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대한민국 정부)] [include(틀:문민정부)] ||<-3> '''{{{#fff [[대한민국 제6공화국|{{{#fff 제6공화국}}}]][br]{{{+1 문민정부}}}[br]文民政府 | Civilian Government}}}''' || ||<-3> '''{{{#003990 [[1993년|{{{#003990 1993년}}}]] [[2월 25일|{{{#003990 2월 25일}}}]] {{{#003990 ~}}} [[1998년|{{{#808080 1998년}}}]] [[2월 24일|{{{#808080 2월 24일}}}]]}}}''' || ||<-2> '''출범 이전''' || '''출범 이후''' || ||<-2> [[노태우 정부|{{{#808080 '''노태우 정부'''}}}]] || [[국민의 정부|{{{#009A44 '''국민의 정부'''}}}]] || || '''대통령''' ||<-2>'''[[김영삼]]''' ,,,/ 제14대,,,|| || '''국무총리''' ||<-2>'''[[황인성(1926)|황인성]]''' ,,,/ 제25대 (1993.2.25.~1993.12.16.),,, [br]'''[[이회창]]''' ,,,/ 제26대 (1993.12.17.~1994.4.21.),,, [br]'''[[이영덕]]''' ,,,/ 제27대 (1994.4.30.~1994.12.16.),,, [br]'''[[이홍구(정치인)|이홍구]]''' ,,,/ 제28대 (1994.12.17.~1995.12.17.),,, [br]'''[[이수성(정치인)|이수성]]''' ,,,/ 제29대 (1995.12.18.~1997.3.4.),,, [br]'''[[고건]]''' ,,,/ 제30대 (1997.3.5.~1998.3.2.),,, || ||<|2> '''여당''' ||<-2>[include(틀:민주자유당)] ,,,(1993.2.25.~1995.12.6.),,, || ||<-2>[include(틀:신한국당)] ,,,(1995.12.6.~1997.11.7.),,, || ||{{{#!wiki style="margin: -5px -10px" [[제14대 대통령 취임식|[[파일:김영삼 취임식 사진.png|width=100%]]]]}}} || || {{{-1 '''▲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 취임 선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문민정부''' 또는 '''김영삼 정부'''는 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김영삼]]이 이끌었던 정부이다. [[대한민국 제6공화국|제6공화국]] 2기 정부로 1993년 2월 25일 출범해 1998년 2월 24일까지 5년간 존속하였다. 주요 슬로건은 신한국 창조, 국제화, 세계화, 국정지표는 '깨끗한 정부, 튼튼한 경제, 건강한 사회, 통일된 조국'. [[대한민국 보수정당]]의 집권 정부 중 하나다. 문민정부에서 '''[[문민]]'''의 뜻은 '일반 국민'으로, 과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재임기간이 짧았던 [[최규하]]는 제외. 다만 최규하도 결국 군사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했고 [[유신체제]] 하에서 대통령에 올랐으므로 김영삼이 강조한 문민정부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약 32년간[* 정확히는 31년 9개월 7일(11607일)이다.] 이어진 군부 출신의 대통령이 아닌 '민간인 출신'에 의한 정부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군부정권과 냉전의 종식 이후 시작된 한국의 [[1990년대]]를 대표하는 정부.[* 이는 동시기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가 냉전 이후 1990년대를 상징하는 정권으로 평가받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참고로 YS 행정부와 빌 클린턴 행정부는 같은 1993년에 출범했다.] 노태우 정부 후반기 시절, 냉전 말기였던 1990~1991년 북방외교로 시작된 구 공산권 국가와의 수교 및 냉전의 붕괴로 인한 외교적인 안정기를 거쳤으며,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 [[3저 호황]]부터 이어진 대한민국 경제의 황금시절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임기 막바지인 1997년 11월에 불어닥친 [[IMF 외환위기]]로 인한 경제침체의 서막, 드높은 경제성장에 가려져있던 여러 사회 및 안전 시스템의 부재 등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이 양지로 처음 올라왔던 시기이기도 했다. == 출범 == 1992년 12월 18일 당시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영삼]]은 당시 경쟁 상대였던 [[민주당(1991년)|민주당]]의 [[김대중]], [[통일국민당]]의 [[정주영]]과 대선경쟁을 벌이게 된 끝에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93년 2월 25일 [[서울특별시]] [[여의도]]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에서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청렴과 민생을 중시하며 국가안보에도 힘쓰는 정부를 표방하며 임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 임기 중의 일들 == 임기 첫해인 1993년에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여[* [[하나회]]를 숙청하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는 등의 개혁적인 태도는 집권 초반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지지율을 높게 만들어 주었다.] 정치자금 등 검은 돈이 거래되지 못하도록 하고 금융권에 새로운 방식을 불어넣었다. 