따로 등장한다. 이는 당시 중원국가들이 고구려와 말갈을 서로 다른 집단으로 인지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양쪽 모두 문제가 있는 이 학설을 어떻게 하면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사서상의 '말갈' 용례를 종합해보면, 전통적인 [[만주|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퉁구스계 부족들을 지칭하는 족명, 초기 백제를 침공했던 집단의 명칭[* 이들을 가짜 말갈이란 뜻의 [[위말갈]]로 부르는데, 말갈로 기록되어 있으나 말갈이 아니라는 해석이 더해진 지칭이다. [[정약용]]은 이들을 말갈이 아닌 예계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위말갈이 위말갈이 아니라 진짜 말갈, 즉 퉁구스계 부족들을 지칭한다는 견해도 있다. 권오중 전 영남대 사학과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낙랑 역사의 전개와 백제》에서 [[낙랑군]]이 말갈에 사주해서 백제를 공격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내놓았다. 그러나 한국군사사 제1권은 주로 정약용의 견해를 지지하며, 위말갈은 문자 그대로 말갈이 아닌 낙랑, 대방군에 종속된 옛 마한 거수국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중원 국가 및 신라에서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부정하기 위해 부른 멸칭 등이 있다. 이는 고고학적 결과로 의문이 풀린다. 부여가 물길, 즉 말갈에게 크게 북방 강역을 상실했을 때 말갈이 대거 부여인들이 살던 지역에 유입되었는데, 흡사 여말 함경도에서 여진족과 고려인 등이 혼재해 살았듯 부여인 일부는 약간 말갈화되고, 말갈족 일부는 약간 부여화되었으나 크게 섞이지는 않고 잡거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즉 속말말갈 일부는 퉁구스계고, 일부는 대조영 같은 예맥계인 것이다. 고구려에게 반대하고 당나라에게 투항한 속말말갈은 퉁구스계고, 계속 고구려에게 충성하다가 고구려부흥운동에도 참여한 속말말갈은 주로 부여계인 것이다. 게다가 백산말갈 같은 경우는 부분 퉁구스계, 부분 예맥계인 속말말갈의 사례와는 달리 거의 전체가 부여-옥저계임이 의미심장하다. 즉 애초에는 숙신-읍루의 후손인 부류를 말갈로 불렀으나 이 말이 말갈족이 대거 들어온 옛 탁리국 영역이자 부여의 옛 북부 강역에 사는 사람들 전체[* 이러다보니 해당 지역에 그대로 살았던 옛 부여인들 같은 예맥인들까지 말갈로 불리게 되었다.]를 일컫는 말로 의미가 확장되었으며, 이후 장수왕-문자왕 시기를 거치며 고구려가 이 영역 전체를 수복해 역으로 해당 지역에 사는 말갈들 전체를 지배 아래 넣어 흑수말갈 외엔 전체를 고구려 변방민화하게 된다. 이러다보니 말갈이란 변방민을 일컫는데로까지 의미가 확장된 나머지, 아예 말갈족 비중도 낮고 거의 전체가 부여-옥저계였던 백산인들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다만 말갈에 퉁구스계 및 예맥계만 있던 건 아니었다. 극소수지만 [[니브흐]]처럼 고아시아계 또는 비 퉁구스계 민족들도 있었다. 이들 일부는 퉁구스인 말갈에게 동화되기도 했다. == 말갈족의 역사 == 최초 사료에 등장하는 이름은 '[[숙신]]'이다. 식신 혹은 직신으로 적혀있기도 한데, 이후 [[전한]]시대 때는 [[읍루]]로 불리다가 수당시기에는 말갈로 불렸다. 말갈족은 7개의 유력한 부족이 있었는데, 우선 주로 [[지린성]] 일대에서 거주한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이 있었다. 이들은 생활 방식이 고구려 및 부여와 비슷한데, 애초에 거주하는 지역 자체가 고구려와 부여의 발상지 근처고 반농반목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니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백산말갈이나 속말말갈은 환경 자체가 예맥인들과 같았고 주민 구성도 주로 부여인, 옥저인인 예맥계 비중이 높았기에, 말갈로 분류되긴 하였으되 고구려인이라는 정체성도 형성했다. 심지어 발해 건국자 대조영이 소속된 속말부는 아예 주도적으로 고구려를 재건하기도 하였다. 