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1919 '''{{{+1 변수}}}[br]邊燧[* 邊'''{{{+1 樹}}}'''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 Pyon Su [* 대학 학적과 그의 예전 묘비에는 Penn Su로 기록되어 있다.]'''}}}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yonsu_1891.jpg|width=100%]]}}} || || '''본관''' ||<(> [[변(성씨)|원주 변씨]] 호군공파(護軍公派)[* 18세 火변 항렬.] || || '''초명''' ||<(> 변훈(邊勳) || || '''자''' ||<(> 한명 (漢明) || || '''호''' ||<(> 소천(小泉), 양석(養石) || || '''출생''' ||<(> [[1861년]][* [[철종]] 12년] [[10월 14일]] ([[음력]] [[9월 11일]]) || ||<|3> '''사망''' ||<(> [[1891년]][* [[고종]] 28년] [[10월 22일]] (향년 30세) || ||<(> [[미국]] [[메릴랜드]] 칼리지 파크[* College Park] 시 칼리지 역[* College Station]|| ||<(> 열차 사고로 사망 || || '''직업''' ||<(> [[관료]], [[역관]] || || '''학력''' ||<(> [[메릴랜드 대학교]] 농과대학 졸업|| || '''국적''' ||<(> [[파일:조선 어기.svg|width=25]] [[조선]] || || '''주요 경력''' ||<(>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br]군국사무아문 주사[br]외아문참[br][[미국 농무부]] || [목차] [clearfix] == 개요 == 개화기 [[조선]]의 [[관료]], [[역관|]]이자 [[미국]]의 [[공무원]][* 다만 변수가 미국 망명 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한국인 최초의 미국 학사 학위 취득자[* 최초의 미국 유학생은 [[유길준]]이나 유길준은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고 귀국했다.]. == 생애 == 1861년 음력 9월 11일 역관 출신의 아버지 변진환(邊晉桓, 1832. 9. 18 ~ 1878. 5. 11)과 어머니 [[강릉 최씨]](1835. 10. 8 ~ 1894. 8. 10)[* 최익의 딸이다.]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자주 드나들었던 변수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강위(姜瑋)[* 강위의 가계는 조선 중엽부터 문관직과는 거리가 멀어져 완전히 무반신분으로 굳어진 상태였다. 신분상의 제약을 깨달은 강위는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과 문학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가 스승으로 모셨던 민노행과 [[김정희]]는 [[청]]의 [[고증학]]을 받아들인 [[실학]]자들이었는데 이것이 김옥균과의 친분, 그리고 변수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훗날 함께 수학하던 정건조와는 일생의 벗으로 지냈는데, 정건조는 훗날 이조판서 자리에 오른다.]를 스승으로 모시며 수학하였는데, 강위가 [[김옥균]]과 절친한 사이인 연으로 1882년 4차[[수신사]]로 파견되는 김옥균의 수행원으로 발탁되어 처음으로 일본에 방문했다. 변수는 이를 계기로 일본 교토 소재의 실업학교로 유학하여 양잠과 화학[* 농업의 기술적 발전을 위해서는 화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을 배웠다. 1883년에는 [[보빙사]]의 수행원으로 미국을 방문하였고[* 미국 입국을 요코하마~샌프란시스코 정기선을 통해 하였고, 출국은 대서양~유럽 루트로 하였기 때문에 조선인 최초의 세계일주를 경험했다. 대서양 횡단은 미국 대통령 전용 군함인 트렌턴 호에 탑승했다],그의 학문에 대한 열의는 여러곳에 기록되어 있다. >[[서광범]]과 변수는 내가 백과사전을 번역하여 설명해주면 자기 나라에 유용한 사항을 노트에다 적는데 지칠 줄 모르는 열의를 보였다. >------ >포크 해군 무관의 보고서 (1884년 12월) 1884년 [[갑신정변]]에 참여[* 일본군의 출동에 대한 교섭과 연경당(演慶堂)의 경비를 맡았다.]했다가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 후[* [[도쿄도]] [[미나토구(도쿄)|미나토구]] 시바우라 1쵸메 4 부근에 거주했다.] 1년 뒤 미국으로 이주했다. === 미국 생활 === 미국 벌리츠 어학원[* 막시밀리안 베를리츠(Maximilian Berlitz 1852~1921)가 1878년에 설립한 어학원으로 현재도 한국을 포함한 70여개 국에 500여개의 곳에서 영업중이다.]에서 영어를 배우며 공부하던 그는 1887년 [[메릴랜드 대학교]] [[농학과]]에 입학하여 한국인 최초로 미국 대학에 입학한 사람이 되었다. 이 때 농과대학에 입학한 학생은 총 46명이었는데, 변수와 함께 입학한 또 다른 한국인의 이름이 확인 된다. 