또한 대통령을 비롯해 모든 정부 각료들의 재산내역을 전면 공개하였으며, 정치자금 및 뇌물을 일체 받지 않겠다고 표방하였다. 또한 '공직자윤리법'을 개정하여 공직자들의 윤리적인 행동 강화와 부정부패 척결[* 임기 초반 점심 식사를 국수로, 골프 안 치기 등의 조처를 내놓았고, 집권 첫날 [[청와대]] 집무실 내부 모퉁이에 있는 금고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발견하고 어이없다 생각하여 기중기를 동원하여 금고를 떼어내라 지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강 바로잡기 등을 통해서 임기 초부터 공무개혁을 표방하였다. 또한 '[[역사바로세우기]]'를 실시하여, 이전 정부(특히 [[대한민국 제5공화국|5공]] ~ [[대한민국 제6공화국|6공]])에 가려져 있었던 정치사 및 과거사 문제해결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2.12 군사반란]], [[5.18]]에 대해 전면 재조사하고 [[하나회]] 숙청을 단행했으며, 그동안 [[광주광역시|광주직할시]] 주관으로 열렸던 5.18 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격상시켜서 [[국가보훈처]]로 이관하는 등 과거사 청산에 힘썼다. 또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노태우,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을 정치자금, 군사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하고 법정에 세웠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대한 과거사 청산도 병행하여 [[1995년]] [[2월]]에는 정부 차원에서 [[쇠말뚝]]을 대대적으로 뽑아냈고, [[8월 15일]] [[경복궁]]에 남아있던 [[조선총독부]] 본청을 철거하였고 경복궁 복원사업을 추진하였으며, [[10.26 사건]]이 있었던 궁정동 안가를 철거하여 시민공원으로 개조하였다. 또한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전면 개방하여 국민들이 이 일대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하였다. 더불어 [[국민학교]]와 [[국민학생]]을 [[초등학교]]와 [[초등학생]]으로 개칭하고, 1914년 [[조선총독부]]가 단행한 [[부군면 통폐합]]의 잔재였던 도농(시군)분리 행정구역들을 통합하여 [[도농통합시]]들을 출범시키는 등 [[일본 제국|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데에도 힘썼다.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지방자치제]]도 본격 시행되었다. 또한 정부기구를 일부 축소 및 통합하여 기존의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을 '''재정경제원'''으로 통합하고 건설부와 교통부를 '''[[건설교통부]]'''로 통합하였으며 [[체신부]]를 '''[[대한민국 정보통신부|정보통신부]]'''로 개칭하여 정보통신 분야의 지위를 격상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1993년]] [[의약 분업]]을 처음 입안했는데 숱한 논란을 거쳐 다음 정부인 [[국민의 정부|김대중 정부]]에서 본격 시행된다([[2000년]]). 국제대회 분야에서는 1993년 [[대전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1997년]]에 열렸던 무주·전주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1996년에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 월드컵]]을 [[일본]]과 공동유치하는 데에도 성공하였고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유치에도 성공하였다. 그리고 1995년에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하고, 이듬해인 1996년에 [[OECD]] 가입에도 성공하여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도 하였다. [[파일:attachment/ys_clinton.jpg]] 외교적으로는 [[한미관계|한미동맹]]을 강화하여 [[미국]]과의 외교안보적 혈맹관계를 이어나갔으나, 1994년에 북한 핵 문제로 전운이 감도는 긴박한 상황에서 오히려 엇박자가 나는 등 다소 혼선이 있기도 했었다. 한국은 절대로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입장인데 반해 미국은 영변 폭격을 시작으로 전쟁에 돌입할 것을 검토하고 있었다. 또한 임기 첫 해부터 1994년까지 우루과이라운드 체결 움직임과 쌀 시장 개방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1993년 클린턴 방한 반대 시위 등이 열릴 정도로 NL 운동권 세력과 농민들 사이에서 안 좋게 보기도 했고, 1995년 충무로역 난동 사건, 춘천 택시기사 폭행 사건 등 주한미군 범죄가 이슈화되면서 SOFA 개정 문제가 국민들 사이에 관심이 생기기도 했다. [[일본]]과의 관계는 아예 대놓고 안 좋았다. 광복 50주년 + 수교 30주년을 맞은 1995년 와타나베 전 외상, 시마무라 요시노부 문부상 등 [[일본]] 극우 정치인들의 과거사 및 [[위안부]] 관련 망언이 줄줄 나왔고, 심지어 김영삼 본인이 한중정상회담 회견에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 한다."'''는 강경한 발언을 공식 석상에서 내뱉었을 정도로 한일 관계가 험했다 . 다만 [[일본사회당(1945년)|일본사회당]] 소속으로 총리에 오른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광복절]]을 맞아 [[무라야마 담화]]를 내놓으면서 어찌 회복되었다.[* 그러나 두 달 후 무라야마 총리도 "한일합방은 국제적으로 유효하다"며 망언했다가 11월 한일정상회담 때 결국 사과했다.] 그러나 1996년 하시모토 류타로 자민당 내각 수립 후 독도 영유권 문제 등으로 다시 안 좋아졌다. 