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일:external/img.hani.co.kr/0091000301200504040405_16.jpg|width=500]] || ||앞줄: 왼쪽부터 [[퍼시벌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우리탕 [br]뒷줄: 왼쪽부터 현흥택, 미야오카, [[유길준]], 최경석, 고영철, [[변수(1861)|변수]] || [목차] {{{+1 報聘使}}} [clearfix] == 개요 == 1883년 (양력) 7월 15일[* 음력 6월 12일] [[조선]]이 최초로 서양(미국) 국가에 파견한 외교 사절단. 1882년 (양력) 5월 22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의해 [[미국]]은 특명 전권 대사[* [[청나라]], [[일본]]과 동급의 외교관을 파견한 것이다. 이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미국을 신뢰하게 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로 루시어스 푸트를 파견했다. 따라서 조선도 공사를 보내야 했는데 당장 보낼 형편은 못 되었고, 대신 푸트의 건의로 답례차 외교 사절을 파견하기로 했는데, 그래서 선발된 것이 다음 명단이었다. == 명단 == * 전권 대신 [[민영익]] [[명성황후 민씨]]의 조카[* [[명성황후]]의 양오라비인 민승호가 1874년 폭탄 테러([[운현궁]]에서 저질렀다는 말이 많다)로 숨지자 사후 양자로 입적하였다.]이자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외사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민씨 집안 출신이며, 더더욱이 민영익의 양아버지 민승호는 [[여흥부대부인]](흥선 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생모)의 친남동생.], 그리고 후에 [[순종(대한제국)|순종]]의 처남[* 친 여동생이 [[순종황제]]의 첫 번째 부인인 [[순명효황후]]이다.]까지 되는 왕실 외척. 한마디로 당시엔 젊은 세도가였다. 이렇게 써놓으면 단순 [[낙하산 인사]]로 보일 수도 있지만 수신사로 일본도 다녀오고 [[묄렌도르프]]와 같이 청도 다녀오는 등 외교 면에서 기존부터 활동해온 인물로 조선을 대표하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본래 한국사에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 사신단의 대표인 정사(正使)는 왕실 종친이나 [[부마]]와 같은 외척처럼 신분이 높은 인사를 일부러 선정한 경우가 많았다. 왕이 되기 전 [[신라]]의 [[김춘추]]도 대표적인 그런 케이스였고, [[고구려]]나 [[백제]]도 중국에 보낸 정사의 이름들을 보면 비슷했다. 당장 청나라 사행길을 기록한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로 가는 사절단에 동행했을 때 사절단의 수장인 정사가 삼종형(8촌 지간)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었고, 그는 [[영조]]의 부마이자 영조가 가장 총애한 딸인 [[화평옹주]]의 남편으로 왕실과 인척관계였다. 그리고 근대 [[유럽]] 왕정에서도 왕실 혈족 출신들이 외교 무대에서 활동한 경우가 많았으므로 국제 관례상 이례적인 것은 아니다. 미 신문에서는 Prince Min으로 통칭했다. 'prince'는 '왕자' 외에도 최고위 귀족의 칭호(공)로도 쓰이므로 민영익을 지칭하는데엔 적합한 표현이다. * 부대신 [[홍영식]]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조선)|홍순목]]의 아들로 역시 명문가 자제, 조사 시찰단(신사 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오고, 내아문 외아문 통리아문의 참의를 역임하는 등 유능한 신진 관료로 인정받던 인물이었다. * 종사관 [[서광범]] 수신사로 [[김옥균]]의 수행원 역 등을 맡으며 일본에 다녀왔던 인물이었다. 이상 3인이 공식적으로 벼슬을 받은 외교 사절이었고, 이하는 수행원들이었다. * 수원 [[유길준]] 수원 최경석[* 오위장을 역임한 무관으로, 미국에서는 육군 [[대령]]으로 예우했다.] 수원 [[변수(1861)|변수]][* 조선인 최초로 미국 [[학사]]를 받은 사람. [[갑신정변]] 이후 미국에 거주하다 사망.] 