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신성 로마 제국)] ||<-3> {{{#fff {{{+1 '''바이에른 선제후국'''}}}[br]'''Kurfürstentum Bayern'''}}} || ||<-2> [[파일:바이에른 선제후국 국기.svg|width=100%]] || [[파일:Coat_of_Arms_of_the_Electorate_of_Bavaria_1753.png|width=80%]] || ||<-2> {{{#fff '''국기'''}}} || {{{#fff '''국장'''}}} || ||<-3> {{{#fff '''위치'''}}} || ||<-3> [[파일:Electorate_of_Bavaria_1789.png|width=100%]] || ||<-3> [[1623년|{{{#fff '''1623년'''}}}]] {{{#fff '''~'''}}} [[1806년|{{{#fff '''1806년'''}}}]] || ||<-3> {{{#fff '''역사'''}}} || ||<-2> {{{#fff '''성립 이전'''}}} || {{{#fff '''멸망 이후'''}}} || ||<-2> [[바이에른 공국|{{{#fff '''바이에른 공국'''}}}]] || [[바이에른 왕국|'''{{{#fff 바이에른 왕국}}}''']] || ||<-3> '''지리''' || || '''위치''' ||<-2>[[독일]] [[바이에른]] || || '''수도''' ||<-2>[[뮌헨]](1623~1806) || ||<-3> '''인문환경''' || || '''언어''' ||<-2>[[라틴어]], [[독일어]] || || '''종교''' ||<-2>[[로마 가톨릭]]|| || '''민족''' ||<-2>[[독일인]] || ||<-3> '''정치''' || || '''정치체제''' ||<-2>[[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2>[[선제후]] || || '''국성''' ||<-2>[[비텔스바흐 가문]] || || '''주요 선제후''' ||<-2>[[막시밀리안 1세(바이에른)|막시밀리안 1세]](1623~1651)[br][[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1679~1726)[br][[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1799~1805) || [목차] [clearfix] == 개요 == 오늘날의 [[바이에른]]에 존재했던 선제후국.[* 선제후가 아니었던 이전의 바이에른과 구분하기 위해, 편의상 지난 시대를 바이에른 '공국'이라 구별하지만, 사실 선제후국 시절의 바이에른도 구조상 공국이었다. 신성로마제국 강역 내에서는 특별히 허가 받은 보헤미아 왕국, 명목상 작위였던 독일 왕국 이외에 어느 누구도 '왕'을 참칭할 수 없었기 때문.] == 역사 ==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이 다스리던 바이에른 공국은 1503년 바이에른-뮌헨 공작 알브레히트 4세 아래 재통합되었다. 이후 [[종교개혁]] 시기에 알브레히트 4세의 아들 빌헬름 4세는 [[루터교회]]로의 개종을 고민하였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가톨릭]]으로 남으면 [[트리어(독일)|트리어]]나 [[쾰른]] [[선제후]]를 보장해주겠다고 회유하여 가톨릭으로 남았고, 이후 후계자인 알브레히트 5세와 빌헬름 5세를 거쳐 바이에른은 엄격한 가톨릭 국가로 남았다. 빌헬름 5세의 후계자 [[막시밀리안 1세(바이에른)|막시밀리안 1세]]는 부친의 뒤를 이어 대항종교개혁을 실시했으며 동생 에른스트는 1583년부터 [[쾰른 선제후국|쾰른 선제후]] 자리에 오르면서 향후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은 200여 년 동안 쾰른 선제후직을 숙질계승으로 준세습화했다. 1619년 황제 선거에서 막시밀리안 1세는 [[페르디난트 2세|내지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어린 시절 [[예수회]]로부터 교육받았으며 막시밀리안 1세와는 [[잉골슈타트 대학교]] 동문지간이었다.]를 지지하여 [[30년 전쟁]] 초반 승승장구한 덕분에 1623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선제후]] 직위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바이에른은 30년 전쟁의 와중에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과 뒤이어 참전한 [[프랑스군]]에게 연달아 털리며 결국 잿더미로 변했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선제후 직위를 공인받았으나[* 정작 팔츠 선제후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선제후 자리는 복권되었다. 다만 이때 [[팔츠 선제후국]]이 빼앗긴 [[오버팔츠]]는 바이에른 영토로 공인되었다.] [[페르디난트 마리아]]는 30년 전쟁의 참화로부터 피해를 복구하는 것으로 치세를 보내야 했다. 페르디난트 마리아의 아들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대튀르크 전쟁]]에 참전하여 큰 공적을 세웠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 스페인의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딸 마리아 안토니아와 결혼하여 아들 요제프 페르디난트(Joseph Ferdinand von Bayern 1692~1699)를 얻었고, 요제프 페르디난트는 자녀가 없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의 후계자로 지명되어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이 [[스페인 제국]]을 상속받을 길이 열리는 듯 했다. 그러나 요제프 페르디난트는 불과 7세에 사망했으며 카를로스 2세는 레오폴트 1세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와 스페인 제국을 몰래 분할하려 한 것에 격분하여[* [[펠리페 3세]]와 [[펠리페 4세]]를 거치다 보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보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와 혈통상으로 더 가까워지기도 했고, 스페인 귀족들과 카를로스 2세는 [[9년 전쟁]]을 버틴 [[프랑스군]]의 체급을 보고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는다면 스페인의 [[이탈리아 반도]] 영토를 지킬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게다가 카를로스 2세는 두번째 부인인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안나가 자신을 무시하고 사사건건 국정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해 [[독일인]]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컸다.]