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일본 황후)] [include(틀:내정)]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F001F 0%, #bd0029 20%, #bd0029 80%, #AF001F)" '''{{{#dca600 [[일본 황후|{{{#dca600 아키히토의 황후}}}]][br]{{{+1 미치코}}}[br]美智子}}}'''}}}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mpressMichikoOfJapan.jpg|width=100%]]}}} || ||<|2> '''출생''' ||[[1934년]] [[10월 20일]] ([age(1934-10-20)]세) || ||<#fff,#1f2023>[[도쿄시]] [[분쿄구]]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대학병원|부속병원]] || || '''출신''' ||[[도쿄도]] [[시나가와구]] 히가시고탄다 || || '''즉위''' ||[[1990년]] [[11월 12일]] (도쿄 [[고쿄]]) || ||<|4> '''재위기간''' ||황후 || ||[[1989년]] [[1월 7일]] ~ [[2019년]] [[4월 30일]] || ||상황후 || ||[[2019년]] [[5월 1일]] ~ 현재 || ||<-2><#fff,#1f2023>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이름''' ||[ruby(美, ruby=み)][ruby(智, ruby=ち)][ruby(子, ruby=こ)](미치코)[* 혼인 전 이름은 쇼다 미치코(正田 美智子). 이름 ’미치코‘는 시할머니 [[데이메이 황후]]의 조카손녀 카야 도시코(賀陽梅子)의 딸 미치코와 동명으로, 한자까지 같다.] || || '''신장''' ||161cm || || '''부모''' ||부친 쇼다 히데사부로(正田 英三郞) ^^[[1903년]] ~ [[1999년]] (향년 96세)^^ [br]모친 쇼다 후미코(正田 富美子) ^^[[1909년]] ~ [[1988년]] (향년 79세)^^ || || '''형제''' ||오빠 쇼다 이와오(正田 巌) ^^[[1931년]] ~ '''(92세)'''^^[br]여동생 안자이 에미코(安西 恵美子)[* 결혼 전 이름은 쇼다 에미코. 안자이 가문의 다카유키와 결혼했다. 안자이 가는 전후 경제계에서도 손꼽히는 규벌을 구축한 명문가로 [[스미토모 그룹|스미토모 재벌]], [[사토 에이사쿠]] 가문, [[미키 다케오]] 가문과도 연결된다. ] [br]남동생 쇼다 오사무(正田 修) ^^[[1942년]] ~ (81세)^^ || || '''배우자''' ||[[아키히토|아키히토 상황]] ^^[[1933년]] [[12월 23일]] ~ ([age(1933-12-23)]세)^^ || || '''자녀''' ||2남 1녀[br][[나루히토|나루히토 덴노]] ^^[[1960년]] [[2월 23일]] ~ ([age(1960-02-23)]세)^^ [[후미히토|후미히토 친왕]] ^^[[1965년]] [[11월 30일]] ~ ([age(1965-11-30)]세)^^ [[구로다 사야코]] ^^[[1969년]] [[4월 18일]] ~ ([age(1969-04-18)]세)^^ || || '''학력'''[*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쭉 [[가톨릭]] [[미션스쿨]]이다.] ||덴엔초후 후타바 여학원 유치원 {{{-2 (수료)}}}[br]덴엔초후 후타바 여학원 초등과 {{{-2 (졸업)}}}[br][[세이신 여학원]] 중등과 {{{-2 (졸업)}}}[br]세이신 여학원 고등과 {{{-2 (졸업)}}}[br][[세이신여자대학]] {{{-2 ([[영어영문학과|영문과]] / 학사)}}} || || '''종교''' ||[[가톨릭]] → [[신토]][* [[일본 황실]]의 일원이 되면서 개종한 것으로 추정된다.] || || '''십이지''' ||[[개띠]] (갑술년) || || '''오시루시'''[*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 주로 식물이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 ||[[자작나무]]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6fc0f1e2278c3b47acb1cd441ff31edc.webp|width=100%]]}}} || || '''[[쥬니히토에|{{{#dca600 쥬니히토에(十二単)}}}]]를 입은 미치코 상황후''' || [목차] [clearfix] == 개요 == [[아키히토]] [[태상황|상황]]의 아내로 현 일본의 [[태상황후|상황후]]. 