수원 고영철 수원 현흥택 우리탕(吳禮堂)[* [[묄렌도르프]]의 해관 설치 일로 고용되어 온 중국인] 유길준과 변수는 한국어 ↔ 일본어, 고영철은 한국어 ↔ 중국어, 우리탕은 중국어 ↔ 영어 통역을 담당했다. 다음 문단의 미야오카가 일본어 ↔ 영어 통역으로 합류하면서 보빙사 측 통역은 총 5명이 되었다. == 일정 == 7월 15일부터 출항하여 중간 기착지로 일본에 들렀는데[* 당시 태평양 횡단에는 샌프란시스코 - 요코하마 정기선을 이용하여야 했다.] 이들로만 보내기는 좀 불안했던지 주일 미국 공사의 주선으로 [[퍼시벌 로웰]][* 화성 운하설의 그 로웰 맞다. 후술된 내용과 해당 항목도 참고하자.]과 그의 비서 겸 통역관 미야오카 츠네지로(宮岡恒次郞)가 동행하게 된다.[* 이는 [[한국어]] ↔ [[영어]]가 바로 직통되는 통역관이 당시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영어 ↔ [[중국어]] ↔ 한국어, 혹은 영어 ↔ [[일본어]] ↔ 한국어로 통역한 셈. 실제로는 통역의 정확을 기하기 위하여 일본어 중역과 중국어 중역을 모두 참조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정식으로 로웰에게 보빙사 서기관 겸 고문이라는 관직을 내려 주었다. 사실 보빙사의 미국 방문 기록이 오늘날 한국 측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왜냐하면 보빙사의 주요 인물인 [[홍영식]], [[서광범]]이 [[갑신정변]]의 실패 후 역적으로 단죄되어 [[기록말살형]]을 당했기 때문.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미국 내 일정은 신문 기자들이 따라다니면서 충실히 기록했기에 현재 보빙사의 미국 일정만큼은 어느정도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튼 일본에 들렀던 보빙사는 8월 15일에 출항하여 9월 2일에 샌프란시스코로 도착한다. 당연히 미국 정부에서는 사절단을 국빈으로 예우했다. 다만 한가지 흠이 있었는데,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대접받으면서[* 이때 [[시카고]]에서 남북전쟁 당시의 명장이자 후에 [[셰리든 전차]]에 명명되는 필립 셰리든의 영접을 받았다.] [[워싱턴 D.C.]]에 와 보니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은 뉴욕에 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9월 18일이 되어서야 아서 미국 대통령과 조선 외교 사절의 첫 만남이 성사되게 된다. [[파일:external/www.koreadaily.com/120354437.jpg]] 그려진 세 명은 아마도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으로 보인다. 절을 받는 사람은 미국의 제21대 대통령 [[체스터 A. 아서]]이다. 자세한것은 [[체스터 A. 아서]] 목록 참조. 서양 예법에서 대통령에게 절을 하지 않는것은 당연히 당시 보빙사 일행도 알고는 있었는데,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인사해야 대통령 의전에 걸맞는 적절한 예절인지 토론하던 도중 아서 대통령이 예정보다 일찍 오는 바람에 [[조건반사]]적으로 왕에게 하듯이 절을 했다고 한다.[[http://sf.koreatimes.com/article/20190917/1269389|#]] 그런데 이 그림의 정확성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단 [[민영익]] 등 아서 대통령을 알현한 일행은 [[관복]]으로 갈아입었기에 애초에 저런 복장이 아니며, 모자 역시 관모여야 한다. 또, [[뉴욕 타임스]]의 1883년 어카이브에 따르면 민영익 등 3명이 들어오자 그들은 서로를 향해 bow하고(여기서 bow를 절로 보면 아서 대통령도 절한 것이 된다) 대통령과 악수한 후 서양식으로 접견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절을 한 이후 곧바로 악수도 했다는 소리가 될 수 있다. 조선식으로 먼저 예법을 차리고 서양식으로 예법을 차렸다는 이야기. 참고로 이때 다른 수행원들은 모두 문 밖에서 벽을 바라보며 엎드려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외교 사절이 접견할 때 권한이 낮은 수행원들이 취해야할 행동이었다. 