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urope_1815_map_en.png|width=100%]]}}}|| || {{{#000,#fff {{{-1 1815년 유럽}}}}}} || [목차] [clearfix] == 개요 == '''빈 체제'''(Vienna System)란 [[1814년]]에서 [[1815년]]까지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오스트리아)|빈]]에서 개최된 [[빈 회의]]를 계기로 유럽 열강들 사이에 약속된 복고적(復古的) [[세력균형]] 체제를 이른다. 회의의 주요 주재자였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이름을 따 '''메테르니히 체제'''(Metternichsches System), '''유럽 협조 체제'''([[https://en.wikipedia.org/wiki/Concert_of_Europe|Concert of Europe]]), 또는 '''5두 체제'''(pentarchy)[* 빈 체제를 지탱한 '''[[부르봉 왕정복고|프랑스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의 다섯 [[강대국]]을 뜻한다. 이 중에서도 핵심 국가는 빈 체제를 주도한 메테르니히의 조국인 [[오스트리아 제국]] 그리고 [[나폴레옹]]을 몰락시켜 [[빈 회의]]를 여는 데, 가장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과 [[러시아 제국]]이다.]라고도 한다. == 창설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빈 회의)] 전후 개최된 빈 회의에서는, 온 유럽을 전쟁의 불바다로 만든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난 바탕에 [[프랑스 혁명]], 더 근본적으로는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의 확산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권력층은 단순히 혁명이 일어나지 않도록 시민들의 불만을 받아들이고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구(舊) 체제로 되돌아가야 한다."'''라 결정하였고 그것이 빈 체제의 주요 골자였다. 때문에 만약 각국에서 이런 자유주의, 내셔널리즘 운동이 일어날 경우 유럽 국가들은 이런 운동을 진압해야 할 책임이 있었고 만약 진압되지 못 할 경우 무자비한 제국의 군대들이 학살로 진압하였다. 각국은 [[비밀경찰]]과 [[언론통제|언론 검열]] 등을 펼쳤고 [[전제군주제|나폴레옹 전쟁 이전의 정부 체제]]를 복귀시켰다. == 동요와 붕괴 == 빈 체제의 성립에도 불구하고 이미 유럽 각 지역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프랑스 혁명의 이념들이 퍼져 있었다. 곧 유럽 각지에서 빈 체제에 대한 반발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진보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은 빈 체제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시도라고 반발했고 [[독일]]과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통일|내셔널리즘 열풍]]이 불었으며 프랑스에서는 [[7월 혁명]]이 일어나 [[루이 18세]]의 뒤를 이은 [[샤를 10세]]가 폐위되었다. 또한 이 체제에서 중요 역할을 맡았어야 할 [[영국]]은 [[산업 혁명]]과 해외 [[식민지]] 진출에 골몰하느라 관심이 없었으며[* 게다가 영국은 이미 100여년 전 오랜 세월에 걸친 [[왕권]]과의 투쟁의 결과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자유로운 사회 환경이 갖춰져 있었으므로 타국에 비해 '''[[탄압]]'''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덜했고, 심지어 구체제를 혐오하는 성향도 다분했다.] [[러시아]]도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다. 또한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영국]]과 [[러시아]]는 오스만을 견제하기 위해,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빈 체제의 이념을 무시하고 [[그리스]]의 독립을 지원했다. 게다가 그리스 독립전쟁으로 유럽에는 [[1848년 혁명|다시 열병에 가까운 자유주의, 내셔널리즘 운동이 불기 시작했다.]] 샤를 10세의 뒤를 이은 것은 친(親) 혁명 성향의 [[루이필리프]]였으나 1848년에 프랑스 [[2월 혁명]]이 벌어져 프랑스에 공화정이 세워졌고 오스트리아에서도 3월 혁명이 벌어져 메테르니히가 축출되면서 빈 체제는 막을 내렸다. 