또한 '''[[일본]] 최초 [[평민]] 출신 [[황후]]이기도 하다.'''[* 반대로 시어머니 [[고준 황후]]는 마지막 [[황족]] 출신 황후가 되었다.] 사실 후술하겠지만 말이 평민이지 당시 일본에서 손꼽히던 [[재벌|재벌가]]의 딸이고, 외가는 [[백작]] 가문이다. [[평민]]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될 수 있는 분위기와는 다분히 거리가 먼, 명백한 [[상류층]]의 일원이었던 것. 물론 반대로 말하면 모계는 [[고셋케]]는 아니지만 [[화족]] 혈통이고, 부계도 재벌가였으니 황태자비 후보가 됐다는 것이다. [[쇼와 덴노]]와 [[고준 황후]]의 큰며느리이며, [[나루히토]], [[후미히토]], [[구로다 사야코]]의 모후, [[마사코 황후]]와 [[키코 비]]의 시어머니이자, [[아이코 공주]], [[코무로 마코]], [[카코 공주]], [[히사히토]]의 친할머니이기도 하다. [[2019년]] [[5월 1일]], [[아키히토]]가 '''상황(上皇)'''으로 물러나면서 미치코 황후 역시 [[황실전범]]에 따라 [[태상황후|'''상황후(上皇后)''']]가 되었다. == 생애 == === [[/결혼 전|결혼 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미치코 상황후/결혼 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미치코 황후/m5.jpg|width=100%]]}}} || || 1959년 1월, 결혼을 3개월 앞두고서 친정에서 코[[후리소데]] 차림으로 포즈를 취한 미치코 || '''당시 [[아시아]] 최대의 제분회사'''였던 닛신(日清) 제분[* 구 [[대선제분]] 영등포공장 건물이 [[일제강점기]] 때 이 회사 공장이었다.]의 사장인 아버지와 '''구 [[화족]]([[백작]])가문 소에지마(副島) 일족'''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벌|재벌가]] [[영애]]로, 가족들의 아낌없는 사랑과 비호 아래 곱게 자랐다. 이외에도 미치코는 [[공부]], [[운동]], [[요리]], [[음악]], [[미술]] 등등 못 하는 것이 없는 [[엄친딸]]이자 [[모범생]]이였으며, 이렇게 미모에 재색까지 겸비했던 그녀는 가정과 학교에서 두루 사랑받았다. === 결혼 후 === || [[파일:B2EE6014-6C20-48D5-BD6A-9E1F6E9638C3.jpg|width=100%]] || || 1960년, [[아키히토]] 황태자와 함께 아들 [[나루히토]]를 바라보고 있는 미치코 황태자비. || 미치코 황태자비는 [[결혼]]한지 열달만에 첫 아들 [[나루히토]]를 낳았다. 그녀는 [[고쿄]] 내의 산전(産殿) 대신 [[궁내청]] 병원에서 [[출산]]했는데, 당시 시민들은 [[고쿄]] 앞 정원에 모여들어 궁내청 병원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기도]]까지 했다. 취재하러 온 [[기자]]들은 [[친왕]]이 탄생했다는 [[궁내청]]의 발표를 듣자마자 뛰어나가 이 소식을 연일 집중 보도했으며, 왕자가 태어났다는 사실은 작년에 있던 두 사람의 [[결혼식]] 못지 않게 [[일본]] 열도를 흥분시켰다. 시아버지 [[쇼와 덴노]]도 [[장손]]의 탄생에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그녀는 혹독한 시집살이를 당하면서도 황실 생활의 여러 면에서 천년 동안 전해져 온 '''전통을 깨고 파격적인 면모''', 즉 평범하며 가정적이고 인간적인 행보를 많이 보였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의 품에서 떼어내 신하들에게 양육을 맡기는 전통을 깨고 아이를 직접 자신의 품에서 젖을 먹여 길렀다.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도 직접 [[모유]] 수유를 했지만 [[유모]]도 두었다. 하지만 미치코 황태자비는 아예 유모를 두지 않고, 직접 수유하다가 모유가 부족하면 [[분유]]를 먹였다고. 결혼 전 연애하던 시절, 쇼다 미치코는 [[아키히토]] 황태자로부터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들었다. "황실의 전통에 따라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품에서 떨어져 자라났고,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음식[* [[쇼와 덴노]], [[고준 황후]], 그들의 2남 5녀가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주말]]뿐이었다. 고준 황후는 큰아들 [[아키히토]] 황태자가 좋아하는 [[두부]] 요리를 직접 만들기도 했지만, 아키히토 황태자가 이 음식을 직접 먹은 적은 없다고 한다.]