따라서 위 삽화는 1) 문밖에서 엎드려 있던 사람, 2) 서양에 알려진 조선의 양반 복장 등을 바탕으로 상상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는 주장도 있다. 단, 민영익 일행은 대통령을 비밀리에 방문한 것도 아니고 복수의 목격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림과 같은 식으로 '절을 하기는 했다'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에 대한 분석이 있으니 참조. [[https://arca.live/b/dogdrip/11892431|#]] >Each evening finds the Embassy thus engaged:note books are produced, discussions follow ans a few additional questions are asked of those who are available to clear up doubtful points or correct others. >그들은 매일 밤 모여 메모한 것을 가지고 서로 토론하며 의심나거나 자신들이 질문할 것들을 지적하였다. >---- >뉴욕타임즈 1883년 10월 13일 당시 보빙사를 수행했던 Clayton Foulk의 기록을 보면, 보빙사 일행은 다소 허세를 부리고 배 멀미를 하는 생리적인 문제는 보였을지 몰라도, 식사 및 공연 등 다양한 일정에선 최대한 세련되게 처신하고 그들이 본 것 역시 상세히 기록했다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기 쉬운 문화 부적응 [[꼰대]] 같은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보빙사 대표들이 이미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외국 문물에 대해 어느정도 익숙해있던 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추론해볼 수도 있다.[* 1887년 주미 조선공사관 개설 때문에 미국에 파견된 [[박정양]], [[이완용]], [[이상재]], [[이하영]] 등은 상대적으로 나이든 축에 속해서 그랬는지 보빙사 일행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들을 인솔한 미국인 [[호러스 뉴턴 알렌]]은 12월 26일 일기에 이렇게 남겼다. '그들은 선실 안에 틀어박혀서 모든 걸 하인이 들여보냈고, 조선 관리 복색임에도 줄담배를 피느라 담배 쩐 내, 똥냄새, 입 냄새에 특이한 음식 냄새 때문에 내가 볼 일이 있어 선실에 들어갔다가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면서, 특히 이상재가 많이 '더티'(비유가 아니라 원문에 그리 쓰여있다.)했다고 한다.] 하여튼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견학도 하고 [[차관]] 요청도 하고 [[기술]] 전수 요청도 하고 [[박람회]] 개최 협조 요청도 하는 등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다 10월 12일 귀국 인사차 [[백악관]]에 방문하고, 아서 대통령은 [[군함]] 한 척을 내주어 본국까지 타고 갈 것을 권한다. 이들이 방문한 곳은 워싱턴 소방서, 뉴욕 브로드 웨이, 에디슨 전기회사, 뉴욕생명보험회사, 미국 농무부 연구소, 로웰 산업단지 등 산업 전반에 걸쳐있었다. 그래서 세 그룹으로 갈라졌는데 [[민영익]], [[서광범]], [[변수(1861)|변수]]는 이 군함을 타고 [[유럽]] 등으로 건너가 각국을 순방하고 1884년 5월 귀국했다. 나머지 [[홍영식]] 및 수행원은 바로 태평양을 건너 1883년 12월 귀국해 국왕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이때 [[퍼시벌 로웰|로웰]]이 따라와 국빈으로 대접받았다. 보빙사를 계기로 조선은 최초의 미국 유학생과 졸업생을 남기게 되는데, 최초의 미국 유학생은 [[유길준]]이다. 근대 시기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기도 한 [[유길준]]은 민영익의 허가 아래 미국에 남아 조선인 최초의 '''미국 [[유학]]'''을 하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보스턴 대학에 입학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하버드 대학 입시 준비 중 2년 여 만에 귀국했다. 