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소련군/원수)] [include(틀:역대 소련군 총참모장)]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40000, #D40000 20%, #D40000 80%, #a40000)" '''{{{#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4대 노농적군 사령관[br]{{{+1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투하쳅스키}}}[br]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Тухаче́вский[br]Mikhail Nikolayevich Tukhachevsky}}}'''}}}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미하일 투하쳅스키 컬러.jpg|width=100%]]}}} || ||<|2> '''{{{#ffe400,#ffe300 출생}}}''' ||[[1893년]] [[2월 16일]]|| ||[[러시아 제국]] [[스몰렌스크주|스몰렌스크현]] 도고로부지스키군 알렉산드롭스코예[br](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스몰렌스크주]] 사포놉스키군 슬레드네보)|| ||<|2> '''사망''' ||[[1937년]] [[6월 12일]] (향년 44세)|| ||[[소련]]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SFSR]] [[모스크바]]|| ||<|2> '''재임기간''' ||제4대 노농적군 사령관|| ||[[1925년]] [[11월]] ~ [[1928년]] [[5월]]||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부모''' ||[[아버지]]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투하쳅스키[br][[어머니]] 마브라 페트로브나 밀로호바 || || '''형제자매''' ||니콜라이, 알렉산드르, 엘리자베타, 올가, 마리아, 소피아, 나탈리아[* 유일하게 연좌제에서 살아남은 인물.] || || '''배우자''' ||마리아 블라디미로브나 이그나티예바 {{{-2 (사별)}}}[br]니나 예브게니예브나 투하체스카야 {{{-2 (두 번째 재혼)}}} || || '''자녀''' ||장녀 스베틀라나 투하체스카야 ^^(1922년 ~)^^[br]차녀 이리나 투하체스카야 || || '''소속 정당''' ||[include(틀:소련 공산당)] || ||<|4> '''복무''' ||[[러시아 제국군|러시아 제국 육군]] || ||[[1914년]] ~ [[1917년]] || ||[[소련 육군|소비에트 지상군]] || ||[[1922년]] ~ [[1937년]] || || '''최종 계급''' ||[[소위]] {{{-2 (러시아 제국 육군)}}}[br][[원수(계급)|원수]] {{{-2 (소비에트 지상군)}}} || ||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br][[러시아 내전]][br][[소비에트-폴란드 전쟁]] || || '''주요 서훈''' ||[[적기훈장]] 1회[br][[레닌훈장]] 1회 ||}}}}}}}}} || [목차] [clearfix] == 개요 == [[소련]]의 군인이자 소련군 원수. [[제1차 세계 대전]]에는 러시아 제국 장교로, [[러시아 내전]]에는 붉은 군대 지휘관으로 참전하였으며, 이후 [[소련군]]의 현대화를 추진하다가 [[대숙청]] 때 처형당했다. == 생애 == 몰락 [[귀족]] 출신으로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근위부대에 입대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성 게오르기 [[훈장(상훈)|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1915년]] 독일군에 포로로 생포되었고, 이때 같은 협상국인 프랑스군 대위였던 [[샤를 드골]]을 알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포로에 대한 대우는 매우 신사적이어서 이 둘은 상당히 편히 지냈지만, 그래도 둘 다 탈출을 시도하여 몇번 실패하였다. 실패할 때마다 장기간 독방신세가 되었지만 이런 처지에서 서로 격려했다고. 투하쳅스키는 [[1917년]] [[8월]] 끝내 --드골을 놔두고-- 탈출에 성공하여 돌아왔다. || [[파일:external/www.pseudology.org/tukhachevsky_mn.jpg|width=40%]] || || 내전 당시 사진. 