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 [[펠리페 5세|앙주 공작 필리프]]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했다. 이 시점에서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두번째로 결혼한 [[테레사 쿠네군다 소비에스카]]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딸이었기 때문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선거에 출마하여 동유럽으로 나아갈수도 있었으나[* 실제로 얀 3세의 부인 마리 카지미르 다르키앙은 띨띨한 아들 야쿠프보다는 사위인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을 선호했고 이때문에 얀 3세와 말년에 자주 다투었다. 결국 마리 카지미르 다르키앙의 우려는 틀리지 않아 야쿠프는 얀 3세 사후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에게 국왕 선거에서 패배했다.], 독일에 집중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세습화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자신의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으로 대체하려던 야심을 품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 왕국|프랑스]] 편에 서서 참전했으나 오히려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합스부르크-제국군과 [[존 처칠|말버러 공작 존 처칠]]이 이끄는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 연합군에게 [[블레넘 전투|블렌하임에서 털리면서]] [[뮌헨]]을 빼앗기고 두 아들이 포로로 붙잡히는 굴욕을 당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2세의 계획이 헛되지는 않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그렇게 털리면서도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프로이센)|프리드리히 1세]]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2세]], [[영국 국왕]] [[조지 1세]]와 같이 타국의 왕위를 겸한 선제후들을 보면서 버텼다고 전해진다.--[[아신왕|근성]][[프란츠 2세|가이]]--] 그가 죽은 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을 때 맏아들 [[카를 7세|카를 알브레히트]]는 바이에른과 [[보헤미아 왕국]] 본인의 2표, 동생 쾰른 선제후 클레멘스 아우구스트의 1표,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 팔츠 선제후 [[카를 3세 필리프]]의 1표[* 16~17세기에 치고 박았던 지메른계와 달리 노이부르크계는 가톨릭이어서 그나마 접점이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1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의 [[작센 선제후국]] 1표, [[트리어 선제후국|트리어 선제후]]의 1표까지 총 6표를 얻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7세로 등극했다. 그러나 [[대관식]]을 하러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 간 사이 본진 [[뮌헨]]이 털리며 [[홍철 없는 홍철팀|영지 없는 황제]]가 되어버렸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후 바이에른을 물려받은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는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도전하지 않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1세|프란츠 슈테판]]을 지지하는 조건으로 바이에른을 돌려받았다.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이었던 [[팔츠 선제후국]]의 [[카를 테오도어]]가 바이에른 선제후국을 물려받았고[* 다만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팔츠계와 바이에른계 중 한쪽의 대가 끊겨 통합된다면 황제 선거에서 1표만 행사하도록 단서 조항을 달아놓았다.], 이로써 [[루트비히 4세(신성 로마 제국)|루트비히 4세]] 이래 분할되었던 비텔스바흐 가문의 영토가 통합되었다. 그리고 카를 테오도어는 1778년 [[만하임]]을 떠나 [[뮌헨]]에 정착하여 뮌헨이 명실상부한 비텔스바흐 가문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카를 테오도어도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바이에른-팔츠는 가장 가까운 친척인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막시밀리안 요제프]][* 카를 테오도어의 손녀사위이기도 했다. 다만 [[살리카법]]으로 인해 [[독일어권]]에서 여계는 크게 의미가 없었다.]가 상속했고 막시밀리안 요제프는 [[나폴레옹 전쟁]]을 이용해 바이에른을 [[바이에른 왕국|왕국]]으로 승격시켰다. == 역대 선제후 == [include(틀:역대 바이에른 선제후)] * [[막시밀리안 1세(바이에른)|막시밀리안 1세]] * [[페르디난트 마리아]] *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 [[카를 7세|카를 알브레히트]] *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 [[카를 테오도어]] *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 [[분류:가톨릭 국가]][[분류:독일 왕국 구성 제후국]][[분류:선제후국]][[분류:19세기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