자세한 그의 행적은 [[유길준]] 문서 참조. 최초의 졸업생은 [[변수(1861)|변수]]이다. 그는 귀국 후 훗날 [[갑신정변]]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는데, 김옥균의 암살로 1년간 일본에서 숨어지내다 미국으로 망명하여 최초의 미 대학 조선인 입학 및 졸업생이 되지만 열차사고로 30세에 요절한다. 자세한 내용은 [[변수(1861)|변수]] 문서 참조. 여담이지만 점심 메뉴로 [[프라이드 치킨]]을 시켜먹었다고 한다. 한국이 미국의 프라이드 치킨을 본따 전 세계적으로도 치킨의 성지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참고로 유럽을 보기로 한 민영익 등의 일행은 대략 [[포르투갈 왕국|포르투갈]],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등을 보고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인도 제국|인도]], [[싱가포르]], [[일본 제국|일본]] 등을 거쳐 왔다. 즉, '''조선인 최초로 거의 [[세계일주]]를 한 셈'''. 이집트에서는 조선인 최초로 [[피라미드]]를 구경하기도 했다. 다만 당시 유행했던 피라미드 등반 및 내부 탐사는 모두 거부했다. 그도 그럴게, 유학을 배운 선비로서 남의 나라 왕릉을 밟고 올라가거나 그 안에 들어간다는 건 상상도 못할 짓이기 때문이다. 이글루스 역사밸리의 유명 블로거 迪倫이 보빙사 일행의 [[http://dylanzhai.egloos.com/category/1883%EB%85%84%20%E7%99%B8%E6%9C%AA%E7%B4%90%E7%B4%84%E4%BD%BF%E8%A1%8C%E9%8C%84|미국 일정에 대한 포스팅]]을 올리고 있으니 역덕후라면 참고해보자. 그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팰리스 호텔(palace hotel) 에서 '엘리베이터를 처음 탄 조선인들이 지진이 난 줄 알고 당황했다' 라고 하는 일화가 미국의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 이 쓴 『조선체류기』로부터 보빙사의 이야기라고 흔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이들의 이야기가 아닌 1888년 초대 주미 미국 공사로 부임한 [[박정양]] 일행이 겪은 일을 당시 그들을 수행했던 알렌이 자신의 책에 남긴 것이다. == 뒷이야기 == [[민영익]]은 돌아와서도 온건파를 유지하다가 [[갑신정변]] 당시 사이가 틀어진 급진 개화파들에게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후 친청 근왕파가 되었다. 사실 민영익은 갑신정변 당시 큰 부상을 입었으나, 보빙사 당시의 인정을 생각해 [[호러스 뉴턴 알렌|알렌]]에게 인도되었으며, 그는 민영익을 살려내면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총애를 받게 된다. 문젠 여기까진 좋았는데 1886년 조러 밀약 등 고종의 친러거청 정책에 반대해 [[위안스카이]]에게 이 사실을 알려줬다 일이 꼬여 이후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 훗날 귀국했으나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다시 상하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1914년 사망했다. [[홍영식]]은 미국의 정치 행정 제도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우정 시스템에 큰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귀국하여 만든 게 [[우체국]]. 그러나 1884년 12월 [[갑신정변]]에 참여하였다 3일 천하로 끝난 직후 살해당해 효수되었다. [[서광범]]은 [[갑신정변]] 일로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에 망명, 이후 알바 등으로 먹고 살며 공부하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귀국, 사법 제도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이후 권력 다툼 속에 주미 조선 공사직으로 일종의 좌천이 되어 도미, 잠깐 동안 활동하다가 1896년 [[아관파천]]의 여파로 해임되고 미국에서 지내다 1897년에 폐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최경석은 보빙사 때 농업 근대화를 위해 종자 및 가축, 비료 등을 얻어와 귀국 후 땅을 하사받아 농장을 만들었다. 