뾰족모자는 [[세묜 부됸니]] 원수의 이름을 따서 부됸노프카라고 불리며 초창기 붉은 군대의 상징과 같은 모자다. 후에 보온 성능 문제 등 다양한 이유로 인해 [[우샨카]]로 대체되었다. ||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혁명으로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러시아 공화국|공화국 임시정부]]가 들어섰으나 [[러시아군]]은 거의 해체상태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여 인심을 잃었다. 이를 틈타 [[1917년]] 10월(그레고리력으로는 11월) 볼셰비키는 [[쿠데타]]를 일으켜 임시정부를 전복하고 세계 최초의 공산국가를 세웠다([[10월 혁명]]). 그렇지만 각지에서 공산정권에 반대하는 반혁명군이 일어났고, 공산정부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게다가 그동안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분리독립을 시도한 소수민족들과 이들을 진압하려는 공산정부 간의 전쟁도 벌어졌고, 협상국은 [[독일 제국|독일]]과 단독강화를 맺으려던 공산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무장개입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 내전]]. 다른 귀족 출신 장교들은 대체로 반혁명군을 지지했으나, 투하쳅스키는 의외로 공산정부를 지지하여 볼셰비키당에 가입했고, 곧 [[소련군|붉은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초창기에 붉은 군대는 정규군사교육을 받은 자가 드물었고,[* 다만 후에 국방장관 [[레프 트로츠키]]가 대거 러시아 제국군 장교들을 영입하여 붉은 군대 수뇌부는 러시아 제국군 출신들이 주류가 된다.] 그래서 그는 24세의 나이로 [[군단장]]급의 사령관이 되었다.[* 나폴레옹도 [[프랑스 혁명]] 직후 군에서 장군 상당수가 목이 날아간 상태라 능력을 보이자 초고속 승진, 25세에 대장이 되었다.] 투하쳅스키는 [[모스크바]] 방위사령관, 제5군 사령관을 차례로 맡아 드넓은 러시아를 누비며 각지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이 공적으로 붉은 군대의 최고위급에 올랐다. 이때 그의 활약이 눈부셔서 이후 "붉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사이가 나빴던 [[이오시프 스탈린]]조차도 그를 "작은 나폴레옹"이라고 불렀을 정도.[* 단, 이 부분은 [[러시아 혁명]] 직후의 소련에서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이 칭찬보다는 경계나 거부감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프랑스 혁명]]을 중요한 전범(典範)으로 삼았고, 따라서 나폴레옹은 영웅이나 위인이 아니라 혁명을 배신하고 군사독재, 더 나아가 제정시대를 연 '유능하지만 부정적인'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 따라서 유능한, 특히 군사적인 측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인물을 '나폴레옹'이나 '보나파르트'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 인물의 재능을 높게 평가하는 동시에 군사적으로 혁명정부를 배신하여 무너트리고 독재자로 등극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의 표현이기도 했다고 봐야 한다. 당시 소련 내에서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겸 육해군 최고인민위원으로 [[러시아 내전]]을 지휘했던 [[레프 트로츠키]]같은 인물도 '군사적 보나파르트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으며 이것이 카메네프나 지노비예프 등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트로츠키가 아닌 스탈린을 지지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는 것이나 한참 시간이 흐른 일본의 좌파 학생운동권 내애서도 '보나파(보나파르티즘)하지 말라'는 표현이 '독단적으로 굴지 말라'(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잘난척하지 말라)는 의미로 쓰였음도 참고하자.] [[1920년]] 4월 말에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폴란드 전선]]의 주력인 서부전선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군을 몰아냈다. 