을 먹은 적도 없다."하는 말을 듣고 미치코는 아키히토 황태자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그래서 미치코는 따뜻하고 단란한 가정, 보통 사람들의 평범하고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가정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혼 전부터도 미치코는 "결혼하면 아키히토 황태자에게 손수 [[카레라이스]] 요리를 해주고 싶다." 말했다고 한다. || [[파일:745D81C9-0C79-4357-BA61-286EB4102630.jpg|width=100%]] || || 1961년, [[아카사카 어소]]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손수 [[요리]]를 하는 미치코 황태자비 || 미치코 황태자비는 자녀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미국]]의 [[소아과]] [[의사]]인 [[벤저민 스포크]] 박사의 저서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를 [[영어]] [[원서]][* 미치코 황후는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영어회화도 잘 했다고. 1993년 [[뉴델리]]에서 열린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 제26차 총회에 전달한 영상메시지에서 영어로 기조연설을 하기도 했다.]로 읽으며 [[육아]]에 대해 공부하여 나름의 육아 지침을 세웠다. 공무(公務) 때문에 시종에게 아이를 맡길 때면 이 지침대로 돌보게 했다. 이는 '''나루 짱[* 맏이 [[나루히토]] 황태자의 이름에서 딴 것.] 헌법(ナルちゃん憲法)'''이라고 불리며 많은 [[일본]] 부모들의 공감을 샀으며,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는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에서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 훗날 차남 부부가 낳은 두 손녀 [[코무로 마코]]와 [[카코 공주]]도 '나루 짱 헌법'에 따라 양육되었다. || [[파일:external/68a822ec476a557085fad706a764ba63161e8e049a0935c074c40720f001b84e.jpg|width=100%]]|| || 1971년 10월, 만 37세 생일을 며칠 앞둔 미치코 황태자비 || === [[/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미치코 상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결혼 전의 쇼다 미치코는 그야말로 팔방미인이였고, 이는 '[[일본 황실]] 최초의 [[평민]] 출신이자 미래의 [[황후]]'가 되어 전 일본 여성들의 부러움까지 한몸에 받으면서 결실을 맺은듯 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달랐으며,''' 이는 '''평생 마음고생이 보장된 가시밭길의 시작이였다.''' 시어머니 [[고준 황후]]는 [[아키히토|아들]]을 빼앗겼다는 생각 때문인지,[* [[히로히토]]가 [[천황]]이었을 당시의 [[일본]] 사회는 자식을 부모가 소유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대였다.(1960년대의 [[한국]]도 비슷했다.) 게다가 [[아키히토]]는 [[고준 황후]]가 딸만 넷 낳다가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아키히토가 태어나기 전까지 고준 황후는 딸만 낳는다고 엄청난 압박과 비난을 받았고, 심지어 [[후궁]] 제도를 부활하는 것까지 심각하게 거론되곤 했다. 실제로 신하들이 후궁 후보로 몇몇 규수들을 정하여 [[쇼와 덴노]]에게 규수들의 사진까지 제출했다. 그러나 쇼와 덴노가 후궁 들이는 것을 매우 거부하여 실현되지는 못했다고. 후에 두 아들 [[아키히토]]와 [[마사히토]]가 태어나, 간신히 후궁 제도의 부활 여론이 잠잠해졌다.] 아니면 딸들의 불행한 삶과 죽음에 대한 화풀이였는지,[* [[쇼와 덴노]]와 [[고준 황후]]의 장녀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패전 후 [[신적강하]]로 황족의 신분을 잃고 고생하다 병을 얻어 어린 3남 2녀를 두고 요절했고, 차녀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는 생후 6개월에 요절했다. 3녀 [[다카쓰카사 가즈코]]와 4녀 [[이케다 아츠코]]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가즈코의 남편 다카쓰카사 도시미치(鷹司平通)는 [[간통]]하다가 불륜녀와 함께 죽었고, [[과부]]가 된 가즈코는 [[강도죄|강도]]에게 부상까지 당했다. 