이는 이후 흑수말갈의 후신인 완안부가 고구려와는 전혀 상관없는 [[금나라]]라는 새로운 여진족의 제국을 세운 것과는 매우 대조되는 사례로서, 이미 이 백산과 속말 두 부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말갈인'인 동시에 '고구려인'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현대 학계 정설은 말갈이 단순히 하나의 종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고구려 주변 예맥계, 퉁구스계, 고아시아계 부락'''을 가리키는 단어라는 것이다. [[위말갈]] 항목도 같이 보면 좋다.] 일본 사료에 나오는 발해의 말갈 부락들은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말갈들일 가능성이 높으며, 발해 건국의 주체 세력들은 대부분 서쪽의 길림성 지방 출신인 속말말갈인들과 토착 고구려인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하고 남쪽의 [[신라]]와 [[고려]]로 유민이 유입될 때 예맥계와 함께 유입되었다가 이후 동화되어 자연스레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 예시로 [[삼국사기]] 무관지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683년에 말갈인으로만 구성된 부대인 흑금서당(黑衿誓幢)을 만드는데 되짚어 해석하면 통일 직후의 신라에 말갈인들로만 가지고 부대를 만들 수 있을만큼 말갈인들이 꽤 많이 들어왔다는 점을 알 수 있고, 훗날 조선시대에 [[백정]]으로 바꿔 부르게 되는 고려시대의 양수척 중 상당수는 남하해 유입된 말갈/여진인의 후예로 보고 있다. '''흑수말갈'''을 비롯한 기타 퉁구스계 말갈족들은 헤이룽장성,혹은 연해주 일대에서 거주하던 민족으로 위의 두 말갈 부족과는 매우 이질적인 부족이었다. [[아무르강]] 일대는 환경 자체가 남쪽의 지린성과는 판이하게 다르고 척박한 지역이었므로 매우 거칠고 유목민족의 특성을 강하게 지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고구려와 발해에게 정복되거나 복속되었을지언정 끝까지 이질적인 존재로 남았다. 고구려 때도 반 복속상태로 있었고, 발해 때도 흑수말갈이 당나라의 지원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견제를 했지만 발해 [[선왕]]시기에 결국 모두 제압당하고 발해에 복속되었다. 하지만 여러 말갈 부족들이 일단 발해에 소속되긴 했지만 이는 간접적 복속에 그치고 여전히 발해라는 나라 안에서 말갈족들은 큰 독립성을 유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 사서 [[속일본기]]에는 779년에 '발해'와 '철리부 말갈족'이 [[http://db.history.go.kr/id/jm_002r_0360_0220|마치 서로 다른 나라인 것처럼 별개의 타이틀을 달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고]], 발해 사신과 철리인 사신이 일본 조정에서 [[http://db.history.go.kr/id/jm_002r_0360_0280|윗자리에 누가 앉느냐를 두고 경쟁할 정도로]] 발해에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자리 가지고 이런 자존심 다툼을 한 것을 보면 발해인 주류와 철리부는 서로 상당한 [[지역감정]],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며, 발해가 모든 말갈을 강하게 통제하진 못하고 간접통치 형태가 섞여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발해가 요나라에 의해 허무하게 멸망하면서, 말갈인들은 [[발해유민]]들을 몰아내거나 자신들에게 흡수시켜서 점차 만주의 주인이 되어 여진족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발해에 충성하던 말갈인들은 거란인들 내지는 반발해 성향 말갈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고구려계 발해유민들과 함께 고려로 망명하여 현대 한민족의 조상이 되기도 했다. == 말갈에서 [[여진족]]으로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hotos.wikimapia.org/63_full.jpg|width=100%]]}}}|| || [[금나라]]의 초기 수도인 상경회령부 궁성 모형 || [[발해]]의 멸망 후 [[여진족]]으로 명칭이 바뀌어서 [[거란]]에 복속한 숙(熟)여진과 그렇지 않은 생(生)여진으로 구분되어 지냈다.