이후 투하쳅스키는 폴란드군을 수도 [[바르샤바]]까지 밀어붙였다. 그렇지만 쾌진격을 거듭하다 [[공세종말점]]을 넘어선 [[붉은 군대]]는 [[바르샤바 전투(1920년)|바르샤바 전투]]에서 [[폴란드군]]에게 취약한 남측방을 강타당한 뒤 포위섬멸됐고, 이때 [[http://pkka1918.egloos.com/m/1194307|패배의 원인]]을 둘러싸고 [[정치장교]]인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과 사이가 엄청나게 나빠졌다. 이 점이 후에 [[대숙청]]의 구실이 되었다. 사실 바르샤바 전투의 대패는 전선 한참 후방의 민스크에 눌러앉은 채 비현실적인 낙관론에 취해 바르샤바 공격을 밀어붙인 투하쳅스키의 지휘책임이라는 게 오늘날의 평가다. 투하쳅스키는 폴란드로 완벽하게 기운 전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번 더 공세를 계획했다가 [[네만 강 전투]]에서 서부전선군의 잔여병력마저 날려먹었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 투하쳅스키는 붉은 군대의 [[총참모장]]이 되어 구태의연한 오합지졸의 의용군을 전문적인 직업장교 하의 현대적인 군대로 탈바꿈시키려고 하였다. 특히 [[전차]]를 비롯한 [[기갑]]부대와 [[공군]]을 육성하는데 큰 역점을 주었다. 더불어 그 주제와 관련된 여러 책을 써냈고, 이는 소련군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종심작전]] 이론도 이 당시 그와 붉은 군대의 여러 전략전술 전문가들이 창안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급진적인 생각이 "붉은 군국주의"로서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세묜 부됸니]]와 같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장교들의 반대를 받았기에 그는 총참모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이들이 그때까지도 기병을 고집하는 구태 장교라는 오해가 널리 퍼져 있는데, 그들도 기병이 시대에 뒤처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며 보로실로프는 최대한 군의 기계화를 지원했다. 투하쳅스키가 비판받은 점은 원수씩이나 되는 인물이 당시 소련의 국력으로는 불가능한 수만대의 전차와 항공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그럼에도 군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똑같이 갖고 있었으며,[* [[겨울전쟁]]에서 [[https://panzerbear.blogspot.com/2015/12/blog-post_7.html|사후평가]] 중 [[바실리 추이코프]]와의 대화를 보면 스탈린은 현대전에 대해 세심함은 상당히 떨어져도 전체적인 통찰력은 갖추고 있던 인물이다.] 당시 막 기지개를 펴던 소련의 중공업들은 우선적으로 현대식 무기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소련은 당시 자본주의 국가들이 연합해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을 혁명 직후의 간섭전쟁(러시아 내전)처럼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경공업]]과 [[농업]]은 거의 팽개치고 [[중공업]]에만 집중 투자했다.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fcd4be7636a58aa3f56497eb8fc947bc.jpg|width=300]] || || 원수 시절 초창기의 초상화. || [[1935년]] 반혁명적이라고 폐지되었던 계급이 붉은 군대에 도입되어 그는 [[원수(계급)|원수]]가 되었고 이 해에 그는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의 서유럽을 방문하는데, 이것이 훗날 망명 중인 반정부 러시아인들을 만났다는 혐의를 받는 원인이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새롭게 집권한 [[나치 독일]]의 정보기관들이 공작을 벌여 허위문서를 소련 정보기관에 흘러가게 해서 혐의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 음모론에 따르면, [[OKH]]는 [[독소전쟁]]을 준비하기에 앞서 소련의 군사 이론가들과 장성 대다수를 스탈린이 스스로 숙청시키게 만들어 군사적 능력을 크게 파괴하고자 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미하일 투하쳅스키였다. 