대북 정책의 경우, 출범 직후에는 남북 대화에 비중을 뒀다.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사에도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의지가 이전 정권에 비해 명확했으며,[* ''' "[[김일성]] 주석에게 말합니다. 김 주석이 참으로 민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남북한 동포의 진정한 화해와 통일을 원한다면 이를 논의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한라산]] 기슭에서도 좋고, 여름날 [[백두산]] 천지 못가에서도 좋습니다. 거기에서 가슴을 터놓고 민족의 장래를 의논해 봅시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3173_13445.html|#]]] 먼저 그는 보수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주인사 [[한완상]]을 [[통일부장관|통일부총리]]에 임명하고 [[비전향 장기수]]였던 리인모를 전격적으로 북한에 송환시키는 등의 유화적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1992년 미국의 북핵문제 제기와 한미 팀스피릿 훈련 재개로 이미 경색된 남북갈등은 몇 달 뒤, [[NPT]] 탈퇴에 이은 [[1994년]] [[3월]]의 [[서울불바다|서울 불바다]] 발언[* 박영수 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국장이 [[개성시|개성]]에서의 회담 도중 '''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 '''라는 발언을 했다. 사실 그 뒤에 ''' " 이 회담에서 우리가 심사숙고를 해야 합니다." '''라는 말을 한걸보면 저게 전쟁 위협이라기보다는 엄포 정도로 해석할 여지도 있으나, 남북 대치 상황하에서 서울이 불바다가 된다는 망언을 한 것은 명백히 전쟁 선포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박영수의 망언 직후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이 ''' "[[북한]]이 도발할 경우 통일의 기회로 삼겠다." 는''' 강경한 발언을 하는 등 상황이 심각해지자 그 뒤로 한동안 북한 대표단에서 빠졌다. [[김일성]]조차 박영수의 망언이 도가 지나쳤다고 했을 정도였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4/nwdesk/article/1927028_30690.html|#]] 다만 박영수 본인은 1998년에 열린 남북 해외학자 통일회의에서 해당 발언에 대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22100289102012&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8-02-21&officeId=00028&pageNo=2&printNo=3122&publishType=00010|"남북간에 전쟁이 터지면 북한은 물론이요 서울도 똑같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해명을 남겼고 이는 앞서 언급한 것과 유사하다.] 등이 연달아 터지면서 사실상 대북 강경책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다가 1년 뒤 1994년 6월 [[지미 카터]]의 방북으로 북핵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고 김일성의 정상회담 제의를 수락하면서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었지만, [[김일성]]이 심근경색으로 급사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김정일]]이 사실상 권력을 승계하면서 [[북한]]은 '''전쟁론 불사''' 등의 강경 일변도로 나오면서 결국 경색관계만이 남게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1996년에는 [[강원도]] [[강릉시]]에 [[무장공비]]가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침투]]하는 바람에 대북경협까지 동결되어 관계가 더 나빠졌다. 다만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 전역이 개판이었던 것을 어느 정도 돕는다는 명분으로 쌀을 지원한다거나[* 물론 쌀이 남아돌게 된 현실과 우루과이 라운드로 농산물 수입에 나서게 되면서 수매가를 유지하는것이 필수적인 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경수로 건설을 지원하는 등의 제한적인 대북 지원은 있었다.[* 물론 이후의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에 비하면 매우 적은 규모였다. 사실 의외로 탈북자에 대한 지원이 가장 적었던 정부가 김영삼 정부였다. 이유인 즉슨 김영삼 이전의 정부에서는 체제선전용으로 탈북자들을 홍보용으로 써먹는 경우가 많았고,(그리고 이 당시에는 경력차가 별로 컸던 시기가 아니라서 상대적으로 적응이 쉬었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이후로는 생계비 지원에 초점을 맞추면서 지원을 늘렸는데 김영삼 정부에서는 더 이상 체제선전용으로 써먹기에도 애매해졌고, 그렇다고 생계비 지원을 획기적으로 늘리기에는 북한붕괴론이라는 이슈가 있으니 어쩡쩡하게 대처한것이 있었다. 물론 의도적인것은 아니지만 대충 그랬다.] 범민족대회나 범청학련 통일대축전과 같은 민간 교류도 활발하게 일어나려는 듯 했으나, 정부는 안보상의 문제점을 우려하여 이를 철저히 통제했다. 이러한 기조는 김대중이 집권하기 전인 199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문민정부는 역대 정권 중에서 [[사형]] [[엄벌주의|집행이 가장 활발]]했던 정부이기도 하다. 이름도 유명한 [[지존파]]와 [[온보현]] 등이 이 시기에 처형됐다. 