외교적으로 본다면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 제국|러시아]]의 [[신성 동맹]]이 붕괴된 [[크림전쟁]](1854년)이 결정타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정치 체제상 자유주의, 내셔널리즘 운동 확산 방지를 목표로 한 빈 체제로 인해 받는 수혜가 가장 큰 나라였기에 발칸 반도에서 이익을 지키겠다고 스스로 빈 체제를 무너트린 것은 장기적으로 보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리고 기존의 유럽의 평화 질서가 완전히 붕괴된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은 붕괴하게 된다.] == 평가 == 빈 체제는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구(舊) 체제 복원을 희망하였으나, 빈 체제가 성립되고 무너져내리는 과정을 보면 이 체제의 목적은 상호 견제와 세력 균형이였고 결국 각 국의 이해관계로 인한 협력 체제의 붕괴와 내부에서의 반발이 맞물려 무너져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긍정적으로 보는 쪽에서는, 빈 체제를 근대적 [[국제기구]]의 첫 사례로 본다. 실제로 [[국제정치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시기이기도 하다. 웬만한 외교사 관련 서적 첫머리에서 다루는 것이 바로 빈 체제의 기원이 된 [[빈 회의]]일 정도다. 특히 [[정치현실주의|현실주의]] 외교의 거두이자 빈 체제 연구에 큰 공헌을 한 [[헨리 키신저]]는 그의 여러 논문과 저서에서 메테르니히에 대한 팬심을 열렬히 표출하기도 했다. 반면 부정적으로 보는 쪽에서는 이미 변하고 있는 시대적 배경을 무시하는 [[시대착오적]]인 조치였다고 평가를 하기도 한다. 성과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빈 체제는, 크림전쟁 시기까지 40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이 걸쳐서 유럽의 세력균형을 이뤄내었다. 프랑스 혁명을 긍정적으로 본다면 빈 체제는 고작 40여년의 시간을 벌기 위해 인간의 자유와 역사의 수레바퀴를 억누른 반동적인 체제로 보일 것이다. 빈 체제는 평화라는 긍정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론 기득권의 사익을 보호하려는 동기가 강하게 작용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반면 전쟁의 폭력성에 주목한다면, 그리고 역사를 본질적으로 그 시대 그 문화의 맥락에서 파악하고자 한다면, 동시에 '''[[역사]]의 수레바퀴'''라는 워딩을 회의적으로 본다면, 빈 체제는 옛 질서[* 물론 진보주의적 세계관에선 '''[[질서]]'''라는 워딩을 회의적으로 사용하지만, 이러한 세계관에서 보더라도, '''질서의 붕괴'''는 새 질서를 위한 수단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붕괴 자체로는 유해한 현상이다.] 붕괴의 혼란 속에서 제2의 나폴레옹 전쟁을 막고 40여년의 평화를 가져온 체제로 보일 것이다. 빈 체제는 100년 후의 [[베르사유 조약]]과 달리 패전국에게 관용을 베풀고 국제체제의 한 축으로 끌어안았으며, 강대국 다섯의 다극체제라는[* 패권을 주도하는 압도적 강대국 2개와 나머지 종속적 국가들로 이뤄진 양극체제{{{-2 (예: 냉전)}}}보다는, 여럿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 각자 독자적인 플레이어로 활동하는 다극체제{{{-2 (예: 1914년의 유럽)}}}가 훨씬 변수가 많고 불안정하다.] 악조건에서 평화라는 실리적이고 본질적으로 민중 친화적인 성과를 이루었다. 게다가 외교가 아닌 각국 내정에서는 무작정 변화를 부정한 것도 아니다.[* 가령 프랑스만 하더라도, 굳이 [[7월 왕정]]까지 갈 것도 없이 복고 부르봉만 하더라도 결코 18세기식 절대왕정은 아니었다. 이는 프랑스 내부 정치 논리에서 나온 복잡한 타협의 결과이지만, 최소한 [[루이 18세]] 시절은 18세기식 절대왕정을 박제하고 보존한 국가가 아니었다.] 이후 빈 체제는 1860 ~ 70년대 [[이탈리아 통일]] 전쟁과 [[보오전쟁]](1866년), [[보불전쟁]](1871년)을 거쳐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의해 [[1873년]]의 [[3제 동맹|삼제 동맹]]으로 부활한 측면이 있지만, 다시 [[빌헬름 2세]]에 의해 붕괴되면서 독일 - 오스트리아 - 이탈리아의 [[삼국 동맹]]과 영국 - 프랑스 - 러시아의 [[삼국 협상]]으로 재대립하였다. 이것이 거대한 전쟁으로 이어진 것은 [[1914년]]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것으로 빈 체제가 이루어진지 정확히 99년만에 평화는 상실되고 30년간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이 몰아닥쳤다.''' [각주] [[분류:유럽사]][[분류:19세기]]