강경한 트로츠키 파벌임과 동시에 군사의 급진적 현대화와 거대화를 주장하며, [[종심돌파이론]]같은 세련된 군사이론을 만들기까지 하는 투하쳅스키는 OKH에게 있어 가장 위협적이면서 동시에 제거하기 쉬운 대상이었다. 독일은 투하쳅스키를 음해하는 각종 거짓 문서와 정보들을 소련 내로 흘려보냈고 스탈린도 이것들을 접했다. 원래부터 투하쳅스키를 고깝게 보던 스탈린은 그 출처가 분명하지 않음에도 이를 빌미로 투하쳅스키를 제거하고자 하였고, 결국 투하쳅스키는 '나치 독일의 스파이 및 군사적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명분으로 [[대숙청]] 때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오히려 독일 정보기관이 스탈린과 NKVD에 의해 이용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스탈린이 NKVD 요원인 니콜라이 스코블린에게 투하체프스키와 비롯한 몇몇 장군들이 반소련 음모를 꾸민다는 정황을 독일측에 노출시키도록 명령했고 이에 얼씨구나하고 낚인 독일 정보기관이 만들어 뿌린 거짓 증거물들을 입수해 숙청의 빌미로 사용했다는 것. || [[파일:external/incognita.day.kiev.ua/tyxa_s.jpg]] || || 1935년 11월 11일 촬영. || 아무튼 [[1937년]] [[5월 22일]] 그는 "나치 독일의 [[스파이]]"와 "군사적 트로츠키주의자 음모"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었고, 심한 고문을 받았다. 심문이 어느 정도로 가혹했는지 그가 남긴 자술서에는 선혈이 낭자할 정도였다고 한다. 1937년 [[6월 11일]]에 투하쳅스키는 다른 8명의 장군들과 함께 특별군사법정에서 판사들까지 겁에 질릴 정도로 가혹한 재판을 거친 후 밤 11시 35분에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 9명은 모두 '''사형 판결 1시간도 안 되어''' 처형되었다.[* 이렇게 상식 밖으로 빠른 속도로 처형이 가해진 이유는 소련의 국민들이 인기 있는 장군들과 전쟁 영웅들을 재판하는 것에 분노할 것이 두려워서 스탈린이 직접 이들을 재판 직후에 처형할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에게도 [[연좌제]]가 적용되어 부인과 형제들도 처형당했고 딸은 [[굴라크]]로 갔다. 그가 남긴 "[[소련군의 종심돌파이론|종심전투교리]]" 이론은 반혁명적이라고 폐기되었으나, [[독소전쟁]] 시기에 부활해 훗날 전쟁 후반 독일에 대한 반격작전의 교리가 되었다. [[1957년]]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인 후 그는 무죄로 복권되었다. 독일 측이 역공작으로 허위문서를 소련 정보기관에 흘러가게 해서 그에게 혐의가 씌워졌다는 설이 있으나,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문서를 보면 스탈린은 그 역공작 문서와는 관련없이 투하쳅스키를 숙청하려고 처음부터 작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평소에 자신의 솔직한 의견을 숨기는 성격이 아니었던 탓에 몇 차례 스탈린과 충돌했는데 이 때문에 일찌감치 숙청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1936년에 그는 [[바르바로사 작전|독일이 아무런 경고 없이 갑자기 공격해올 것이고]] 그로 인해서 [[독소전쟁|매우 오랫동안 큰 희생을 치르는 전투]]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이에 스탈린은 격노하여 "도대체 자네 지금 뭘 하자는 건가? 소련 정권을 위협하는 건가?" 라고 말했다고 한다.[* Overy, Richard, The Dictators: Hitler's Germany, Stalin's Russia.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2004.] 1986년 사망하는 그날까지 스탈린에게 충성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투하쳅스키의 숙청에 대해 "문제가 있었다면 도대체 어느 쪽에서 시작된 것인가? 그는 위험한 사람이었고 나는 상황이 악화될 경우, 그가 과연 전적으로 우리 편이 될 것인가 의심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는 우파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우익의 위험이 가장 중요한 위험 요소였다. 