굉장히 사형이 활발히 이루어져서 [[김수환]] 추기경이 사형 집행 자제를 촉구하기도 했지만 바로 다음날에 사형수가 이미 많다는 이유로 23명을 한꺼번에 사형에 처했는데 [[4공화국]] 때인 1976년 27명을 사형 집행한 이래로 가장 많은 수였다.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173-00_01012006.jpg]]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173-00_01032211.jpg]]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세 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_%EC%A0%9C15%EB%8C%80_%EB%8C%80%ED%86%B5%EB%A0%B9_%EC%84%A0%EA%B1%B0#cite_ref-12|위키백과 제15대 대통령 선거, 대선후보들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공약 대결 논란]]] 결국 15대 대통령 선거 이틀후인 [[12월 20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의 국민 대통합 명분에 따른 요청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수락하면서 [[김영삼 정부]]에 의해 사면복권되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2221_19482.html|전두환 노태우 사면 결정 정부]]] 당시엔 김영삼 정부 및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가 이 전노 사면을 추진하고 전노사면에 여야 모두 찬성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전노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2210020910700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2-21&officeId=00020&pageNo=7&printNo=23744&publishType=00010|전노 사면에 대한 청와대 정치권 반응 1997.12.21. 동아일보]]] 그러나 5공 시절 간첩조작으로 복역된 김성만, 양동화, 강용주, 함주명, 그리고 노태우 때 구속된 [[서경원]] 전 의원, [[박노해]], [[백태웅]] 등 장기복역 시국사범(양심수)들의 석방이 불발되었다. == [[/평가|평가]]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문민정부/평가)] '''[[권위주의]] 타파''', '''[[하나회]] 해체''', '''군부출신 퇴출''', '''[[금융실명제]] 추진''', '''[[역사바로세우기]]''', '''공직자 재산공개'''와 같은 국가적 차원에서의 [[적폐청산]]과 정치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지만 이와 반대로 정경유착으로 인해 발생한 한보사태와 이에 대한 차남 [[김현철(1959)|김현철]]의 연루, 그리고 [[1997년 외환 위기]]를 불러온 정부라는 점[* [[외환위기]]를 [[김영삼]] 정부의 책임만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대통령]]이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인식하고도 종금사를 24개나 인허가해주면서도 관리에는 소홀했던 것은 큰 실책으로 꼽힌다.]은 [[문민정부]]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 요인이다. 때문에 [[문민정부]]는 호평과 혹평이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정부이기도 하다. 실제 [[문민정부]]는 여러 개혁을 시도해 호평을 받은 집권 초반에는 '''83%'''라는 매우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며 인기를 구사했지만 1994년 이후 지지도가 점점 떨어져 [[IMF 사태]]가 터진 집권 말기에는 지지율이 한 자릿수인 '''6%'''까지 추락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불 돌파에 [[OECD]] 가입 등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경제 강국으로 성장한 시기였다. 1996년에 세계 경제력 11위를 차지했으며 [[전두환]] 정권의 1980년대 만큼 이 정권 시기인 90년대도 많은 사람들이 향수를 느끼고[* 일례로 2010년대에 [[김영삼]]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가 [[응답하라 1997|두]] [[응답하라 1994|편]]이나 나왔으며, 두 드라마 모두 당시를 살았던 시청자들의 향수를 자극해 성공했다. 그래봤자 일종의 추억 보정이라고 볼 수 있지만 바꿔 말하면 그런 추억 보정을 일으킬만한 시대였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서태지와 아이들]]로 상징되는 풍성한 문화적 성장이 있던 시기였다. 사실 외환위기 이전까지 [[김영삼]] 정부의 경제성적표는 굉장히 좋았다. [[노태우 정부]] 시기에 비해 [[부동산]] 가격이 안정화되었고[* 김영삼 정부 5년 동안 전국 주택매매가격 상승률은 0.3%에 불과했다.] 연평균 7.10%의 고성장을 이룩하면서도 물가상승률 연평균 4.98%였기때문에 그만큼 여유가 넘쳤던 것이었다.[* 물론 상대적으로 여유가 넘쳤다는것이지 1980년대 중후반~1990년대 [[일본]]처럼 돈잔치가 크게 열린 수준은 아니었다. 해외여행 빈도가 크게 늘고는 했지만, 자산시장 자체는 침체였던 시절(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주식시장은 1992년~94년에 상승한 뒤로는 침체, [[부동산]]은 1기 [[신도시]]의 영향으로 가격이 안정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임금상승률은 10%대를 유지한데 반해 [[부동산]] 경기의 침체로 1990년대 초반에 비해 소득대비 집값이 크게 낮아져서 집구하기는 쉬웠던 시절(혹은 그렇게 느꼈던 시절)은 맞다.] 