아츠코도 [[부부]] 관계가 역시 원만하지 못했고, 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다. 단지 막내딸 [[시마즈 타카코]]만이 유일하게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냈다. 차남 [[마사히토]] 친왕은 조용히 살고 있지만, 어릴 적 앓은 [[소아마비]]로 자녀를 낳지 못했다.] '''정말 죽기 직전까지도 계속 큰며느리 미치코 상황후를 인정하지 않고 괴롭혔다.''' == 남편 [[아키히토]]와의 관계 == || [[파일:crown princess michiko2.jpg|width=100%]] || ||[[파일:external/www.laura.jp/1c572536.jpg|width=100%]] ||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마운트배튼|에든버러 공작]]처럼, 남편 [[아키히토]] 상황과는 금슬이 좋기로 유명하다. 황실에서 [[시집살이]]하면서 온갖 푸대접을 받았음에도 남편을 내조했다는 점에서도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황실에 시집와서 모든 걸 잃었던 미치코 황후에게 있어 늘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마음씨 좋은 남편이 의지할 수 있는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함께 공무하는 영상이나 사진을 보면 서로를 자연스럽게 바라보면서 짓는 미소가 잘 어울린다.[* 둘째 며느리인 [[키코 비]]가 굉장히 억지스럽고 기괴한 웃음을 짓는 것과 대비된다는 평이 많다. 키코 비도 젊은 시절에는 미소가 예뻤으나 갈수록 남편과 사이가 멀어지고 자녀 교육과 공무에도 치이는데도 대외적으로 웃는 모습을 보여야하는 탓에 지금 모습이 되었다.] 이는 현재 천황인 장남 부부 [[나루히토]]와 [[마사코 황후]]의 사이에서도 잘 나타난다. || [[파일:attachment/미치코 황후/old3.jpg|width=100%]] || [[테니스]]를 통해서 처음 만난 것 때문인지, 지금도 남편 [[아키히토]] 상황과 [[테니스]]를 치기도 한다. == 가족 == === 황실 가계도 === [include(틀:일본 황실 가계도)] === 자녀 === * 장남 [[나루히토]] 천황: 1960년 2월 23일 출생([age(1960-02-23)]세). 1993년 6월 9일 외교관 [[마사코 황후|오와다 마사코]]와 결혼, 2001년 12월 1일 [[아이코 공주]]를 낳았다. * 차남 [[후미히토]] 친왕: 1965년 11월 30일 출생([age(1965-11-30)]세). 1990년 6월 29일, [[가쿠슈인대학]]에서 [[캠퍼스 커플]]로 만난 1년 후배 [[가와시마 키코]]와 결혼하여 2녀 1남을 낳았다. 자세한 사항은 [[후미히토]] 항목을 참조. * 장녀 [[구로다 사야코]]: 1969년 4월 18일 출생([age(1969-04-18)]세). 2005년 11월 15일,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의 오랜 친구이자 [[도쿄]]도청 직원인 구로다 요시키와 결혼했다. 결혼 후 황족의 신분을 잃고, 남편을 따라 평민이 되었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엔 칭호나 휘(이름)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애칭]]으로 불렀다. [[나루히토|나루히토 황태자]]는 휘 '나루히토'의 앞글자 '나루', [[후미히토|후미히토 친왕]]은 칭호 '아야노미야'의 앞글자 '아야', [[사야코 공주]]는 이름 '사야코'의 앞글자 '사야'라고 했다. 이제 [[일본]]에 [[화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2남 1녀 모두 일반인과 결혼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의 화족들은 [[신적강하]]로 공식적으로 지위가 무효화되었기에, 현대 일본에 화족은 사실상 없다. 그런데도 1959년 쇼다 미치코가 황실로 시집올 때 옛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그 난리를 떨었으니,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 남편 아키히토의 양위 == 2016년 8월부터 [[아키히토]] 덴노의 양위가 거론되고 있다. 