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경상남도지사)]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2> '''[[경상남도지사|{{{#ffffff 제3대 경상남도지사}}}]][br]{{{+1 문시환}}}[br]文時煥 | Moon Si-hwan'''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tv.pstatic.net/yonhapnews_30163054.jpg|width=100%]]}}} || ||<|2> '''출생''' ||[[1897년]][* 국회의원 선거에는 1898년생으로 출마하였으며, 1899년생이라는 기록도 있다.[[http://www.rokps.or.kr/profile/profile_view.asp?idx=1510&page=1|#]]] [[8월 12일]] || ||[[경상남도]] [[동래군]] 남면 밤대[br](現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부산)|연산동]]) || ||<|2> '''사망''' ||[[1973년]] [[11월 11일]][* 음력 10월 17일.] (향년 76세)|| ||(정부 직할) 부산시[* [[1963년]] [[1월 1일]]부로 직할시로 승격 되었고 [[1981년]] [[4월 4일]] '부산직할시'로 공식 개칭되기 전 까지는 '정부 직할'을 괄호로 병기하여 나타낸다. 다만 비공식적으로는 '부산직할시' 명칭도 통용되었다.] 동래구 온천동[br](現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부산)|온천동]]) || || '''묘소'''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양산)|동면]] 법기리 선영 || || '''본관''' ||[[남평 문씨]][* 의안공파-진사공-동래종중-성안파 29세.] || ||<|2> '''재임기간''' ||제3대 경상남도지사|| ||[[1948년]] [[10월 18일]] ~ [[1949년]] [[11월 14일]]||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부모''' ||[[아버지]] 문정두, [[어머니]] 김해 김씨 || || '''형제자매''' ||1남 5녀 중 외아들 || || '''학력''' ||공립동래보통학교 {{{-2 (졸업)}}} || || '''의원 선수''' ||'''1''' || || '''의원 대수''' ||[[제헌 국회의원|'''1''']] || || '''약력''' ||제헌 국회의원 (부산부 갑)[br]제3대 경상남도지사 || || '''서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의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 [[정치인]]. == 생애 == 1897년 8월 12일 경상남도 동래군 남면 밤대(현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서 아버지 문정두(文禎斗)와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의 1남 5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동래면 복천동(현 [[동래구]] [[복천동]])으로 이주하였다. 1912년 공립동래보통학교(현 부산내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래고등학교|사립동명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던 중, 교사 김병규(金秉圭)의 가르침 아래 민족적 의분을 느끼고 3학년 때 무단가출을 하였으며, 그는 [[만주]] [[단둥시|안동현]]으로 건너가 중국인무역상회 서기로 근무하며 비밀결사 화랑도(花郞徒)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http://db.history.go.kr/id/im_105_00147|#]],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들을 돕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귀국하였으며, [[안희제]]가 설립한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의 [[도쿄]] 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며, 1920년 4월 [[전진한]]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했다. 세이소쿠영어학교 재학 중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이에 [[러시아]] [[모스크바]]로 가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그해 10월 [[울란우데|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참석하고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 국내 제3비서부 위원이 되었다.[[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7&idx=4708|#]] 1922년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동아일보사]] 부산지국의 기자가 되었다. 1923년 1월부터 그해 5월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경남기성회 대표로 참가하여 노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국민대표회의에서 그는 [[안창호]] 계열의 개조파 간부로 활동하였고, 국민대표회의 후에는 [[보천교]]청년회 대표 [[강홍렬]] 등 개조파 지지자들과 함께 [[김원봉]]의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그해 9월 귀국하던 중에 만주 안동현에서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한편, 의열단은 그해 12월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조선은행]]·[[서울종로경찰서|종로경찰서]] 등 일제 식민통치 기관의 파괴와 [[사이토 마코토|조선 총독]] 및 [[다이쇼 덴노|일본 천황]] 암살의 임무를 수행할 단원 11명을 선발하여 조선과 일본에 파견하였다. 