그의 이름은 훗날 민상호로 개명하고 친일파의 길을 걷게 되는 [[민상호|민주호]][* 입학 당시 이름은 閔周鎬, Min Chou Ho.]인데 김옥균의 주선으로 변수와 함께 미국으로 망명한 상태였다. 미국 유학 중에는 Penn Su[* 그의 학적기록과 묘비는 Penn Su라는 이름이 사용되었고, 입학 전과 사후에는 Pyon Su라는 이름으로 발견된다.]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1891년 6월에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졸업식에서 상업(Commerce)을 주제로 졸업생 대표 연설을 하였고, 졸업 1달 전에 미국 농무부에서 동아시아 농업 통계 관련 자료 정리를 위한 촉탁[* 임시계약직]으로 근무하였다. 당시 미 농무부에는 동아시아 농업 통계 자료들이 쌓여가고 있음에도 이를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없었는데, 조선에서 관료를 지냈고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가 모두 가능한 변수는 해당 직책에 가장 적절한 인물이었다. 변수는 일본어로 작성된 농업자료 통계를 정리하여 3개월만에 영문보고서로 제출[* 그의 보고서는 1891년 9월 농무성 통계국 월보 제89호에 <일본의 농업>이라는 글로 게제되었다.이에 대해 미국 농림부 차관보 윌리트가 그의 보고 능력을 극찬한 사실이 1891년 10월 23일 워싱턴스타지에 실렸다.]하여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정규직 계약을 제안받게 된다. == 사망 == 일본 농업자료를 영문보고서로 정리한 성과로 다음 프로젝트인 '중국의 농업 보고서' 정리를 맡게 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만 3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해 10월 22일 중국의 농업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모교를 찾았다가 저녁 귀가 중에 칼리지 역(College Station)[* College Park 시 소재]을 지나던 급행열차에 치어 사망하였다. 당시 변수의 사망소식은 뉴와크 데일리, 보스턴 글로브, 뉴욕 타임즈, 시카고 트리뷴, 워싱턴 포스트 등 여러 매체의 단신으로 다뤄졌다. 미국 정부는 그의 사망 후 즉각 조선공사관에 사망소식을 알렸으나, 주미조선공사관은 그에 대해 아는바가 없다고 답하며 후속조치를 거부했는데, 이는 변수가 갑신정변에 참여하여 수배령이 떨어진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유해는 고국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인근 벨츠빌(Beltsville)에 소재한 성 요셉 카톨릭 공동묘지(St. Joseph Cemetery)[* De La Salle Cemetery로도 알려져 있다.]에 묻혔다. [[https://www.findagrave.com/memorial/33188172/penn-su|묘지 정보]] == 사후 == 그의 사망 20여 년 만인 1910년 7월 18일 그는 신원되어 대한제국은 그를 규장각 부제학으로 추서[* 당시 기록으로는 '특증']했다. 다만 날짜를 보면 알겠지만 경술국치에서 불과 40일쯤 전이었다.(...) 1994년 메릴랜드대학에서는 그의 생애가 상징하는 한 세기를 기념하여 '변수장학금'을 설립 하였다. 미혼이었던 그는 후손도 없이 잊혀져 있다가 2002년에 와서야 그의 묘소가 한인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2003년에 무덤 비석도 [[https://news.koreadaily.com/2003/05/12/society/generalsociety/224999.html|새롭게 세워지고]][* 그의 기존 묘비에는 메릴랜드 대학 재학 당시 사용하였던 영문명 Penn Su와 함께 한글이름이 '벤수'로 적혀있다.][* 기존 묘비 뒤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KBS]]에서 그에 대하여 간략하게 보도되기도 했다. 2021년 10월 메릴랜드 대학은 새로 지은 기숙사의 이름을 변-첸 홀 (Pyon-Chen Hall)로 명명했다.[* 그 이전에는 [[메릴랜드]] 소속 카운티들의 이름을 따 건물 이름을 붙이곤 했다. [[서울대학교]]에 비유하자면 [[종로구|종로]]관, [[용산구|용산]]관 식으로 해석하면 된다.] 메릴랜드 대학은 인종차별을 허물었던 두 명의 아시아 유학생이었던 한국 출신 변수와 최초의 농과대학 중국인 유학생 첸(Chunjen Constant Chen)을 기리는 사업으로 두 사람의 이름을 따왔다고 밝혔다. [[http://www.koreatimes.com/article/1383173|한국어 기사]] [[https://adminvp.umd.edu/current-projects/pyon-chen-hall-johnson-whittle-hall-and-yahentamitsi-dining-facility|대학 안내문]] [[분류:1861년 출생]][[분류:1891년 사망]][[분류:원주 변씨]][[분류:조선의 관리]][[분류:급진개화파]][[분류:보빙사]][[분류:철도사고로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