미치코 황후 역시 이에 대해 찬성이며, 두 아들([[나루히토]], [[후미히토]])과 상의하고 있다고 한다. 2017년 6월 9일 [[일본 국회]]에서 "천황의 양위 등에 관한 [[황실전범]]특례법"이 통과되었는데, 양위 후 아키히토의 칭호가 과거의 태상천황을 줄인 상황이 아니라 그냥 '''상황(上皇)'''으로 결정됨에 따라, 미치코 본인의 칭호는 '''[[태상황후|상황후(上皇后)]]'''가 되었다. 만약 아키히토가 미치코보다 먼저 서거한다면 그 때부터 '''미치코 황태후'''로 불릴 수도 있다. 2019년 6월 13일자로 사실상 생전퇴위 관련 공식일정이 끝났다. 미치코 상황후는 6월 중에 [[백내장]] 수술이 예정되었다. 현재 [[심장]]에도 문제가 있다 보니, 최대한 신경쓰면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고쿄]]에서 임시 거처로 이사할 준비를 할 것으로 보인다. 양위 이후, "미치코 상황후는 [[백내장]] 이외에도 여러가지 방면에서의 건강 상태가 계속해서 안 좋아졌다"는 보도들이 나왔다. 결국 8월 9일, [[궁내청]]은 "미치코 상황후가 초기 [[유방암]]으로 확정[* 7월 12일 건강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되어 15일 [[도쿄대학]]병원에서 [[MRI]]를 찍어보니 이상이 확실시되었고, 이후 8월 2일 [[궁내청]] 병원에서 조직검사를 한 결과 [[유방암]] 초기임이 확정되었다고 한다.]되어 9월 중 수술을 받을 예정"이라고 발표한다. 유방암 발표 전에 "상황/상황후가 7월 말 요양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월에 다시 요양을 할 것"이라는 궁내청 발표가 있었는데, 아마 수술 후 휴양을 가는 것으로 보였다. 9월 7일, 미치코 상황후는 [[도쿄대학]]병원에 입원하여 다음날인 8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약 4시간 정도 수술을 받았는데, 한동안 입원할 예정이라고 밝혀졌다. 이에 남편 [[아키히토]] 상황과 딸 [[구로다 사야코]]가 병원에 방문해, 미치코 상황후가 수술실로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수술을 잘 마치고 9월 11일에 퇴원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작은며느리 [[키코 비]]의 53세 생일이기도 해서 바로 오후에 키코 비의 생일기념행사에도 참석하였다. 2019년 10월 주간지 보도에 의하면, 막대한 양의 이삿짐을 정리하는 건 미치코 상황후 혼자라고 한다. 아무리 초기 암이라 호르몬 치료로 다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연달은 수술로 건강이 안 좋아진 상태에서 약 120톤에 달하는 막대한 양의 짐을 혼자서 정리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시종들이 도우려고 하지만, 미치코 상황후는 혼자서 하겠다고 도움을 사양하고 있다. 덕분에 미치코 상황후는 아침 일찍 기상해서 밤 늦게까지 혼자서 짐 정리에 몰두한다고 한다. 2019년 10월 15일, [[궁내청]]에서 미치코 상황후의 생일 행사에 대해 발표했다. 미치코 상황후는 10월 20일에 85세 생일을 맞이한다. 하지만 생일축하행사는 대폭 간소화되었다. 태풍 19호의 영향도 있고, 생일 2일 후인 10월 22일에 열리는 큰아들 [[나루히토]] 덴노의 즉위 행사에 지장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부분 행사들을 취소하고, 대신 간단히 가족들과 식사하는 것으로 대체했다고 한다. 2019년 10월 한 주간지 보도에 의하면, 미치코 상황후는 작은며느리 [[키코 비]]로부터 [[인터넷]] 사용법을 배워, 인터넷으로 [[일본 황실]] 관련 뉴스를 보고 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미테코(ミテコ)'라는 단어를 보고, 미치코 상황후는 시종들에게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다. 시종들은 '미테코'라는 단어가 미치코 상황후를 비하하는 용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차마 사실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그냥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회피했다. 그러나 미치코 상황후는 시종들의 그러한 태도에서 눈치를 챈 듯하다고 한다. 2019년 10월 23일, 큰아들 [[나루히토]] 덴노의 즉위 축하 궁중차회에 남편 [[아키히토]] 상황과 참석하여 미치코 상황후가 직접 큰며느리 [[마사코 황후]]를 대외 귀빈들에게 소개시켜줄 예정이라고 하였다. 