많은 우파들이 그 자신이 우파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파였다." 라고 평가했다.[* Resis, Albert, ed. Molotov Remembers: Inside Kremlin Politics. Chicago: Ivan R. Dee, 1993.] 비록 귀족 출신이었지만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에 참전하였다는 점을 봤을 때 그가 정말 우파였는지는 불분명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스탈린 시대의 "우파"는 당의 정치노선에 별 관심 없는 비정치적 군사 테크노크라트를 포함하는, 지금 보면 황당할 정도로 광범한 개념임을 이해해야 한다. 몰로토프의 "투하쳅스키 자신은 깨닫지 못했어도 그는 우파였다"는 회고 역시 같은 맥락이다. 스탈린은 계속해서 자신의 파벌이 아니면 온갖 누명을 씌워서 제거해왔고 나라가 무너져도 스탈린을 지지할 정도의 파벌이 아니면 같은 공산당원도 우파라 낙인찍는다고 증언한 것이다. || [[파일:attachment/tukha-3.jpg|width=300]] || || 흐루쇼프 시절 완전히 복권되어 우표 도안의 모델이 된 투하쳅스키. || 한편 실질적으로 붉은 군대를 건설한 [[레프 트로츠키]]는 소련이 망할 때까지 복권되지 못하였다. == 평가 == 최근에 투하쳅스키가 평범한 지휘관이며 그냥 가정법상에서나 능력이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겼지만,[* 예를 들어 구 제정 시절 벌어진 토벌전 등에서 범용한 작전을 쓰고도 별 성과를 못 올린 사례 등을 든다. 그러니까 그가 살아있었다면 독소전쟁의 양상이 바뀔 수도 있었다는 가정은 의미없다는 쪽으로 얘기.] 그의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던 것은 분명하다. 붉은 군대 초기 반혁명군의 공격으로 전선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그가 지휘관으로 우선적으로 투입되었으며, 전과를 놓고 봐도 폴란드와의 전쟁을 제외하면 대부분 승리했다. 게다가 내전 후반부에는 붉은 군대에도 전직 제정 러시아군 장성이나 영관급 인물들이 대거 입대하는데, 전쟁전 [[대위]]에 불과했던 그가 계속 사령관급으로 남아있었던 것은 유능하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전술가로서뿐만 아니라 군사이론가로도 뛰어났고, 세계 최초로 [[공수부대]]를 창안했다. 또한 그가 주장한 기갑부대와 공군 중시 정책, [[로켓]]무기 개발 등은 선구적인 것으로서 실로 몇 년 앞을 내다본 혜안이었다. 그가 숙청된 후에도 그 뒤를 이은 [[세묜 티모셴코]]가 이를 계속 추진하여 후에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승리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투하쳅스키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또한 금물인데, 투하쳅스키가 ''''선구적인 혜안''''을 가지고 있는 이론가라더라도, 그의 '''혜안'''을 실제로 실현시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소련은 당시 내전의 혼란에서 겨우 벗어난 상태의 가난한 2류국가였고 이 시점에서 소련의 공업력은 투하쳅스키의 선진적인 구상을 실현시키기엔 너무나도 부실했다. 예를 들어 투하쳅스키의 종심작전 교리의 핵심 중 하나는 탱크가 전선에 구멍을 내고 적군이 정신 못 차리는 와중에 재빨리 쏟아부을 수 있는 '''기계화되어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보병'''인데 실제로 [[독소전쟁]] 중 소련군이 이 정도 수준에 달한 것은 1943년 이후 [[지프]]로 대표되는 미국의 대규모 [[렌드리스]]와 소련 스스로의 군을 기계화시키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있은 후에야 가능했다. 그러나 독소전쟁 초반까지만 해도 소련이 막대한 기갑장비(성능은 차치하고서라도)를 보유하고 있다가 갈려나간 것을 본다면 투하쳅스키가 숙청되지 않았다면 상당히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만약이지만. 