그러나 [[경상수지]]와 외채 관리에 실패한 결과로 '''[[1997년 외환 위기]]'''가 찾아왔고 그래서 이런 경제적 성과를 제대로 평가받기 어렵게 만든 측면도 있다. 하지만 2015년 11월 22일 사망한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IMF]]의 원인을 온전히 [[김영삼]]의 잘못으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지적에 동의하는 사람이 늘었고, [[금융실명제]] 실시와 하나회 해체[* [[2021년 미얀마 쿠데타]]가 터지면서 더더욱 재평가받고 있다.], 역사 바로 세우기 같은 긍정적 업적들이 [[http://mobile.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51125000083|재평가를 받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말년을 제외하고는 괜찮은 [[대통령]]이었다는 평가가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뭐 그렇다고 전임 대통령 지지도 조사에서 크게 높게 나오지는 않지만[* 이러한 성격의 조사에서는 [[박정희]],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높은 지지율이 잘 집계되지 않는다. 인터넷 조사에서는 [[노무현]]이 우세하고, 실제 언론 조사에서는 [[박정희]]와 [[김대중]]이 높은 수치를 기록한다.] [[IMF]] 하나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어서 근래들어 나름대로 재평가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사건·사고와 실책 === 임기 중 대형사고가 많은 편이다. 1993년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인천/부천 세무비리사건, 1995년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의 굵직한 사건사고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 "[[사고 공화국]]" 이라는 오명을 낳았다. 임기 중반 이후부터는 대형사고는 많이 사라졌으며, 임기 초반부에 나타난 대형 사고들은 이전부터 축적되어 온 정경유착에 따른 부실, 졸속 허가에 따른 것이다. 여기에 자율화된 언론과 민주화된 사회 분위기가 만나 그 동안 철저히 은폐되었던 한국 경제의 고속성장의 부작용이 고스란히 전해진 것이었다. 한편 위와 같은 대형사건이 벌어졌을 당시에도 상부는 즉각 은폐하기에 급급했고, 관료제는 복지부동으로 일관하고 있는데도 정부가 이를 통제하지 못해 국가행정 전반의 난맥상 및 마비현상이 벌어졌다. 이에 결정적으로 1997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1959)|김현철]]의 비리와 한보그룹의 정경유착이 밝혀지면서 도덕성에 타격을 입었고, 집권 초반 국내 사회 시스템 개혁에 주목했던 반면 집권 후반기에는 외교/경제부문 개방에 집중적으로 주력했다. 인사 면에서도 논란이 많다는 지적이 있었다. 발표 전까지 철저히 보안을 중시하며 장관을 뽑아왔으나 이 과정에서 능력/도덕성 면에서 함량 미달자들도 나오다 보니 문제만 생기면 일단 갈아치우는 식으로 인사를 꾸렸다. 1998년 동아일보 연재물 <비화 문민정부> 7회에 따르면 개각만 총 25회, 총리 6명, 경제부총리 7명, 통일부총리 6명, 장관 118명이 각각 나왔으며 장관 임기는 평균 13.3개월, 차관 14.9개월, 청장 16.8개월꼴이고 장관은 노태우 때의 12.6개월보다 좀 길었다. 문민정부 시기 5년 내내 공보처장관을 했던 오인환을 제외해도 평균 11.3개월밖에 안 되었다.[[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19980118/7315725/1|#]] 이런 잦은 개각이 경제정책 실패 요인 중 하나가 되었으며 중반에는 부경권(PK) 출신 인사들의 권력 독점 논란도 생겼다.[[https://www.hankyung.com/article/1997022400051|#]] 2005년 중앙인사위원회의 '역대정부 정무직 지역균형지수 분석결과'에 따르면 41이었다.[[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77983?no=77983#0DKW|#]] 1997년에는 정경유착 등 그동안 한국 사회에 축적되어온 경제시스템의 문제로[* 한보그룹의 정경유착은 청렴을 강조했던 문민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다. 결국 1997년은 한보그룹의 부도를 시작으로 [[기아자동차]] 등등 많은 회사들이 부도났다.]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신청이라는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되면서 [[1997년 외환 위기|결국 경제면에서 실패]]한 정부라는 오명과 단점을 안게 되었다. 또한 대통령 선거 당시 영남지역의 압도적인 지지에 등을 업고 출범한 정부라는 점 때문에 영남지역에서는 긍정적인 반응이 많은 반면 [[김대중]]을 지지하는 호남지역에서는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다. 다만 임기 초반에 [[하나회]] 척결이나 [[금융실명제]] 실시 등으로 지지율이 90%대를 넘나드던 시절에는 호남에서도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반응이 많았다. 이 당시 여론조사에서도 호남에서도 지지율이 70~80%대에 달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점차 떨어지면서 호남에서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과 야당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호남에서의 혹평이 많아졌고 영호남 간의 [[지역감정]]과 갈등도 이 때 들어서도 이어나가게 되었으며 대통령 김영삼 자신도 [[김대중]]과 갈등을 빚으며 사이가 멀어지고 나빠지는 아이러니까지 보였다.