원래 이때 미치코 상황후가 노래도 부르려고 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취소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날은 맏손주 [[마코 공주]]의 28세 생일이기도 했다. == [[미치코 상황후/루머|루머]]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미치코 상황후/루머)] == 여담 == * 예비 황태자비 시절, 외국에서도 상당히 큰 화재였는지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다. 1959년 3월 23일자 호. [[파일:michiko shoda time.jpg|width=175]] * 남편 [[아키히토]] 덴노가 생전 퇴위 의사를 내비친 대국민 영상 메시지를 발표하기 전에 두 아들([[나루히토]], [[후미히토]])과 상의했다고 밝혔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08765540|#]] * 황후가 된 후로는 이미지가 무척 좋지만, [[황태자비]] 시절에는 지금의 며느리들([[마사코 황후]], [[키코 비]])처럼 이미지가 무척 안 좋았다. 상술했던 내용처럼 [[나루히토]] 친왕이 [[아키히토]] 덴노의 아들이 아니라거나, 미치코 황후가 시집오자마자 첫째 시누이 [[히가시쿠니 시게코]]가 죽은 것을 두고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라고 어처구니 없는 비난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그리고 지금의 며느리들처럼 아랫동서 [[히타치노미야 하나코 비]][* 평민 출신인 형님 미치코 황후와 달리, 옛 [[화족]] 가문 출신이다. 평민 출신의 큰며느리를 미워한 [[고준 황후]]가, 작은며느리는 화족 가문 출신으로 직접 고른 것이다. 단 [[하나코 비]]는 (남편 [[마사히토]] 친왕의 문제로) 아이를 낳지 못했다.]와의 신경전도 꽤 구설수에 올랐다고 한다.[* 미치코 황후가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중상을 일체 비난하는 일 없이 침묵을 지키는 기품 있는 자세를 보여주자, 많은 [[일본인]]들이 감명을 받았다. 덕분에 주간지 등의 비방 기사가 종식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지가 무척 좋은 걸 보면, [[마사코 황후|마사코 황태자비]]가 황후가 되거나, [[히사히토]] 친왕이 덴노가 되어 [[키코 비]]가 덴노의 어머니가 된다면 이들의 이미지도 바뀔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재 [[마사코 황후|마사코 황태자비]]는 시이버지 [[아키히토]] 덴노의 생전퇴위 발언과 딸 [[아이코 공주]]의 우수한 성적을 기점으로 이미지가 점차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2019년 5월 1일자로 황후가 된 지금 부정적 시선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이미지가 180도 달라졌다. * 미치코 황태자비는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인 나시모토 이츠코의 여동생. 즉 이방자 비의 이모가 된다. 또한 노부코는 [[다이쇼 덴노]]의 차남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장모이자, [[가쿠슈인]] 동창회장을 지내는 등,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황족들과 [[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했다.],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 평민 출신인 쇼다 미치코가 황실로 시집온다는 사실에 몹시 분개하여, "이제 [[일본]]도 다 끝나 버렸구나!!"라는 글까지 남겼다.] 등 옛 황족&화족 부인들로부터 일거수일투족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비난을 받았다. 또한 당시 20세기 후반에 세계 각국의 왕실제도가 혁명으로 무너져, 결혼식 퍼레이드 즈음에도 폭도가 마차를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https://youtu.be/JPIBGRwRDx0|마차습격 장면이 찍힌 퍼레이드 영상.]](1분 4초 경) 이때 미치코 황후는 깜짝 놀라 쓰러지듯 몸을 움츠리며, 마차의 마부들과 경호원 및 경관들이 황태자 부부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며 폭도를 떨어뜨려 놓는다. 