[* 이 시기에 고려와 거란의 대립 틈에 끼여 그야말로 영역의 대부분이 갈려나가는 큰 참화를 입었다. [[강동6주]]를 정복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수의 여진 유민들이 발생했다. 오죽하면 여진족들이 거란에 자신들을 침략하는 고려를 공격해달라 청원했을 정도.][* 그리고 한반도 내의 말갈 세력 중 일부는 [[태조(고려)|왕건]]이 보낸 [[유금필]]에 의해 복속되어 [[일리천 전투]] 때 만 명에 가까운 기병 부대를 이끌고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거란의 [[요나라]]는 요동과 만주 지역에 대해 완전한 지배를 이룩하진 못했고, 11세기 후반 ~ 12세기 초 영가, 우야소 등의 추장이 등장하여 부족 단위를 국가 형태로 통합해가면서 주변국과 긴장 구도를 이루었다. 이에 1107~1108년 [[윤관]]과 [[척준경]] 등이 [[별무반]]을 중심으로 이들을 토벌하고 [[동북 9성]]을 확보하기도 하였으나, 1115년 정월 [[완안아골타]]의 완안부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금나라가 된 말갈 7부는 신속하게 요를 갈아마시고 [[정강의 변|화북 지방까지 차지]]하였다. 그 뒤로는 [[고려]]도 [[이자겸]]의 주도하에 이들의 조공 체계에 편입되었다. 이후 한동안 잘 나갔지만 어느 날 '''[[몽골 제국|웬 인간병기들이 몰려와서]]''' 7개의 말갈 부족은 소멸하고 그저 지명으로만 남게 된다. 이후 분열되어 [[원나라]] 붕괴 후엔 [[조선]]과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부족 세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 [[후금]], [[청나라]]를 거쳐 [[만주족]]으로 == [[조선]]과 [[명나라]] 두 나라의 힘이 약해진 [[16세기]] 말~[[17세기]] 초가 되자 여진족들은 [[천명제|누르하치]]를 중심으로 후금을 자칭하며 세력을 규합하였고, 이후 [[청나라]]를 세워 [[만주족]]으로 종족의 이름을 바꾼다. 이후 중국 대륙의 내전을 틈타 명나라 잔존 세력을 몰아내고 중원의 지배 세력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한족에 대한 개방 정책을 펴면서 서서히 고유 문화를 잃어갔고, 청이 멸망하고 만주에 대한 주도권도 많이 빼앗긴[* 현대 만주의 인구 대부분은 다른 곳에서 이주해온 한족이다.] 현대에 와서는 종족([[만주족]])과 언어([[만주어]])의 존망을 논해야 할 단계에 처해 있다. 만주족 외에는 [[러시아]] 극동의 소수민족인 [[우데게족]](Удэгейцы)과 [[나나이족]](Нанайцы)이 이들의 후손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국교육방송공사|EBS]]의 '발해여말갈'이란 다큐멘터리에선 나나이족 인물이 등장해 발해와 말갈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발해시조 고왕(대조영)에게 제사를 지낸다고도 한다. == 한국과의 관계 == === 고구려/발해 === [[고구려]]에서도 비중이 컸고 특히 [[발해]]에서는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민족이었는데 고구려의 경우 [[북한산성 전투]]의 말갈인 지휘관 생해(生偕)처럼 기록에 남은 자도 있으나 그 외에도 역사상 기록된 여러 '고구려인'들 중 종족 출신이 명시되지 않은 인물들 중에서 일부는 말갈 계통이었을 가능성이 더러 있다. 이후에는 고구려의 전성기 때 남진과 더불어 함께 나타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만주에 살던 말갈족을 고구려가 징병해서 남진에 동원했을 가능성이 높다. 비슷하게 예인(동예)을 [[백제]]와의 [[독성산성 전투]]에 동원하기도 했다. 심지어 [[의자왕]] 때도 655년 고구려-백제-말갈 연합군이 신라 북쪽 국경 33개의 성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아예 고구려화된 말갈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 복원을 내세우며 고구려를 재건하기도 하였다. [[고왕|대조영]]의 출신에 대해 논쟁이 많은데, 사실 [[고왕|대조영]]이나 [[발해]]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 외국 학자들은 말갈계 고구려인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꽤 있다. 