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의 정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 정부입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5264_13445.html|#]] 다만, 김영삼 본인이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가였던지라 호남 지역의 울분이 서려있었던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에 대해서만큼은 적극적으로 나섰다. 취임 직후인 1993년 5월 13일 전격적으로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진상 규명을 다짐했으며 특히 담화의 첫 부분은 당시까지만 해도 대놓고 발표하기 힘든 수준의 문장이었다. 그러나 [[신한국당]]과 문민정부는 [[1997년]] 대선 당시 [[전두환]] 사면을 추진하여 논란을 빚었다. [[김영삼 정부]] 및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가 이 전노 사면을 추진하고 전노사면에 여야 모두 찬성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전노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2210020910700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2-21&officeId=00020&pageNo=7&printNo=23744&publishType=00010|전노 사면에 대한 청와대 정치권 반응 1997.12.21. 동아일보]]] == 국정지지율 == === 한국갤럽 === [include(틀:한국갤럽 김영삼 대통령 국정지지율)] == 주요 사건 == 사건/사고의 경우 '''굵은 글씨'''로 표기 === [[1993년]] === * [[2월 25일]] - [[제14대 대통령 취임식|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식]] * [[3월 2일]] - 인권운동사랑방 출범 * [[3월 6일]] - 재소자 41,886명 특별사면 * [[3월 8일]] - [[하나회]] 숙청 시작 * [[3월 12일]] [[북한]],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 [[3월 19일]]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 북송 * '''[[3월 28일]]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 * [[3월 31일]] 공직자 재산공개 파동 * [[4월 2일]] [[환경운동연합]] 출범 * '''[[4월 19일]] 논산 정신병원 화재사고''' * [[4월 22일]] [[소말리아]] 상록수부대 발대식 * [[4월 27일]] 소설가 [[황석영]] 귀국 및 연행, [[한총련]] 출범 * [[6월 1일]]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 결성 * '''[[6월 10일]] [[연천 예비군 훈련장 폭발 사고]]''' * [[6월 11일]] - 2차 재보궐선거 * '''[[6월 14일]] [[한강 영화촬영 헬기 추락 사고]]''' * [[7월 1일]] 「新경제」 5개년 계획 발표 * '''[[7월 26일]]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 [[8월 7일]] ~ [[11월 7일]] - [[1993 대전 엑스포]] 개최 * [[8월 9일]] 태풍 '로빈' 상륙 * '''[[8월 12일]] [[금융실명제]] 실시''' * [[8월 20일]] - 제1회 [[대학수학능력시험]] 실시 * [[9월 3일]] 한의사-약사 분쟁[* 1차 한약분쟁이라고 한다. 2차는 95년.] * [[9월 23일]] 민가협, 첫 목요집회 시작 * [[9월 24일]] 남매간첩단 사건 발표 * '''[[10월 10일]] [[서해훼리호 침몰사고]]''' * [[10월 18일]] [[서울대]] 우조교 성추행 사건 * [[12월 4일]] [[농림부장관]] [[허신행]], 쌀개방 발표 * [[12월 7일]] - [[여의도광장]] 쌀개방 반대 농민 시위 * [[12월 8일]] [[천리안(PC 통신)|천리안]] '현대철학동호회' 사건 * [[12월 9일]] - 김영삼 전 대통령, 쌀개방 발표 * [[12월 23일]]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 [[1994년]] === * [[3월 2일]] 전교조 해직교사 1,135명 복직 * [[3월 7일]]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 결성 * [[3월 15일]] 상문고 비리사건 * [[3월 19일]] [[서울 불바다]] 파동 * '''[[5월 26일]] [[박한상(범죄자)|박한상]] 사건''' * [[6월 4일]]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결성 * [[6월 14일]] '''북한, IAEA 탈퇴 선언''' * [[6월 20일]] 한국통신, 상용 인터넷 서비스 실시 * [[6월 28일]] '''7월 25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 갖기로 결정''' * '''[[6월 23일]] ~ [[6월 30일]] 철도/지하철 총파업''' * '''[[7월 8일]] 북한 [[김일성]] 주석 사망, [[남북분단]] 이후 첫 [[남북정상회담]] 무산''' * [[7월 18일]] ~ [[8월 25일]] '''[[1994년 주사파 파동|주사파 파동]]''' * [[8월 10일]] [[대한항공 2033편 활주로 이탈 사고]] * '''[[9월 21일]] [[지존파]] 검거''' * [[10월 1일]] [[KBS 1TV]] 상업광고 폐지 *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사고]]''' * '''[[10월 24일]] [[충주호 유람선 화재 사건]]''' * [[11월 17일]] 김영삼 전 대통령, 시드니 APEC 정상회의에서 세계화 구상 발표 * '''[[12월 7일]]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 발생''' === [[1995년]] === *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 * [[직할시]]의 명칭을 [[광역시]]로 변경[* [[부산직할시]], [[광주직할시]], [[대구직할시]], [[대전직할시]], [[인천광역시|인천직할시]] 등이 포함되었다. 