여담으로 마차를 습격한 폭도는 19살의 청년으로 평소 천황제에 반대해왔고, "황족의 결혼식에 3억엔에 가까운 세금을 쓰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불경죄 같은 건 패전 이후 법에서 삭제되었기 때문에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구류 50일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지만, 근왕의식이 잔존하던 당시 [[일본]]의 사회 분위기 탓에 누나가 파혼당하고 형이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등의 불이익을 받았다고 한다.] 고난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미치코 황태자비는 당시 측근인 쿠로키 동궁시종에게 "어떠한 때라도 [[황태자비]]로서 의무를 최우선으로 하고, 개인적인 일은 그에 다음하는 것"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아키히토]] 황태자의 내조에 최선을 다했다. 1984년(쇼와 59년) 은혼식인 결혼 25주년 회견에서, "[[부부]]로서 서로 몇 점을 매기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아키히토]] 황태자는 "점수를 매길 순 없지만 노력상이라는 걸로"라는 대답을 했고, 미치코 황태자비는 "나도 매겨 드린다면 점수는 없고 감사장을"이라고 답해, 기자들이 감탄했다. 사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을 생각하면 잘 맞는 대답이다. * 목소리가 매우 곱고 부드럽다. [[https://youtu.be/B7FuabF-01M?t=3m53s|1993년 큰아들 나루히토 황태자의 결혼식 영상]]의 댓글들을 보면 알겠지만(3분 53초 경), 미치코 황후의 아름답고 자애로운 목소리에 외국인들도 감탄할 정도. 다만 이후 4개월 뒤 실어증에 걸렸다는 걸 생각하면… 장남인 [[나루히토]] 황태자 또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남성치고는 목소리 톤이 부드럽다. * 어머니 후미코는 1988년에, 아버지 히데사부로는 1999년 사망으로, 시부모들보다 1년 일찍 사망하였다. 정확히는 [[쇼와 덴노]] 사망 1년 전에 후미코가, [[고준 황후]]의 사망 1년 전에 히데사부로가 사망한 것. 황실에서는 친정 부모들의 제삿날에도 친정에 못 가게 했다고 한다. 아버지 히데사부로가 사망하고 나온 어마어마한 유산을 장녀로서 받아야 했지만 상속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일반인이 아니라 황족이기 때문"이라며 거절했다고.[* 물려받은 유산은 미치코 황후의 친정인 쇼다 가문의 소유이기 때문에, 황실비처럼 황실로 흡수되지 않고 사인 대 사인으로 상속되었을 자산이어서 미치코 황후 개인의 재산이 된다고 한다. 만약 유산상속을 받았더라면 [[영국]]의 [[다이애나 스펜서]] 왕세자비처럼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친정 스펜서 백작가문의 재산은, 다이애나의 두 아들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자]]가 물려받게 되었다.)] 히데사부로가 사망한 후 닛신제분은 남동생 오사무가 물려받아 이어지고 있다. *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40대 이후로 [[눈썹]]의 위치가 이마 쪽으로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보가 보도된 바 없지만, 눈꺼풀이 늘어지는 질병인 안검하수, 혹은 경추성신경근증 등의 질병을 원인으로 추측하는 시각도 있는 모양.[[https://okboook.com/mitikosama/|#]] [[https://buzzlog.net/archives/9481#i-3|#]] 어찌되었든 이로 인해 나이가 더 들어보이게 되었다. 실제로 40대부터 눈에 띄게 급노화가 진행되었다. 혹독한 시집살이로 인해, 일찍부터 나이보다 심하게 늙어버린 것이다. * [[마사코 황후]]와 [[키코 비]]가 황실로 시집왔을 당시, 각각 [[루비]] 반지와 [[진주]] 반지를 선물했다. [[분류:1934년 출생]][[분류:분쿄구 출신 인물]][[분류:일본 황후]][[분류:세이신여자대학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