이 양반은 [[갑신정변]]에도 무사하여 일이 잘 되는가 싶더니 1886년 병사했다. 당연히 농장은 흐지부지되었고 그때 들여온 [[젖소]]도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변수(1861)|변수]](邊燧)도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했다 도미하여, 1887년 메릴랜드 주립 농과 대학에 입학하였다. 이후 1891년 이학사(理學士) 학위를 취득, '''미국 대학 최초의 조선인 졸업생'''이 된다. 재학 중이던 1890년부턴 미국 농무성 직원으로도 근무. 하지만 안타깝게도 1891년 열차에 치여 31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참고로 그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KBS 수요기획]]에 방영되었다. [[유길준]]은 1년 정도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이후 1년간 유럽을 구경하고 귀국하였다. 그 사이에 갑신정변이 났기 때문에 유길준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1885년 말부터 7년간 가택 연금을 당하면서 이 시기 [[서유견문]] 등을 쓰게 된다. [[갑오개혁]] 땐 내무부를 맡아 개혁에 힘썼는데, 이때 무리하게 [[단발령]]을 내리다 되레 민심을 잃고 [[아관파천]] 이후엔 을미사변 관련해 고종에게 역적으로 지목되며 갑신년 동지들보단 뒤늦게 일본 망명 크리를 타게 된다. 그래도 고종 폐위 후 귀국한다. 고영철은 역관으로 한성순보의 편집, 번역 책임자이기도 했으며, 영어에 능통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미 영선사로 청나라에 파견된 경험이 있었고 개화파 인사들과 두루 어울렸다. 격동의 시기에도 군수를 지내며 무난한 삶을 살았다. 그의 아들이 서양화가로 유명한 [[고희동]]이다. 현흥택은 최경석과 함께 무관 출신으로, 이후 관운이 풀리는듯했으나 [[을미사변]]때 시위대 대장으로 시위대를 이끌고 궁에 침입한 일본군을 끝내 막지 못했다. 이후 [[춘생문 사건]]때 이범진, 이완용과 가담했으나 실패했다. 독립협회에 참여했고, YMCA가 발족되자 자문위원을 맡았다. 부지문제로 YMCA 회관설립이 어려워지자 몸소 400평 가까운 땅을 기증했다. 그의 아들과 조카도 YMCA에서 여러 직책을 역임하면서 발전에 힘썼다. 우리탕(오례당)은 조선에 그를 불러준 [[묄렌도르프]]가 실각한 후에도 해관원으로 근무하다 1890년 은퇴 후 제물포(인천)에서 큰 돈을 벌어[* 학창 시절 절친으로 지낸 프랑스 후작이 있었는데, 그가 죽으면서 전 재산을 우리탕에게 남겼다고 한다. 그후 부동산 투자 등으로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지역 유지로 잘 살다가 1912년 [[제물포]]에서 생을 마감했다. 우리탕은 뮐렌도르프의 추천으로 조선에 왔을 뿐 본래 외교관이었다. [[퍼시벌 로웰]]은 보빙사와 같이 다니면서 [[홍영식]]과 친해져서 [[조선]]에서 국빈 대접을 받고 [[사진사]]와 동행해 최초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사진]]을 찍는 등 잘 놀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 지내면서 동양 관련 저술가로 활동해 [* [[조선]] 기행기로, 서문에 [[홍영식]]에 대한 추모글이 있다.]을 출판하고 조선 관련 사진첩도 내고 일본 관련 서적도 여럿 써내며 이름을 날렸다. 귀국 후에는 [[천문학자]]로 변신해 자비로 로웰 [[천문대]]를 건설, [[화성]]에 [[운하]]와 더불어 [[화성인]]이 있다고 주장하여 세간의 화제를 모으고, [[명왕성]](당시 가칭 Planet X)의 궤도를 예측해 탐사하던 중 1916년에 사망했다. 참고로 명왕성은 이후 [[클라이드 톰보]]가 로웰이 세운 로웰 천문대에서 1930년 발견하였다. [[분류:1883년/사건사고]][[분류:고종 시대/사건 사고]][[분류:근대화]][[분류:한미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