당시 [[울산광역시|울산]]은 아직 [[경상남도]]에 속한 [[시(행정구역)/대한민국|시]]였으므로 포함되지 않았다.] * [[도농복합시]] 제도 실시 * [[쓰레기 종량제]] 실시 * [[3월 1일]] [[케이블 방송|종합 유선방송]][* 케이블 SO] 정식 송출 시작 * '''[[3월 14일]] 김형진 금룡학원 이사장 패륜살해사건''' * [[3월 30일]] [[자유민주연합]] 창당 * [[4월 13일]]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출범 * '''[[4월 28일]]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 [[5월 12일]] 김숙희 [[교육부장관]] 사퇴파동 * [[5월 19일]] 김영삼 전 대통령, [[한국통신]] 파업 사태를 '국가전복 기도'로 간주함. * [[5월 31일]] 5.31 교육개혁방안 발표 * [[6월 6일]] [[조계사]] 한국통신 노조간부 체포사건 * [[6월 27일]]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실시 *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 [[7월 1일]] 부동산실명제, [[지방자치제]] 실시 * [[7월 13일]] [[김대중]] 정계 복귀 공식 선언 * [[7월 18일]] [[대검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불기소처분]] * '''[[7월 23일]] 태풍 '[[페이(태풍)|페이]]' 상륙, [[씨 프린스호 좌초사고]]''' * [[8월 1일]] [[한국통신]], 무궁화 1호 위성 발사 * [[8월 11일]] [[국민학교]] 명칭 변경 [* [[1996년]] [[3월 1일]]부터 적용되었다.] * '''[[8월 15일]] 광복 50주년 기념식에서 구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 [[8월 21일]] 경기여자기술학원 방화사건 * [[9월 5일]]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 '''[[10월 19일]] [[노태우 비자금 사건|박계동 전 의원, 노태우 비자금 폭로]]''' * '''[[11월 2일]] [[온보현]] 및 [[지존파]] 6명에게 [[사형]] 집행''' * [[11월 1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출범 * '''[[11월 16일]] [[노태우]]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 * [[11월 15일]] [[수도권 전철 5호선]] 개통 * '''[[12월 3일]] [[전두환]]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 [[안양교도소]]에 수감''' * [[12월 6일]] [[팔만대장경]], [[불국사]], [[종묘]] [[세계유산|세계문화유산]] 지정 * [[12월 21일]] 5.18 특별법 제정 * 국민소득 1만 [[미국 달러|달러]] 돌파 === [[1996년]] === * [[1월 14일]] 무궁화위성 2호 발사 * [[2월 29일]] '전자주민카드' 시범도입 실시 * [[3월 29일]] 노수석 학생 사망사건 * [[4월 11일]]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실시 * '''[[5월 31일]]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년 월드컵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확정]]''' * [[6월 7일]] 음반 사전심의제도 폐지 * [[7월 1일]] * [[코스닥]]시장 개장 * KBS위성1, 위성2 개국 * 영화 사전심의제도 폐지 * '''[[8월 13일]] ~ [[8월 20일]] 제7차 범민족대회 및 제6차 범청학련 통일대축전([[한총련]] [[연세대 사태]])''' * '''[[8월 26일]] [[전두환]] [[사형]], [[노태우]] [[무기징역]] 선고''' * '''[[9월 18일]]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 [[10월 4일]] 영화 사전심의제도 위헌 판정 * [[10월 11일]] [[OECD]] 가입 * [[10월 11일]] [[서울 지하철 7호선]] 개통 * [[10월 14일]]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보화 5대 목표' 발표 * [[10월 31일]] 음반 사전심의제도 위헌 판정 * [[11월 23일]] [[서울 지하철 8호선]] 개통 * [[12월 26일]] [[1996년 노동법 날치기]] * [[12월 31일]]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이하 정보공개법) 제정 === [[1997년]] === * '''[[1월 1일]] - [[당산철교]] 재시공 작업 시작''' * '''[[1월 23일]] 한보그룹 부도''' * '''[[2월 12일]] [[황장엽 망명 사건]]''' * '''[[2월 15일]] [[이한영 암살 사건]]''' * [[3월 7일]] [[청소년보호법]] 제정 * [[4월 1일]] 014XY 야간/할인시간 정액제 실시 * '''[[4월 10일]] [[공덕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 * [[4월 17일]] '''대법, [[전두환]] [[무기징역]]/[[노태우]] 17년형 판결.''' * [[4월 20일]] [[청주국제공항]] 개항 * [[4월 22일]] 5.18 항쟁일 국가기념일 확정 * [[5월 17일]] [[김현철(1959)|김현철]] 구속 수감 * '''[[6월 3일]] [[이석 치사 사건]]''' * [[7월 1일]] [[청소년보호법 파동]] * '''[[7월 15일]] 기아그룹 부도''' * [[7월 23일]] 만화가 [[이현세]] 화백 검찰 소환으로 <[[천국의 신화]]> 사건 발생. * '''[[8월 