예를 들면 대영제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영국으로 귀화하게 된 영국령 인도 출신의 인도계 영국인에 비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 정확한 이해로 볼 수는 없다. 대조영은 속말말갈 내부 부여계 예맥인일 개연성이 높기 때문.[* 한편 한국 사학계에서는 '말갈'을 현재의 퉁구스계에 한정된 용어가 아닌 중국이 한국을 비롯한 동쪽의 민족들을 멸시적으로 총칭한 용어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기록이 짧아 대조영의 정확한 출자를 알기는 어렵다.] 반면에 아무르강과 연해주 일대에 살던 [[흑수말갈]]을 비롯한 상당수 다른 말갈 부족들은 복속과 이탈을 꾸준히 반복한 것으로 보아 끝끝내 발해에 동화되지는 않은 듯하다. 즉, 말갈 부족들은 의식적으로 고구려인에 상당히 동화되었고 예맥인 비중도 꽤 높은 말갈 부족(속말부, 백산부)들과 생활방식이 많이 달라 동화되지 않은 말갈(흑수부, 철리부, 월희부 등) 부족들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 백제 === === 신라 === * 125년 - [[신라]] 지마이사금(祗摩泥師今) 14년 1월, 말갈이 북변을 침입해,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했다. 다만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 기록에서 나타나는 한반도 중부의 말갈은 진짜 말갈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위말갈]] 문서로. 고구려 멸망 후 일부는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신라로 흘러들어갔다. [[일본서기]]에는 [[나당전쟁]] 종료 직후인 677년 11월 신라 사신 김청평이 7명의 숙신 사람을 데리고 일본에 갔다온 기록이 나오는데, 시기와 정세상 고구려 치하에 있다가 멸망 후 고구려인들을 따라서 신라로 귀순한 [[보덕국]] 소속인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금성을 방어하는 부대인 9서당에 대한 기록을 보면 9서당 중 흑금서당 부대는 말갈인으로 구성되었다고 기록했다. 말갈인으로 따로 부대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고구려인 인구를 흡수한 통일신라의 인구구성 중 일부는 말갈인이 차지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신라, 그리고 영역을 이어받은 고려왕조 영토 내부(특히 중ㆍ남부)에 퉁구스계 집단이 있다는 기록도 없고 고고학적으로 숙신계 유적이 발굴된 바도 없기 때문에 위와 같이 7세기 통일신라에 존재했던 말갈인들은 오래 못가 정주 민족인 신라-고려인에 동화된 것으로 추정한다. 한반도 중남부가 숙신의 고지와 거리가 멀어 이들이 원래의 정체성과 생활 양식을 유지하기 어렵기도 했고 수렵, 유목 민족들이 농경, 정주 문명에 동화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 고려 === [[후삼국시대]]에 변방의 말갈족을 [[고려]]군이 공략한 기록이 있다. 이때 주로 활약한 장수가 [[유금필]]. 이후 복속된 말갈족은 [[후백제]]와의 전쟁에서도 종종 동원된다. == 기록에 등장하는 말갈 부족 목록 == * [[속말말갈]] * [[백산말갈]] * [[흑수말갈]] * [[철리말갈]][* 또는 안차골.] * [[월희말갈]][* 또는 호실.] * [[우루말갈]] * [[불열말갈]] * [[백돌말갈]] == 말갈족 인물 == * [[돌지계]]: 이근행의 아버지. * [[생해]](生偕): 661년 고구려 장수 뇌음신과 함께 [[북한산성 전투|술천성, 북한산성을 공격]]한 말갈인 장군. * [[이근행]] * [[걸사비우]] * [[예속리기]]: 흑수말갈의 족장. == 둘러보기 == [include(틀:수서)]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분류:말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