이런 대규모 공업화를 통한 군의 기계화는 아이러니하게도 투하쳅스키를 숙청한 스탈린이 [[니콜라이 부하린]]같은 반대파들을 모두 숙청해 가며 밀어붙인 [[중공업]]우선 정책으로 가능해졌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투하쳅스키가 [[러시아 내전]]에서는 괜찮은 지휘관이었다 하더라도, 마지막 실전인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중요한 패배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 역시 잊어서는 안된다. 전선 300마일 후방의 민스크에 앉아 있던 투하쳅스키는 신속한 바르샤바 점령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예비대도 없이 서부전선군 전 병력을 공세에 투입했다가 바르샤바 인근에서 취약한 남측방을 노출했고, 이를 놓치지 않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결정적인 역습을 가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때 주력부대 상당수가 포위섬멸당하면서 전투력이 거덜난 투하쳅스키 휘하의 서부전선군은 그 뒤로도 후방 전투근무지원부대까지 털리는 패퇴를 거듭하며 폴란드군에게 개전 초의 영광을 재현시켜주다가 결국 전쟁 자체가 소련의 패전으로 종결됐다. 혁신적인 이론가인 것과 우수한 지휘관인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해당 문제는 전형적인 기동전의 취약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기동전의 명수였던 독일군 역시 이 점을 항상 고민했는데,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최초로 낫질 작전을 제안했을 때 독일군 참모부의 반응이 '그럼 님 기갑부대로 인해 확장된 측면은 어떻게 할 거임?'이었다.] 마치 [[삼국지]]의 [[곽가]]처럼 너무 빨리 죽어버렸기 때문에 평가도 엇갈리고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는 지적도 있는 인물. == 대중매체에서 == * [[Hearts of Iron IV]]에서 소련군의 사령관으로 등장한다. 보병 장교와 공격적 교리, 무모함, 훌륭한 전략가 특성이 있기 때문에 제법 훌륭한 지휘관이지만 스탈린 루트를 고르면 무조건 숙청당한다.[* 일부러 내전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와 함께 살리는 꼼수가 있기는하다.]] 무엇보다 호이 4에서 소련이 참전한 전장은 보통 [[전차]]와 [[항공기]]가 지배하는 전장이 되다 보니 [[게오르기 주코프]]에 비하면 애용이 덜한 편. * [[동맹국]]이 승리한 대체역사 모드인 [[Hearts of Iron IV/카이저라이히|카이저라이히]]에서 소비에트의 실패 이후 프랑스 코뮌의 망명자 장군으로 등장한다. * [[추축국]]이 승리한 대체역사 모드인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TNO]]에서는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국가/구 소련#s-2.1|서러시아 혁명전선]]에서 [[주코프]]와 함께 보로실로프 후계자 후보로 나온다. 적당한 군사 증강과 민생 경제의 증강, 협상을 통한 통일을 하려는 주코프와 달리 투하쳅스키는 극단적인 군국주의 정책을 통해 군사력을 최대한 끌어모아서 협상 없는 극도로 무자비한 통일을 행한다. == 기타 == || [[파일:external/www.centrosangiorgio.com/tukhachevsky.jpg|width=100%]] || || [[파일:external/s08.radikal.ru/64465ae52975.jpg|width=100%]] || 오래전에 숙청당해서 사진이 거의 없고 초상화가 대부분인데 미화 쩌는 소련답지 않게 '''원판에 충실하다'''. 그만큼 잘생겼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도 투하쳅스키를 잘생겼다고 표현했다.] --눈망울이 완전 송아지 눈이다-- [[신이교주의]]자였다. 실제로도 2월 혁명 이후 그의 친구가 집에 찾아가서 특이한 조각상이 있길래 뭐냐고 물어봤더니 '''[[페룬]]입니다, 위대한 사람이며 강인한 사람이며 전쟁과 죽음의 신입니다.'''라고 말하고 무릎꿇고 진지하게 기도했다고.... 친구가 그거보고 웃으니 '웃지 마십쇼!'라고 일갈한 뒤 '''난 슬라브인에게 종교가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슬라브인에겐 [[마르크스주의]]란 새 종교가 생겼지만 그 종교는 너무 문명적이고 [[모더니즘]]적입니다. 