6일]]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 [[8월 25일]] EBS 위성1, 위성2 개국 * '''[[8월 30일]]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살인 사건]]''' * '''[[9월 12일]] 위 사건 가해자 전현주 검거''' * [[10월 1일]] [[훈민정음]] 세계기록유산 등재 * [[10월 11일]]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공진협) 발족 * '''[[11월 21일]] - 임창열 전 경제부총리, [[IMF]]에 구제금융 신청 결정''' * 12월 3일에는 IMF 합의서 서명이 있었으며, 이후 2001년 8월 23일까지 3년 8개월동안 한국은 IMF에 의해 경제 구조조정을 받는다. * '''[[12월 19일]] -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 당선.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여, 야의 평화적 [[정권교체]]''' * [[12월 22일]] -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에 대한 특별사면 집행[* 당시엔 [[김영삼 정부]] 및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가 이 전노 사면을 추진하고 전노사면에 여야 모두 찬성 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전노 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2210020910700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2-21&officeId=00020&pageNo=7&printNo=23744&publishType=00010|전노 사면에 대한 청와대 정치권 반응 1997.12.21. 동아일보]]]. * [[12월 30일]] - 대한민국 마지막 [[사형]] 집행.[* 차기 정권에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한 조치이다.] 이후 한국은 사형집행을 한 번도 하지 않아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로 분류된다. === [[1998년]] === * [[1월 15일]] - 제1기 [[노사정위원회]] 출범 * [[1월 23일]] - [[일본]], [[한일어업협정]] 일방 폐기 선언 * [[2월 24일]] - [[김영삼]] [[전직 대통령|대통령]] 퇴임 == 인사 == [include(틀:문민정부의 국무위원)] == 관련 문헌 == === 도서 === *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EB%AC%B8%EB%AF%BC%EC%A0%95%EB%B6%80+1%EC%B2%9C2%EB%B0%B1%EC%9D%BC#viewKey=368290&viewType=AH1&category=%EB%8F%84%EC%84%9C&pageIdx=1|문민정부 1천2백일]] - 주돈식 저. 사람과책. 1997. *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EB%8C%80%ED%86%B5%EB%A0%B9%EA%B3%BC+%EC%95%84%EB%93%A4#viewKey=427414&viewType=AH1&category=%EB%8F%84%EC%84%9C&pageIdx=1|실록 청와대 문민정부 5년: 대통령과 아들]] - 한국일보 특별취재팀 편. 한국문원. 1999.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 백산서당. 2000. *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srchTarget=total&pageNum=1&pageSize=10&kwd=%EA%B9%80%EC%98%81%EC%82%BC+%EC%9D%B4%EB%8D%B0%EC%98%AC%EB%A1%9C%EA%B8%B0+#viewKey=311549&viewType=AH1&category=%EB%8F%84%EC%84%9C&pageIdx=1|김영삼 이데올로기]] - [[강준만]] 저. 개마고원. 1995. *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EC%8B%A0%ED%95%9C%EA%B5%AD%EA%B5%B0#viewKey=381034&viewType=AH1&category=%EB%8F%84%EC%84%9C&pageIdx=1|신한국군 리포트: 21세기 국민의 군대로 거듭나기 위하여]] - 김성걸, 이상기 공저. 한겨레신문사. 1998. * 잃어버린 5년, 칼국수에서 IMF까지: YS 문민정부 1,800 일 비화([[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EC%B9%BC%EA%B5%AD%EC%88%98%EC%97%90%EC%84%9C#viewKey=422756&viewType=AH1&category=%EB%8F%84%EC%84%9C&pageIdx=1|1권]],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EC%B9%BC%EA%B5%AD%EC%88%98%EC%97%90%EC%84%9C#viewKey=422755&viewType=AH1&category=%EB%8F%84%EC%84%9C&pageIdx=2|2권]]) - 동아일보 특별취재팀 편. 동아일보사. 1999. *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3당 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1~3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6. === 연재물 === * 동아일보 <[[http://news.donga.com/Series/70000000000007|秘話 문민정부]]> - 1997.12.31. ~ 1998.12.28. 연재. == 둘러보기 == [include(틀:김영삼)] ---- [include(틀:민주자유당 관련 문서)] ---- [include(틀:신한국당 관련 문서)] [[분류:문민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