문시환은 소위 '의열단 제3차 암살·파괴 계획'으로 불린 이 계획을 위해 조선에 파견되었다가 [[구여순]]·강홍렬·김정현(金禎顯)·[[오세덕]]·[[배치문]] 등과 같이 부산경찰서에 검거되었다. 1923년 12월 29일 경성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으며 1924년 1월 25일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횡령 혐의로 공판에 회부되었으며[[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43&evntId=0034974889&evntdowngbn=Y&indpnId=0000007066&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같은 해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43&evntId=0034974883&evntdowngbn=Y&indpnId=0000026040&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수감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출옥 후에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그곳에서 직물상을 경영했다. 그러나 일제의 요시찰 대상자로 선정되어 1930년 4월 '후계공산당 사건'으로 오사카에서 검거되어 경성부로 호송되는 등 해방될 때까지 감시와 탄압을 받아야 했다. 그후 귀국하여 동래군 생활필수품상업조합 이사장, 부산직물소매상업조합 이사 등을 지냈다. [[8.15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전향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동래지부에 참여했다가 이탈한 바 있고, [[미군정]] 하에서 경상남도 동래[[군수]], [[경상남도청]] 도훈국장 및 상공국장 등을 지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 후보로 경상남도 부산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해 6월에는 무소속구락부에 가담해 연락위원을 맡았으며, 제헌 국회에서는 국회 산업노동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하여 근로자의 이익을 적극 대변하는 의정활동을 했다. 또 국회 내에서 [[남북통일]]을 목표로 결성된 연우회(硏友會)가 그해 9월 이정회(以正會)로 개칭되자 기획부 전임위원에 위촉되었다.[* 제헌 국회의원으로서 약 5개월간 활동했는데, 그 중 독자적인 의정 발언횟수가 62회나 되었다고 한다.] 그해 10월 18일 제3대 [[경상남도지사]]에 임명되면서 [[대한민국 국회의원]]직을 사임하고 같은 해 11월까지 경상남도지사를 역임하였다. 도지사로 재임하던 1949년 3월 경상남도 임시 비상사태 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여수·순천 10.19 사건]] 작전 비용, 상해군경 및 이재민 구호금을 조달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해 금 1만원을 내는 등 솔선수범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치안문제를 책임지라며 사퇴를 종용했고, 그해 8월과 9월 [[거창군|거창]]과 [[진주시|진주]]에서 각각 '8.23 사건' 및 '진주군청 습격사건' 등 [[빨치산]]에 의한 민간인 살인 사건이 발생하자 결국 1949년 11월 14일 사임했다. 1950년 부산극장을 경영하기 시작했으며, 그해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부산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지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 당시에는 일본 유학 시절 닦은 영어 실력으로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의 특별 고문이 되기도 했다. 1959년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72년 [[제헌동지회]] 53명이 [[10월 유신]]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할 때 동참했으며, 1973년 11월 11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11120020920702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11-12&officeId=00020&pageNo=7&printNo=16036&publishType=00020|#]] 별세 후 자녀들은 장례식에 대한 허례 낭비를 생략하고 20만원을 인재양성에 써달라며 [[원불교]] 육영부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5949|#]]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사후 그의 유해는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법기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 선거 이력 == ||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경남 제1선거구(부산시 갑)) || '''[[조선민족청년단]]''' || '''26,377표 (69.57%)''' || '''당선(1위)''' ||[* 49.10.18: 의원직 사퇴] ||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제1선거구(부산시 갑)) || [[무소속]] || 1,868표 (4.31%) || 낙선 (6위) || || == 둘러보기 == [include(틀:제헌 국회의원/경상남도)] [[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분류:1897년 출생]][[분류:연제구 출신 인물]][[분류:남평 문씨]][[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소련/인물]][[분류:대한민국의 남성 기자]][[분류:조선민족청년단 국회의원]][[분류:제헌 국회의원]][[분류:기자 출신 정치인]][[분류:이승만 정부/인사]][[분류:경상남도지사]][[분류:197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