나는 러시아에서 승리한 [[마르크스주의]]가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고갈 것이라고 믿기에 페룬을 믿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매일 페룬을 숭배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아가서 [[보나파르트주의]]를 진지하게 존경하고 주장하며 자신의 신이교주의와 보나파르트주의적 견해를 숨기는 것이 [[소련]]의 대한 배신이라고 여기며 당당하게 보인 것은 덤.[*출처 Minakov, Sergei Timofeevich (2017-09-05). Заговор "красных маршалов". Тухачевский против Сталина (The Conspiracy of the Red Marshals: Tukhachevsky vs. Stalin) (in Russian). Algoritm Publishing]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쇼스타코비치가 정치적 위기에 몰렸을 때 그를 구명하기 위해 스탈린에게 장문의 탄원서를 쓰기도 했으나, 오히려 숙청이 임박한 쪽은 투하쳅스키였다.[* 기껏 최후의 수단으로 매달렸던 사람인 투하쳅스키가 오히려 죄를 뒤집어쓰고 죽었다는 것을 알고서, 쇼스타코비치는 '이제 진짜로 죽었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끝끝내 살아남아, 죽기 전에 남긴 회고록에서 투하쳅스키와의 인연에 대해 진심어린 회고를 남겼다. -스키가 붙는 성씨 때문에 웹상에는 투하쳅스키가 '''폴란드계'''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하지만 투하쳅스키 가문이 사용하는 [[https://ru.wikipedia.org/wiki/%D0%A2%D1%83%D1%85%D0%B0%D1%87%D0%B5%D0%B2%D1%81%D0%BA%D0%B8%D0%B5#/media/%D0%A4%D0%B0%D0%B9%D0%BB:RU_COA_Tuchaczewski_7-10.jpg|문장]]이 발음이 서로 비슷한 폴란드의 투하체프스키 가문(Tuchaczewscy)이 사용하는 [[https://en.wikipedia.org/wiki/Gryf_coat_of_arms#/media/File:POL_COA_Gryf.svg|문장]]과 조금 유사하다 뿐이지, 러시아의 투하쳅스키 가문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투하쳅스키 가문은 14세기 러시아로 이주한 [[독일인]] 인드리스(Indris)의 후손을 자칭했다. 그리고 투하쳅스키의 어원을 고려하면 그가 [[튀르크인]]의 후손일 가능성도 있다.] 오히려 투하쳅스키는 대대로 폴란드와 '''원수진''' 집안에 가깝다. 투하쳅스키 가문은 [[모스크바 대공국]]이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전쟁을 벌여 1514년 정복한 [[스몰렌스크]] 일대에 영지를 가졌는데, 러시아가 [[혼란 시대]]를 겪는 중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스몰렌스크 일대를 탈환하면서 투하쳅스키 가문의 영지도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넘어가버렸다.[* 이후 투하쳅스키 가문은 오늘날 [[모스크바]] 일대의 영지를 새로 수여받았다.] 근 2세기 후 악연은 재연되어 투하쳅스키의 증조부인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Tukhachevsky|알렉산드르 투하쳅스키]]가 폴란드인이 일으킨 [[https://en.wikipedia.org/wiki/November_Uprising|11월 봉기]] 진압에 투입되었다가 1831년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rsaw_(1831)|바르샤바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르의 증손자인 미하일 투하쳅스키는 거의 1세기 뒤에 바르샤바를 목전에 두고 패배했으니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다.[* 사실 러시아와 폴란드가 오랫동안 동유럽의 패권을 두고 다퉈왔던 만큼, 이렇게 수세기에 걸쳐 상대국과 싸워온 군사귀족 가문은 양국에 적잖이 있다.] [[분류:1893년 출생]][[분류:1937년 사망]][[분류:러시아 제국의 군인]][[분류:소련군 총참모장]][[분류:소련군 원수]][[분류:러시아 내전/군인]][[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스몰렌스크 주 출신 인물]][[분류: 대숙청으로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